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11 - 제4부 동트는 광야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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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연해주에서 이주해온 조선인들은 타슈겐트라는 곳에 도착하여 소금기가 남아 있는 갈대밭 황무지에 집단농장을 만들어 10년 동안 그곳을 떠날 수 없다는 금족령을 내리고 심지어 농민들의 한이 서린 민요 아리랑까지 금지시켰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하더니 일본 놈들은 나라를 빼앗았기 때문에 민족의 원수이고 착취하는 이유가 있는데 소련 놈들은 투쟁을 같이한 동지들을 착취하는 토사구팽을 당하니 억울하기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나쁜 짓을 많이 했기 때문에 소련이 붕괴되고 현재에 이르렀다. 관용이 없는 국가는 어떠한 정책을 펴든 지속될 수 없는 것이 만고불변의 법칙인 것이다. 인간 또한 별단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일본군의 집단부락을 이용한 차단작전과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여 포위작전은 독립군에게 치명적이었다. 배고픔과 추위라는 본능이 이성을 능가하지 못한 일들이 발생했다. 2사장 중국인 간부 정빈이 부하들을 데리고 일본군에게 투항해서 부대의 기밀을 모두 일본군에게 넘긴 것이다. 그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이해는 가지만 용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한편 방대근은 이를 타파하기 위해 일본 보급대를 덮치다 일본군의 공격으로 이광민을 잃고, 1로군의 토벌대에 의해 조카 삼봉이도 잃고, 후방대원인 누나 수국과 필녀 또한 200명의 일본군에게 쫓기다 결국 죽고 동북항일연군은 소련으로 후퇴하여 궤멸상태가 된다. 인간의 탐욕이 전쟁을 낳고 그 전쟁 또한 인간이 하기 때문에 인간의 본능이 충족되지 않고 이성만으로 본능을 뛰어 넘을 순 없는 것이다.

 

세월이 지나 송가원과 옥비 사이엔 딸이 태어났고, 허탁은 경성콤 그룹 사건에 연류 되어 감옥에 갇히고, 송중원은 감옥에서 출소하여 시골에 내려와 야학을 가르쳤고, 하시모토는 김제읍장에 취임했고, 정도규는 조선공산주의자로서 소작쟁의, 노동쟁의, 동맹휴학을 주도하며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는데 앞장서며 이현상과 위장을 위한 위장으로 전향을 하는데 일제는 그에게 친일조직인 국민총력연맹 만경지부장의 감투를 주었고, 장칠문 또한 상공회의소 회원에 국민총력연맹 군산지부장이 되어 권세를 떨치고 있고, 만석꾼 정재규는 쌀 선물환(미두)에 전 재산을 탕진하여 아내와 아들까지 벌레 보듯 하자 정상규에게 먹고 살길을 부탁하러 갔다가 망신만 당하고 쫓겨나 논두렁에서 쓰러져 죽고, 정상규 또한 자식들이 재산을 빼내는 바람에 화병에 걸려 결국 반신불수가 되고, 배필룡은 금녀와 결혼 한 후 징용에 끌려가고, 박용화는 동경제대 법학부에 입학하여 자신을 배신한 에이코에게 복수를 하고, 공허와 홍씨의 아들 전동걸은 사혁회를 조직하여 국외활동을 계획하고, 방대근은 광복군의 비밀감찰대장이 되어 감찰활동을 은밀하게 벌이고 있고, 방영근이 사는 하와이에서 광복군에 지원해온 6명은 연합군과의 협정에서 영어회화 실력을 발휘하며 국가에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연합군은 승리를 장담하며 대한민국은 국가를 스스로 세울 능력도 없고 국가를 운영할 자질도 없기에 신탁통치를 하겠다고 하자 국민 대부분이 또 다른 형태의 식민지가 되기 때문에 이를 반대 한다. 약소국으로 지긋지긋한 생활에 회의감이 들었을 것이다. 과거와 같이 무력으로 식민지 정책을 펼치진 않겠지만 힘을 키우지 않으면 경제나 문화 등으로 얼마든지 식민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국민 모두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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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10 - 제4부 동트는 광야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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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일본군과 싸워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조선혁명당군의 총 사령관 양세봉 장군은 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일본 경찰 밀정인 박창해의 계략에 빠져 대원들과 환인현 소황구에서 일본군에 포위되어 전투 끝에 전사 하였으나 그의 죽음은 독립군은 물론이고 조선백성들 까지 동요하기 충분했다. 정신적 위안이 되었던 분이 없어지니 구심점이 없어진 같았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아리랑이란 책이 나에게 많은 지식을 주었다. 독립군은 임시정부의 명령하에 움직이는 단일 조직인줄 알았는데 각기 다른 조직이었다니 나라를 되 찾기 위한 열망이 얼마나 컸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조직들을 찾아 보았다. 자세한 설명은 너무 길어서 간단하게 발취하였다.

광복군 임시정부가 주도한 항일무장단, 조선의용군 중국 우한에서 민족혁명당 중심으로 결성된 연합체인 조선민족전선연맹의 무장세력으로 창설되었으나 중국 국민당의 반공정책에 회의를 느껴 중국 팔로군과 합류하여 연합, 동북인민혁명군 .중연합의 항일무장단체인데 후에 동북항일연군으로 흡수 개편, 동북항일연합군 중국 공산당 지도하에 만들어진 유격부대의 군사조직이며 김일성등은 후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권력 핵심이 되었으며 현재 북한군의 모태, 경학사 만주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로 신민회 간부들이 추축, 부민단 만주 퉁화에서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한 자치기관으로 재만한인의 복리증진, 자활대책의 강구, 자녀교육, 애국청년의 군사훈련, 독립운동기지 조성이 목적, 한족회 남만주에 흩어져 있던 각 기관을 부민단을 중심의 이주동포의 자치기관, 서로군정서 남만주에 있던 독립혁명단체, 대한 독립단 유인석, 백삼규, 조병준, 홍범도등이 조직한 독립운동단체, 중광단 서일등이 국외로 탈출한 의병들을 규합하여 조직한 독립운동 단체이며 김좌진 장군을 맞아 북로 군정서로 개편, 대한정의단 대종교단체에서 만든 결사대, 북로군정서 대종교를 중심으로 대한군정서로 출범했으나 추후 대한군정회와 대한 정의단은 대한군정부로 개편, 간민회 중국 지린성의 북간도지역에서 김약연등이 조직한 조선자치단체로 문화계몽운동과 민족자치운동을 벌임, 대한국민회군 – 1920년 중국 길림성과 연길에서 창설된 항일 독립군 부대로 대한 독립군, 군무도독부와 연합하여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승리에 기여, 대한독립군 홍범도가 사령관이 되어 의병출신을 중심으로 설립된 독립군 부대로 추후 대한독립군단으로 통합, 대한군북로독군부 대한독립군, 대한국민회의 국민군, 군무도독부가 연합하여 하나의 독립군단으로 조직, 조선민족혁명당 - 김원봉 주도 창립, 한인애국단 -1931년 조직하고 단원은 이봉창, 윤봉길, 한국국민당 - 김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 한국 광복군을 김구, 지청천이 조직하여 신흥무관학교 출신 중심으로 창설하고 김원봉의 조선의용대를 흡수 통합, 인물은 김두봉, 주소앙, 최석순,  한인독립당- 미주에서는 김규식 조직을 만들어 이끌었다. 정말 대단하다. 이러한 수많은 독립단체와 독립운동가가 있었기에 우리나라 독립이 가능했다. 미국이 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더라도 시간은 좀 늦어졌을지 모르지만 틀림없이 우리의 힘으로 독립이 이루어 졌을 것이다. 많은 애국지사들에게 애도를 표한다.

 송수익은 15년형을 언도 받고 봉천 2감옥에 갇히자 둘째 가원이 옥바라지를 하기로 하고 박미애와 의논을 하는데 그녀가 거절하자 미련 없이 혼자서 만주로 향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옥녀는 여행가방을 챙겨 봉천으로 가서 가원과 함께 독립운동을 한다. 그러나 송수익은 모진 고문으로 병이 생겨 만주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한 후 운명한다.

죽어라 돈 버는데 만 열중하던 장덕풍은 예순아홉이 되던 해에 풍에 맞아 벽에 똥칠을 해대고 아버지 덕택에 호의호식했던 백남일 또한 명씨박이 에다 아편쟁이가 되어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데 장칠문은 경찰을 그만 두고 아버지 재산을 차지하여 위세를 부리며 사업가로 거듭나고 있다.

 

동북인민혁명군은 제1로군에서 제11로군까지 편성되었는데 항일 유격대들의 활동지역을 기반으로 만주 중부 이남지역전체 그리고 압록강 끝 안동에서부터 우수리 강변의 요하, 동북쪽으로 하얼빈 위의 해론 근방, 서북쪽에서는 봉천에서 길길 까지 활동 하였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김일성은 제2군에 가담하여 활동을 하였다. 방대근은 항일연군 사령부 직속으로 특무공작대를 가동시켜 변절자, 투항한 자들을 색출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이 들은 부대의 기밀을 넘겨주고 적의 길잡이가 되어 밀정이나 친일분자보다 훨씬 부대에 피해를 입혔다. 노장업이라는 인민혁명군 출신 수색대장을 제거하러 들어 갔는데 거기에는 노병갑이 있었다. 얼마 전까지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동지가 나를 향해 비수를 꼽는 형국이라니 누구를 탓할 것인가? 시대를 잘못 타고 난 탓이 아닐런지?

 

연해주에서는 조선의 독립과 소비에트사회주의 공화국연방 건설을 위해 적군, 백군과 함께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는데 그 공헌에 보상은커녕 첩자행위 방지와 중앙아시아와 카자흐스탄의 농업인력 공급의 명분을 들어 가혹하게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 명령을 스탈린이 직접 내렸다. 힘이 없는 나라의 슬픔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화려했던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이제부터라도 분열하지 말고 힘을 기르는데 열중했으면 좋겠다.

 

보름의 아들 오삼봉은 비밀조직 혈청단을 만들어 활동하다가 발각되어 배영범과 함께 공허스님의 안내를 받으며 배로 압록강을 건너다 발각되어 공허스님은 총을 맞아 숨지고 다행히 그들은 탈출에 성공하여 이모 수국이와 외삼촌 대근이를 만나고 독립군이 된다. 리더의 종류는 5가지가 있는데 이 중 최고의 리더는 본인이 훌륭한 리더 이면서 자기와 같은 아바타 리더를 후계자로 삼는 것이다. 훌륭한 자녀로 키우고 싶으면 부모가 먼저 훌륭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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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9 - 제3부 어둠의 산하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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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보다는 나를 먼저 생각한다. 혁명을 하고 독립을 하는 사람은 나 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송가원의 친구 허탁은 신간회 회원인데 송가원의 신간회 가입을 막고 학생사상단체와도 관계를 갖지 말라고 한다. 이 말은 아버지나 형이 조선을 위해 충분히 희생을 하고 있으니 공부를 마치고 집안을 돌보라는 친구의 충고였던 것이다.

신간회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연합 단체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 발족되었고 활동은 전국 순회 강연, 야학 개설, 웅변대회 등을 통한 계몽운동과 소작권 보호운동, 일본인 이민반대, 최저 임금제 확립, 노동조건과 임금의 민족적 차별폐지 등 항일 운동을 펼쳤고, 회원이 지속적으로 늘고 있는 상황에 장개석이 상하이에서 공산주의자를 학살하자 코민테른의 전술과 지시로 공산주의자들이 탈퇴하면서 신간회는 스스로 해산하였다. 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를 지지할까 궁금했는데 아리랑과 태백산맥을 읽으면서 궁금증이 해소 할 수 있었다.

저자는 송수익이라는 가상인물을 내세워 신채호 선생을 대변하고 싶지 않았나 싶다. 신채호선생은 행동하는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안창호, 양기탁과 함께 신민회를 만들어 국채보상운동을 하고 강제 병합이 되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광복단을 만들어 활동하다가 임시정부 때 의정원 의원으로 뽑혔으나 이승만의 외교 노선에 반대하며 물러났다. 1928년 일본과 맞서기 위해 폭탄 제조소 설치 자금을 마련하다가 타이완에서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 받고 뤼순감옥에서 뇌일혈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업적은 한국사 연구를 통해 근대 민족주의는 왕조 중심이 아닌 민족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점이다. 즉 역사의 주체는 민중이어야 하고 민중에 의해 독립이 이루어 져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사회 내부의 불평등한 구조부터 없애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한반도가 신라를 중심으로 한 고대사와는 다르게 고구려를 중심으로 우리의 역사가 재편되어야 한다고 하며 조선 상고사, 조선사 연구초, 조선상고 문화사 등을 썼다. 일본과 중국의 역사왜국 하에 우리가 가져야 할 역사관을 제시한 것이라 생각한다. 신채호 선생이 아나키스트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무력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한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숙연해 진다. 그리고 그의 투쟁에 100% 지지한다. 실력도 능력도 없는 주제에 백성 위에서 군림하는 지도자라면 차라리 없는 편이 낫고, 무능력하게 말로만 하는 독립운동 보다는 행동하는 편이 훨씬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동만의 탐욕에 눈이 멀어 우노사와라는 일본인 사금 기술자를 불러 들여 전답을 팔아 사금 사업에 투자하는데 기술자들끼리 짜고 사금을 빼돌리고 주먹패들 하고 통정하여 위협까지 당한다. 수순으로 이동만이의 세상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송수익은 조선혁명당군과 중국의용군이 연합하여 일본군과 맞서는 것을 의논하기 위해 장춘에 갔다가 주양지의 조카 주장록의 밀고로 일본군에 체포되고 만다. 우리나라의 큰 별이 떨어진 것이다. 자유주의나 사회주의나 신자유주의나 돈에 의해 사람이 조정 되는 것을 보면 돈이란 존재가 정말 대단하단 생각이 든다.

천수도의 아들 천상길이도, 김판술의 아들 김건오도, 보름이의 아들 삼봉이도 독립군에 들어 갔는데 지삼출의 아들 지만복은 몸이 허약하여 독립군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데 지삼출은 물론 자신도 부끄러워한다. 하지만 송수익은 총칼을 든 사람만 독립 투사가 되는 것은 아니고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일을 하는 것도 독립운동이라고 하였다. 사람이 모두 똑 같을 수는 없다. 공장 노동자라 하여 잘못된 삶을 사는 것도 아니고 사장이나 국회의원, 대통령이라 하여 올바른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없다. 다만 기득권 자기들이 정해놓은 보수에 따라 임금이 정해질 뿐 나라를 위해 하는 일은 별단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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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흥 2013-01-22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문화유산 아리랑]

詩人/靑山 손병흥

한민족의 혼 얼이 깃든 정신을 이어받아
오랜 세월동안 구전되어온 민요가락으로
눈물 한속에 얼룩져 승화된 민족의 노래

우리문화의 우수성 문화국가 위상을 드높여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 쾌거이룬 아리랑

이제 다시금 보다 슬기로운 우리들의 지혜모아
지구촌 세계무대에 더욱더 빛을 밝히고 보존하여
계승 발전시켜 나가야할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유산
 
아리랑 8 - 제3부 어둠의 산하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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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근은 의열단 단원으로 주요임무가 밀정 제거였다. 그러나 이번 임무는 윤주협과 고향에 가서 자금 조달하는 임무였다. 특이한 것은 마르틴이라는 독일인이 폭탄제조 기술자로 유일하게 월급 받는 의열단 단원이었다고 한다.

의열단이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중심이었고 단장은 약산 김원봉 선생이 맡았고 신채호 선생의 의열단 선언문에는 이승만의 외교론과 안창호의 준비론은 적절한 방법이 아니고 무장투쟁을 하는 것이 독립투쟁방법이라고 역설하였다. 주요활동은 일본 고관 암살과 관공서 테러였고 급진적 민족주의 성향을 띤 애국단체였다.

김원봉 선생은 경남 밀양출신이고 무정부주의자였으나 조선민족혁명당을 지도하면서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하다가 광복군 부사령관에 취임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을 지내다가 광복 후 월북하여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까지 역임하다 김일성 비판을 제기한 연안파 제거작업 때 숙청 되었다.

그들의 공약 10조를 보면 그들의 정의로운 신념을 느낄 수 있다. 첫째 정의를 실행한다. 둘째 조선의 독립과 세계 평등을 위하여 희생한다. 셋째 충의의 기백과 희생정신이 확고한 자만이 단원이 될 수 있다. 넷째 단의 뜻을 우선하고 단원은 이에 따른다. 다섯 의백한 사람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한다. 여섯 언제 어디서든지 매월 한차례 상황 보고한다. 일곱 언제 어디서든지 모이도록 요청하면 꼭 응한다. 여덟 죽지 않고 살아있어 단의 뜻을 이룬다. 아홉 한 사람은 다수를 위하여 다수는 한 사람을 위하여 헌신한다. 마지막 열 단의 뜻을 배반한 자는 척살한다. 강력한 의지가 엿 보인다.

고서완의 도움으로 백남일 정미소에서 일하던 직원 배을남과 그의 직원들은 8일만의 파업으로 노동자들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뜻이 있는 지식인들의 도움으로 생존권 보장을 위한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것이다.

옥녀는 남원명창대회에 나가 1등을 하는데 오빠 득보의 독립을 돕고자 기방에서 반년만 소리를 하려고 하는데 이동만 생일잔치에 가서 소리를 하다가 사찰과장의 눈에 뛰어 이동만의 흉계로 옥비는 몸을 빼앗기기고 이동만의 둘째 아들 이경욱 역시 옥비 명창을 사모하나 아버지의 흉계로 옥비가 유린당한 것을 알고 가슴 아파한다.

득보는 월엽을 잊지 못하고 이미 결혼까지 한 월엽이 사는 마을까지 가서 방황을 하자 공허는 언짢아 하며 홍씨 집에서 일하던 처녀와 결혼을 하여 연희라는 딸까지 얻고 행복하게 살려고 하는데 이동만의 흉계로 자신이 옥에 갇히고 자신을 꺼내기 위해 동생이 사찰과장에게 당한 것을 알고 분해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공허스님은 운봉스님에게부처님의 말씀은 자비, 동학은 인내천, 야소교(기독교나 천주교)는 박애, 공산주의는 혁명이라는 사람의 차별을 없고 공평하게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자는 공통점이 있지만 방식이 각기 다르다는 말을 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와 정치는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이 목적일 텐데 서로 싸우는 것을 보면 어느 것이 진실인지 모르겠다.

한편 송수익의 부인 안씨는 중병을 얻어 정신이 온전치 못하고 큰 아들 송중원은 일본에서 유학 중에 공산당에 가입하여 당원들과 비밀집회 중 체포되어 서울에서 옥살이를 하고 작은 아들 가원은 동맹휴업 주동자로 퇴학을 당하고 집안이 풍비박산 직전이었다. 집안 모두가 혁명 투사로 열렬한 박수를 받아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집안 식구 모두가 집안을 돌보지 않고 혁명에만 몰두하는 것이 잘한 일인지는 모르겠다. 사회 구성원의 기본인 가족이 있어야 국가가 있듯이 가정을 지키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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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흥 2013-01-22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문화유산 아리랑]

詩人/靑山 손병흥

한민족의 혼 얼이 깃든 정신을 이어받아
오랜 세월동안 구전되어온 민요가락으로
눈물 한속에 얼룩져 승화된 민족의 노래

우리문화의 우수성 문화국가 위상을 드높여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 쾌거이룬 아리랑

이제 다시금 보다 슬기로운 우리들의 지혜모아
지구촌 세계무대에 더욱더 빛을 밝히고 보존하여
계승 발전시켜 나가야할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유산
 
아리랑 7 - 제3부 어둠의 산하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일본의 식량 난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 정부에서는 산미증식계획을 추진했는데 요시다는 조선사람들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영구소작권을 주고, 개간비를 따로 지불하고, 소작료도 3년간 면제해준다는 거짓말로 농민들을 꾀어 간척사업을 하여 농토를 확장해 나갔고, 이동만은 동원된 농민들에게 줄 식비로 장난을 쳐 많은 돈을 착복해 갔다.

백남일은 백종두가 죽고 나자 건달패들이 자릿세를 받아가고 경찰서에서도 그를 더 이상 비호해 주지 않았다.

공허는 득보와 함께 옥녀를 팔아먹은 주막집에 가서 주모에게 옥녀의 행방을 물었으나 놀이패에게 팔아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지 못했으나 옥녀가 성장하여 오빠를 만나게 되고, 득보는 신세호의 집에서 글도 배우고 일을 도왔는데 그의 딸 월엽과 서로 좋아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그리워 한다. 큰 딸 화엽이는 송수익의 장남 송중원과 혼인을 시켰으나 아버지를 따라 독립운동에 참여한다.

양치성은 수국이를 속여 같이 살았으나 양치성이 밀정이고 어머니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술에 취해 자고 있는 양치성을 칼로 찌르고 필녀가 있는 통화로 간다.

공허는 손수 탱자나무로 홍씨의 비녀와 대추나무 노리개를 만들어 홍씨에게 미안함을 비쳤고 홍씨 또한 공허가 큰 일하면서 본인과 아들까지 생각하는 것을 고마워 했다.

장상규는 정재규에게 받은 삼천석의 토지로 만석꾼이 되려고 독하게 자린고비짓을 하며 쌀밥도 먹지 않고 방에 불도 넣지 않은 체 살며 소작인의 아내를 탐하는 등 소작인들에게는 못된 짓을 일삼았다.

다행히 정씨 형제 중 정도규는 일본 유학을 하며 애국정신이 고취되어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정씨 가문의 허물을 상쇄시키려 했다.

 

윤철훈과 이광민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제와 투쟁을 하였고 윤철훈의 사촌동생 윤선숙은 이광민을 사모하였다. 이들은 이동휘 선생과 뜻을 같이하는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 들었다. 러시아의 영향을 받았지만 코미니테른에서 인정 받지 못하고 오히려 이용당하고 만다.

 

춘원 이광수는 민족개조론을 들고 나와 조선인은 허위와 공상과 공론만 즐기고 게으르며 서로 신의와 충성이 없으니 이를 반대방향으로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으로는 이 글을 쓴 이광수를 죽이고 싶도록 밉지만 다른 쪽으로 보면 맞는 얘기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을 비롯한 문무대신, 관공서 관직에 있는 고위, 하위 공무원들 심지어는 지주에 농감들까지 개념이 없었으니 그렇게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친일파가 아닌 다른 사람이 쓴 글이라면 그렇게 이해해도 무방한데 이광수는 아니다고 생각한다.

독립운동가 중 걸출한 인물들이 많았으나 그 중 사상이 다른 4명의 지도자를 살펴보자. 먼저 도산 안창호 신민회와 만주 흥사단 활동이 후 임시정부 총리직을 연임하고 국민회의를 주도하였으며 재건 분열에 앞장서고 임시정부 통일전선을 구축하였음.

성재 이동희 신민회 활동을 하였으며 공산주의 사상을 수용하여 한인 사회당, 고려 공산당을 창당하고 코르테른과 접촉을 시도 하고 이승만과 대립하였으나 코민테른 자금조달 문제로 임시정부를 떠났음.

단재 신채호 좌익이며 무정부주의로 정치운동을 벌였고 이승만 위임통치에 반발했으며 의혈단이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강경한 폭력 투쟁으로 민중혁명노선을 쟁취하고자 하였슴.

우남 이승만 강력한 대미외교를 중시하였고 많은 지도자들과 반복을 하였기에 거론하기 싫음.

 

어디에 있든 애국을 하는 사람은 애국을 하고 나쁜 짓을 하는 자들은 나쁜 짓을 하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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