밤에 배가 고파서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통을 꺼내 앉았는데 식탁에 놓인 잡지에 요새 각광받는 몸짱 아줌마에 관한 기사가 눈에 띄었다. “그녀의 성공 비밀은 철저하게 이른바 ‘인간시간표’를 따랐다는 것이다. 아침 오전 8시30분, 점심 오후 1시30분, 저녁 오후 6시, 시간 지키고 간식도 정확한 시간에 먹는다. 오전 7시30분에 오트밀, 11시30분에는 야채와 과일을 꼭 먹는다. 운동은 10시부터 11시 반….” 아이스크림을 수북이 뜬 내 수저가 문득 허공에 멈추었다.

‘인간시간표’―초등학교 시절 방학 때마다 동그라미를 나누어서 공부하기·놀기·밥먹기 등등 계획표를 짜놓고 이틀 이상 지킨 적이 없던 때부터 오늘날까지 내게는 낯선 말이다. 최근 출판된 ‘시간을 정복한 남자’라는 책에 소개된 소련의 과학자 류비셰프도 인간시간표의 표상이었다. 82세로 세상을 떠날 때 학술서적 70여권과 단행본 100권 분량의 연구논문을 남길 만큼 업적이 많았지만 그는 동시에 1주일에 한 번 이상 공연을 관람했고 정상적으로 직장에 다녔으며 친지들에게 애정어린 편지도 자주 썼다. 연구논문 한 편 가지고 몇 달씩 질질 끄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런데 그 비밀도 사실은 ‘인간시간표’였다. 1965년 어느 날 류비셰프의 일기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서적 색인 정리에는 15분, 도브잔스키 읽기 1시간15분, 곤충분류학 2개의 그물 설치 20분, 곤충 분석 1시간55분, 안드론에게 편지(15분)….”

미국의 유명한 정치가·사상가·사업가·과학자·발명가·자선가 등, 다방면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벤저민 프랭클린(1706~ 1790)도 또 다른 ‘인간시간표’의 예이다. 그는 가난한 양초제조업자의 열일곱 형제 중 열다섯 번째로 태어나서 초등학교도 중퇴하고 인쇄공이던 형의 일을 돕다가 열일곱 살에 무작정 상경, 타고난 성실함과 치밀함으로 자수성가해 거부가 된, 그야말로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다. 그가 자신의 성공담을 아들에게 주는 편지 형식으로 쓴 ‘벤저민 프랭클린 자서전’은 자서전 문학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아침 5시에 일어나 하루 계획을 세우고 저녁 9시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그는 철저하게 규칙적으로 생활함과 동시에 열세 가지 덕목을 정해놓고 철칙으로 지켰다. 그는 “절제(과식하지 말고 기분 좋아질 만큼 술 마시지 말 것)·과묵·질서(모든 물건을 제자리에 두고 사업에 있어 시간을 맞출 것)·결단력(결정한 것을 꼭 행동에 옮길 것)·검약(나 또는 다른 이에게 선행을 하는 일 외에는 절대로 돈을 쓰지 말 것)·근면(1분도 낭비하지 말 것)·성실(속이지 말고 언행을 일치할 것)·정의(남에게 나쁜 일을 하지 말 것)·중용(극단적인 것을 피할 것)·청결(몸 옷 주거지의 불결함을 참지 말 것)·침착(사소한 일이나 불가피한 상황에 동요하지 말 것)·정결(건강이나 자손을 위해서만 성교를 할 것)·겸손(예수와 소크라테스를 닮을 것)을 지키고, 거의 무학이지만 막대한 독서량으로 실력을 키운 것이 성공의 근간이 됐다”고 말한다.

얼굴짱·몸짱·실력짱 등, 누구든 한 가지 목표를 세우고 철저한 자기훈련, 자기 관리로 인간시간표가 된 이들은 다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나같이 잠 오면 자고 배 고프면 먹고 회식 가면 내 돈 내는 것 아니라고 더 먹는, 무절제의 표본 같은 사람도 그런 사람들을 보면 간혹 ‘인간시간표’의 꿈을 꿔보기도 한다.

그러니 한밤중에 들고 있는 이 아이스크림은 어떻게 할까. 에라 모르겠다, 실천은 내일부터, 일단 입에 넣고 본다.

(장영희·서강대 영문과 교수)

-조선일보 북스(2004.02.28자)중-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0혀니^^ 2004-03-02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에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를 구입했는데 아직 읽지 못했다. 이 글을 읽고 빨리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벤저민 프랭클린 자서전’도 읽어 보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