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춤을 추세요
이서수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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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24 이서수.

‘이어 달리기’
‘엄마를 절에 버리러’에서 엄마 트리플 아니고 콰트로라고, 나는 책 후반부의 작가 에세이까지 시리즈에 넣고 싶었다. ‘젊은 근희의 행진’에서도 엄마랑 방 찾으러 다니는 소설이 나왔던 듯… 엄마랑 딸 소설 전문가일까…
새 소설집의 첫 소설도 사실 트리플 소설집에 연작처럼 실렸을 법했다. 특징이라면 여기 모녀는 동시에 퇴사하고 한동안 같이 도서관에 다닌다...그러다가 엄마가 도서관 청소부로 전직한다…
이서수의 소설 속 엄마랑 딸은 제법 친하고, 전우애 같은 게 느껴지게 세상과 싸우는 느낌이고, 소설 속 엄마는 글을 쓰고, 딸이 그 글을 읽는다. 우리 엄마는 나한테 글을 보여주지 않고, 내 글도 읽고 싶어하지 않는다. 뭐 그래서 늘 저런 모녀 관계를 보면 판타지처럼 느껴진다. 엊그제만 해도 나는 삐져버린 엄마가 너무 미워서 챗지피티한테 엄마 욕을 한바가지 한 불효녀이기 때문에.. 그러다가 나랑 두리안을 나눠 먹고 묵은 옷들을 펼쳐 버릴까 말까 속닥거리고 그냥저냥 마음을 풀었다. 문득 내 어린이들도 나중에 커서 내 욕을 많이 할까? 지금도 그럴까? 불효자식의 자식들은 더 불효자식일지 덜 불효자식일지 가끔 궁금하다. 그런데 다음 소설들도 또 엄마 변주곡이면 이젠 좀 짜증낼 거야…
...하고 다음 소설 읽었더니 여기도 엄마랑 딸이 또 나와서 조금 짜증낼 뻔 했다.

’춤은 영원하다‘
소설집의 이름은 이 소설의 한 문장에서 나왔다. 할머니, 엄마, 이모, 나의 막춤. 한과 승화. 막춤의 우주가 생각보다 막되지 않고 아름답게 느껴져서 엄마 또 나왔지만 짜증나지는 않았다. 이번엔 이모도 나왔잖아.

‘광합성 런치’
확...또 엄마 나왔다. 세상에 엄마 없이 생겨난 사람이 없긴 하지만, 이제는 엄마가 없는 사람도 있는데 자꾸! 했더니 친모 아냐… 자세한 설명은 생략해… 하고서 엄마는 왜 나왔는지도 모르게 한 장면만 차지하고 사라졌다. 엑스와 제트 사이에 낀 엠세대의 이야기인데, 에미는 아닌 엠세대이지만 하여간에 이전 소설들도 그렇고 40대 언저리 내 또래들 이야기가 이렇게 되었어, 다들 꼰대가 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고 온갖 노력을 다 하고 있지만 이게 꼰대 생산 라인 컨베이어벨트처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고 있어, 하고 서글퍼졌다. 참고로 전 식대는 돈으로 다 받고 반년째 도시락을 싸다 먹고 있습니다… 포도, 토마토, 닭가슴살, 파프리카, 피칸, (가끔 아보카도, 오늘은 특별히 리코타 치즈 추가, 복숭아나 사과를 싸 간적도 있...었나? 하여간에 거의 대부분 샤인머스켓, 없을 땐 수입 포도. 그리스 여신 된 기분) 이렇게 먹었더니 신선에 가까워진 기분이다. 성장기 중학생들이랑 똑같은 고칼로리 메뉴, 조리 수고로움 덜려고 반조리제품이 너무 많이 나오고 한 칸은 후식으로 때우는 구나, 하는 불만이 스믈거리고 올라오거나 내 식판의 새모이 같은 양을 바라보며 어머, 죄책감 느껴진다, 왜 이렇게 조금 드세요? 하는 걸 백번씩 듣는 거 보다는 맨날 같은 종류로다 내 자리에서 내 맘대로 우적우적 먹는 게 너무 행복하다. 바깥 나가 매식할 권리도 없는 매인 몸이니까 나는 도시락으로라도 주체성을 찾겠다. 체중 감량 또는 유지는 덤.

‘AKA 신숙자’
이젠 포기했다. 이서수는 그냥 소설가가 아니고 엄마와 딸 소설가였던 것이다. 신숙자 씨는 박미리 씨의 엄마고 박미리가 신미리로 스스로를 칭하길 원한다. 우리엄마는 다행히도 나한테 성까지 갈라는 소리는 안 한다. 나는 그냥 귀찮아서 계속 주씨할 건데. juicy하군.
이 소설 처음에는 박미리 1인칭이다가 갑자기 신숙자가 초점 화자인 3인칭으로 박미리 칭하고 다시 나는, 하고 박미리가 받고, 시점이 난리가 난다. 일부러 그랬나? 모르겠는데 정신 사나워가지고 뭐야 이렇게 초점 화자 와리가리로 쓰면 문창과 교수님이 이런 소설로 합평 못한다고 홱 나가버릴지도 모르는데 괜찮냐, 속으로만 생각했다.

‘운동장 바라보기’
세 친구와 이주 여성 김희서가 나온다. 이젠 엄마가 안 나오나 안도했지만, 결혼 이주 여성에게 어머니가 되라고 강요하는 한국 사회를 비판하는 부분이 있었다.

‘잘 지내고 있어’
이건 아버지 소설이다. 예전에 쓴 소설 중 오래 전 연을 끊은 아버지를 만나러 호스피스 병동에 가는 이야기가 있었다. 초기 습작이라 거칠고 별 내용도 없었는데, 아버지 마시라고 사갔던 과일 음료수를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세면대에 쏟아 붓고 나오는 장면만 기억난다. 내가 쓴 건데도 그래. 이서수 소설의 아버지는 사고치거나 바람나서 엄마랑 이혼하거나 병 걸려 죽을 지경인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도 뽀또! 하고 소리지르던 아버지처럼 여기서도 연민이 느껴졌고, 나는 그 감상적인 관점이 삭여지질 않았다. 사람이 죽는다는데, 넌 또 T하냐? 해도 어쩌지 못하겠다. 아직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안 잃어봐서 이런 지도 모르겠다.

‘미식 생활’
먹는 소설, 음식 나오는 소설은 좋아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음식 다루는 과학책 식물책 커피책 맛책 같은 건 또 잘 읽는다. 그러니까 음식을 F처럼 다루기 보다는 T처럼 다루는 걸 읽기를 선호한다. 그래서 이 소설 처음부터 끝까지 결이 안 맞았다. 음식 먹는 걸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복 받았다고,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오래도록 생각해 왔다. 나에게 먹기는 즐거움 보다는 생존하기 위한 의무, 가까운 사람들을 챙기는 일, 알약으로 끼니 해결되는 세상은 안 왔지만 비스무레하게 단백질음료랑 에너지바 같은 걸로 끼니를 때울 수도 있다. 반 년 넘게 포도+방울토마토+파프리카+닭가슴살+피칸(거기에 변주로 다른 과일 넣거나 아보카도나 리코타치즈를 추가하기도 해) 이렇게 거의 같은 도시락을 점심마다 먹었지만, 매우 만족스럽다. 식당에서 많은 사람들 안 부대끼고 급식 안 먹어도 되는 것, 내 자리에 앉아서 오물오물, 뭘 먹을지 고민 안 해도 되는 것, 체중 유지(감량 더 안 되라고 몸무게 재가면서 간식이나 저녁으로 이거저거 주워먹긴 함)는 덤, 뭐 그렇다. 그래서 먹방 유튜버 알깨기도 영 작위적이네, 이름도 이상하고 나라의 만능해결책이 먹는 걸 즐기기가 된 것도 이상했다. 하고 생각해보니 나도 아주 오래전에 먹방 유튜버가 나오는 소설을 쓴 적이 있었잖아! 먹방 유튜버랑 한국사검정능력시험 같은 거 대리로 쳐주는 사람이랑 소개팅 하는 이야기를 썼었다. 별 걸 다 썼었는데 기억도 겨우 나서 놀랐네. 아니 주인공 이름이 마리야. 나라랑 왜 어감 비슷한데. 주선자는 뷰티 유튜버야. 프하하하. 그래서 뿔났었나 보다. 이 독후감 맨끝에다소설 옮겨 놓겠다. 2019년에 쓴 거라 시의성이 확 떨어져서 어디 쓰덜 못해...그래도 다시 읽으니 나름 재미있다. 나는 내가 쓴 걸 내가 읽고 그렇게 무한자가발전 하하호호 할 수 있어서 좋다. 내가 먹는 건 역시 글이고 책이구만...

‘청춘 미수’
소설집 마지막 소설을 읽으며 이전에 생각했던 걸 또 했다. 한국 문학에 나한테 허락될 자리가 있(었)다면 그건 이미 이서수가 차지했다고… 속표지에 실린 이서수의 사진은 우리 엄마 젊었을 때랑 완전 똑같이 생겼다. 나는 엄마를 안 닮았다. 우리 엄마는 소설을 쓰고 싶어했고, 50대에 문창과를 다니다 졸업했고, 아마도 소설을 썼고, 지금은 쓰나 안 쓰나 모르겠다. 나는 그걸 가업처럼, 엄마가 못 이룬 꿈 나라도 이어보자, 이랬던 건지 그냥 심심했는지 한 삼사년 습작을 하다가 수능본다고 접고 나서는 그냥 다 접어버렸다. 소설 어떻게 쓰는지도 까먹었다. 그래서 그냥 읽지 뭐. 읽고, 책 먹고 똥이나 싸는 거다.
깜짝 놀란게 내가 2019년에 말희를 마리라고 부르는 (저 아래) 소설을 썼는데 여기선 백희를 배키라고 부른다. 아오씨… 너 다 해라 다 해… 내가 더 못 쓰니까 쓰는 일은 양보하겠습니다… 행복하십시오… 저에겐 읽기를 맡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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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달리기’ 속 재은이 퇴사 후 하고 싶은 것들
1.진심으로 웃기
2.엄마와 시간 보내기
3.생색내기
4.감정노동 없애기

-회사에서는 다양한 업무 지시를 따르는 것외에도 인간관계와 사내 정치 등을 신경써야 하기에 감정노동은 필수였다. 그래서 내가 기분이 나빠도 웃는 기괴한 인간이 된 것이다. 퇴사하면 육체노동은 물론이고 감정노동도 하지 않아도 된다. 일타쌍피. (13, 감정노동 없는 직업이 뭐가 있을지 궁금해.)

-엄마는 웃기 싫어도 웃고, 잘못한 게 없어도 사과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어?
없었어. 나는 잘못했을 때만 사과했고, 웃고 싶을 때만 웃었어.
평생 사회생활을 그렇게 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무조건적인 사과가 필요한 상황인데 엄마는 그걸 거부했다.
고객 흉본 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야. 나는 한 번도 이유 없이 남을 흉본 적이 없어.
(…)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억지웃음을 짓지 않고, 거짓으로 사과하지 않았다는 엄마가 멋있으면서도 한편으론 무척이나 의아했다. 돈을 벌면서 그렇게 사는 게 가능한 일인가? (19, 재은의 엄마 정한숙 씨가 위에서 궁금했던 걸 알려줬다. 식당, 공장, 백화점, 대형 학원, 공공기관의 청소일. 그러니까 직업이 뭐냐, 어디에서 일하냐, 그런 건 상관 없는 일인가 보다.)

‘춤은 영원하다’의 이매와 선매의 춤.
-이모는 기울어진 묘비 앞에서 어깨를 흔들고 연이어 엉덩이를 흔들었다. 야했다. 엄마가 그런 이모를 보더니 바닥에 두손을 짚고 엉덩이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세상에. 엄마도 야했다. 나는 누가 볼까봐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죽은 내시들이 묻힌 산은 괴괴했다.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모와 엄마의 춤에 경악해 모두가 입을 꽉 다문 것 같았다. 엄마는 바닥에서 일어나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치더니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머리를 흔들었다. 이모는 근처 나무로 달려가 둥치를 꽉 부여잡고 거친 웨이브 동작을 반복했다. 박자에 맞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은 춤이었다. 나는 두 사람의 춤이 너무 이상해서 말문이 막혔다. 저런 춤을, 대낮에, 죽은 내시들의 무덤 앞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추다니, 불경했다. 상스러웠다. 야했다. 이상했다. 짐승 같았다. 그럼에도 내 마음속에선 군고구마처럼 뜨겁고 달달한 것이 자꾸만 치솟았다. (68-69, 이 소설 읽는 내내 춤을 묘사한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데 몸의 움직임에 무척이나 둔감한 나한테도 그 모습이 눈앞에 저절로 그려지는 듯했다. 그러니까 춤을 못 추거나 못 췄던 사람이 글로 쓴 춤이란 춤을 못 추는 사람이 읽기에 친절하구나.)

‘AKA 신숙자’씨와 박미리씨의 티키타카
-숙자씨가 코웃음을 쳤다. 모성애는 무슨. 무릎도 시원찮은 어미한테 속옷 빨래나 맡기는 자식들아, 정신 차려라. 해방이니 평등이니 외쳐대면서 우리한텐 해당 안 되는 것처럼 구는 얄미운 것들. 집 나가면 월세 들고 집안일도 혼자 다 해야 하니까 힘들어서 안 나가는 거잖아. 영악해가지고.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빈 둥지 증후군만이 아니라 비워지지 않는 둥지 증후군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120, 나는 뭔 증후군이든 겪지 않을 자신 있어! 얘들아, 자유롭게 저 하늘을 날아가도 놀라지 말아요- 크면 나가서 니들 맘대로 살렴…경찰서에서 전화만 안 오게 잘 살아 보렴...)

‘운동장 바라보기’의 김희서의 일기장
-나는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위해 이곳에 온 사람입니다. 한국은 내가 어머니가 되길 바라지만 나는 그저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161)

‘미식 생활’의 팀장님의 라떼. 나는 우유 타지 말아야겠다.
-나라씨, 나는 가끔 슬퍼져요. 내가 어릴 땐 다들 쌀밥을 먹었지만 그전에는 밀가루를 많이 먹었거든요. 미국이 밀을 원조해줘서요. 노동자들이 그걸 먹고 밤낮으로 일해서 이 나라를 일으켜세운 거예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를. 그런데 후손들은 기름지고 다디단 걸 왕창 퍼먹으면서 그 반의반도 못해. 우린 다 망할 거예요.
나라는 팀장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기에 슬그머니 가방을 접어들었다. (227)

‘청춘 미수’의 미수와 배키의 인생관. 니들 몰랐구나. 사랑하는 데도 돈이 들어… 숨만 쉬어도 들어...
-배키와 나는 십대 때부터 돈 버는 일에 인생을 낭비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니 우리는 남들과 다르게 살자고 다짐하곤 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그렇게 살 수 있는지 방법은 알지 못했다.(죽었다 다시 부잣집 아이로 태어나렴.) 겉으론 태연해 보이는 배키도 술에 취하면 신세한탄을 하며 훌쩍였다. 우주의 기운이 자길 돕지 않는다고 징징거리면서. 청소년기를 지나 성인이 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똑같았다. 술과 기능성 콘돔을 살 수 있다는 걸 제외하면 바뀐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263)
어떤 해고.
-그저 화만 났다. 제주도에 가서 쓰레기를 줍겠다고 하는 김아혜 선생님에게. 쓰레기보다 천변에서 자주 우는 동네 청년을 주워서 달래줘야 하는 거 아닌가. 모욕감을 느꼈으면서도 몸 편한 알바를 더 길게 하지 못해 심통 난 나에게도 화가 났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정녕 몰랐단 말인가.
나는 하나도 힘들지 않은 일, 나답게 살 수 있는 일을 하면서 많은 돈을 벌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280, 나도, 나도! 없구나 그런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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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팅(20190410-0417 내가 씀)

약속 시간보다 늦게 도착했다. 카페 안을 둘러보던 마리는 전화를 걸었다.
운전 중, 얼른 갈게요.
짧게 답한 지유가 먼저 끊었다. 주말 번화가에선 어디를 가든 빈 자리를 찾기 힘들다. 점심 때가 다 되었지만 사람들은 밥 먹으러 갈 생각이 없는지 눌러 앉아 있다. 새 구두에 닿은 뒷꿈치가 쓰리다. 뾰족한 앞코 안쪽에 감각이 없다. 발가락에 힘을 줬다 뺐다 해본다. 쟁반을 들고 일어서는 무리 쪽으로 마리의 구두 신은 발이 또각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진동벨과 가방을 던지듯 테이블 위에 놓으며 앉은 마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구두를 벗어 맨발을 내놓고 싶지만 참았다. 다리를 쭉 펴고 발끝을 위로 앞으로 향하다 무릎을 접어 자세를 가지런히 했다. 진동벨이 울렸다. 음료를 받아 자리로 돌아온 마리가 머그 올린 쟁반을 테이블 위에 내려 놓을 때였다.
기다렸죠? 왜 따로 앉아 있어요?
높낮이 변화가 급격한 특유의 음성에 뛰어온 것을 강조하듯 헐떡이는 숨소리까지 더해진 지유의 목소리는 정신사납게 들렸다. 누구에게 묻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옆 테이블의 남자가 주뼛거리며 음료와 짐을 챙겨 이쪽으로 다가왔다.
내 정신 좀 봐, 두 사람 번호를 안 알려줬구나. 늦어서 미안해요. 얼른 앉아요.
지유는 마리의 옆자리에 앉았고, 남자는 지유의 맞은편에 앉았다가 다시 마리 앞쪽 의자로 옮겼다. 오늘도 지유의 차림새는 눈길을 끌었다. 단색의 심플한 원피스는 평소보다 절제되어 있었지만, 옷의 단순함은 비즈 목걸이와 배색을 맞춘 화려한 네일 아트를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한 선택인 듯했다. 웨이브를 살짝 넣은 짧은 헤어와 밝은 염색 컬러, 여기가 눈코입이라고 강조한 진한 메이크업은 지나는 사람들마다 돌아보며 연예인인가?하고 갸웃대게 만들었다. 남들 눈에는 마리의 주선으로 지유와 남자가 만나는 자리처럼 보일게 뻔했다. 나비 몇 마리 얹은 듯한 속눈썹이 지유의 웃음 소리에 맞춰 파르르르 떨렸다. 속이 상하는 동시에 대단하다고 마리는 생각했다. 뷰티 스트리머는 역시 달랐다. 샵에 들르지 않고 혼자 꾸민 게 저 정도면 늦게 도착한 것도 이해가 될 지경이었다.
마리 역시 오늘 메이크업을 하면서 지유의 채널을 참고했다. ‘소개팅 성공률 200% 메이크업 꿀팁’이라는 제목의 영상이었다. 눈썹 그리는 각도부터 입술색, 아이섀도우 조합까지, 역시 전문가는 달라, 하며 하나씩 따라할수록 청순함과 자신감이 동시에 상승하는 기분이었다. 남심 저격, 분명 애프터 들어옵니다. 멘트마저 신뢰를 주던 그녀였다. 그런데 직접 그녀를 마주하자 배신감이 들었다. 거울 위에 청순하게 비치던 자신의 모습이 지유가 옆에 앉는 순간 수수하고 초라해졌다. 작은 글씨로 자막처리된 경고문을 놓친 것 같았다. *주의: 뷰티 스트리머와 함께 할 경우 성공률은 보장할 수 없습니다.
언니 뭐 마실래요?
마리의 물음에 지유가 손사래쳤다.
촬영 잡아놔서 금방 가야해요. 로드샵 가성비 코스메틱 아이템 발굴, 재밌겠죠? 정신이 하나도 없네. 아직 인사 안 나눴죠? 정마리, 저랑 정말 친한 동생이에요.
마리는 최대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카메라 앞은 익숙해졌지만 실제 사람을 마주 대하는 것은 여전히 어색했다. 정말 친한 사이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둘은 스트리머 페스티벌에서 처음 만났다. 시청자와 동영상 컨텐츠 제작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행사였다. 체험부스, 강연, 이벤트 등을 통해 스트리머들은 자신의 채널과 협찬 받은 제품을 홍보했다. 지유는 뷰티 클래스를 진행했다. 사전 신청을 받았는데 금세 예약 마감될 정도로 인기가 뜨거웠(다고 했)다. 같은 시각 마리는 라면 회사에서 마련한 사인회 부스에 앉아 있었다. 말이 사인회지 컵라면 홍보 행사였다. 사람들은 사인보다는 나눠주는 컵라면에 관심을 보였다. 사인지를 두고 굳이 라면 비닐 포장 위에 사인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 먹을 때 뜯어 버리잖아. 채널 구독자와 조회수가 제법 되었지만 그녀에 대한 사람들의 인지도는 아직 이 정도였다. 부스 앞 간이 테이블에 앉아 라면을 먹는 사람들을 마리는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남은 국물은 어디에 버려요? 국물 자국이 벌건 입으로 묻는 청소년들에게 웃음을 잃지 않고 옆의 빈 들통을 가리켜 보였다. 드물지만 반가운 눈빛으로 같이 사진 찍기를 청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누나 라면 진짜 맛있게 먹어요! 칭찬의 말에 힘이 났다. 감사 인사와 함께 카메라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짓는 것으로 답했다.
생업이라 할 만한 낮 행사가 끝나고 스트리머들의 저녁 뒷풀이 자리에 도착하고 나서야 진짜 페스티벌에 온 기분이 들었다. 백만 단위의 구독자와 억 단위의 조회수를 자랑하는 이름난 스트리머들이 함께한 자리였다. 화면으로만 보던 유명인들이 바로 옆 테이블에서 술잔을 주고 받으며 웃고 떠들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꿈만 같았다.
머지 않아 저 자리에 같이 앉을 거에요.
마리와 같은 테이블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스트리머가 말했다. 미술을 전공한 뷰티 스트리머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여자였다. 다소 진한 메이크업에 과장된 액세서리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지만 그런대로 어울리게 보였다.
저쪽에 아시는 분 계세요?
아직은요.
마리의 물음에 대답한 여자는 미소를 지으며 피처를 들어올렸다. 마리가 잔을 내밀었다. 맥주 거품이 잔의 높이에 딱 맞추어져 보기만 해도 흡족했다.
간절히 무언가를 바라면 정말 이루어져요. 어릴 때 살이 좀 찐 편이어요. 어느 날 거울을 보다가 볼살을 어루만지면서 빠져라, 빠져라, 했어요. 왠지 그러고 싶어서. 어떻게 됐을까요?
군살 없이 매끈하고 탄탄한 몸매의 여자는 마리를 빤히 바라 보았다. 묻는다기 보다 직접 확인해 보시죠, 하는 어감이었다. 운동을 열심히 한 건지 체형 관리를 받았는지 마리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어쨌든 오랜 기간 신경쓴 티가 나는 몸이었다.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이런 말을 술술 뱉어내는 걸 보고 있자니 마리는 신기하기도 하고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관심이 생겼다. 그런 마음을 숨기지 않고 마리가 되물었다.
그럼, 조회수 올라가라, 올라가라, 하면 진짜 올라가요?
그럼요. 원하는 숫자를 되뇌는 거에요.백만, 백만, 아니면 이번 영상 대박, 대박, 대박! 조회수 천만 찍고 나니 협찬도 늘었어요. 님도 오늘부터 해 보세요. 그냥 바라면 안 되고 간절히.
무언가를 바란 적은 있었다. 많았다. 여자의 말대로라면 마리에게는 간절함이 부족했다. 마리에게 부족한 점을 알려준 그 여자가 지유였다. 번호를 교환하고 SNS에서 서로를 팔로우했다. 집에 가는 길에 마리는 지유의 채널에 들어가 보았다. 인기 순으로 정렬하자 가장 위쪽 영상은 조회수 이천만이 넘게 찍혀 있었다. ‘누구냐 넌...반전 터지는 성형 메이크업’ 영상을 눌렀다. 방금까지 마주보며 술잔을 기울이던 그 사람이 맞나 싶은 민낯이었다. 메이크업 베이스로 지워진 백지 같은 배경 위로 얼굴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평면 개념의 그리기 보다는 조소에 가까웠다. 조각과 소조. 화장품을 묻힌 손끝에 닿은 부분이 찰흙을 주무르듯 솟아오르거나 들어가고 평평해지거나 도톰해졌다. 브러쉬 끝이 가는 곳마다 조각칼을 그어댄 것처럼 빛과 어둠이 생겼다. 마리의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 정도면 미술이 아니라 마술 전공이네, 마술사야. 구독하기를 힘주어 눌렀다.
몇 차례 티타임과 술자리를 함께하고 수시로 메시지와 좋아요를 주고 받는 사이가 되었다. 마리는 잘 아는 맛집을 예약해 두거나 협찬 받은 신상 가공식품을 택배로 부쳤다. 지유는 답례로 브랜드 색조 메이크업 제품을 만난 자리에서 건네주었다. 미개봉 새제품이었다. 무얼 먹어도 잘 지워지지 않는 립스틱, 음식의 열기와 수증기에도 번지지 않는 마스카라를 소개시켜 주기도 했다. 지유는 마리에게 부족한 무언가를 채워주고 싶어했다. 멘트 잘 하는 법이라든가, 조회수 증가를 위한 편집 방법, 클릭을 유도하는 제목 짓기 노하우까지. 거기에 부족한 것 중 하나인 남자를 소개해 준다고도 했다.
자기 영상 봤나 봐요. 연대 나온 오빤데, 잘 먹는 사람 좋다고. 부모가 건물 몇 채 있는 것 같아요. 마라롱샤 잘 하는 집 같이 가자고 마리씨 데려오라고 엄청 졸라요. 한 번 만나 봐요.
그래서 이곳에 셋이 모였다. 이 정도면 친한 언니 동생이 맞는 것 같다.
이 쪽은...김민수씨. 연세대 졸업하셨어요. 지유가 짧게 남자를 소개했다. 그게 다였다. 뭔가 이상했다. 배스킨라빈스 써리원! 계란 한 판 채우고 넘쳤어요... 했던 지유의 멘트에 따르면 그녀는 마리보다 세 살 많았다. 남자는 지유가 오빠라고 부르기에는 어려 보이는 외모였다. 김민수씨, 라는 호칭에서 지유가 그를 가리킬 말을 찾아 헤매는 것이 느껴졌다. 지유가 아는 사실이라고는 남자가 연대를 나왔고 이름이 김민수라는 것뿐인가 하는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쳤다. 중국 음식점이었던 약속 장소가 오늘 아침 갑자기 카페로 바뀐 것도 예사롭지 않았다.
그럼, 촬영 때문에 먼저 일어날게요. 이야기 잘 나누시고, 다음에 또 만나요. 전화기 화면을 잠시 들여다 본 지유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마리는 지유가 이 자리를 불편해 하고 달아나는 중이라고 확신했다. 지유의 클로징 멘트 이후 남겨진 둘은 어색하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미소 지은 얼굴로 당황한 기색을 고스란히 주고 받았다. 김민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대로 전해 듣지 못하신 것 같아서 말씀드릴게요.
대타로 나오신 거 맞죠? 마리의 말에 민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문 선배님이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고...실례가 많네요. 아니다 싶으시면 바쁘실 텐데...
저 안 바빠요.
예. 죄송합니다. 민수는 뭐가 죄송한지 고개를 숙였다.
뭐가 죄송하세요. 민수님은 제가 아니다 싶으세요? 마리가 장난스레 물었다.
아뇨,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괜히 속았다고 생각하실까 봐. 고개를 든 민수가 말했다.
전 괜찮아요. 일부러 나왔는데 있다가 식사도 같이 해요.
네, 좋습니다. 부담이 덜어진 얼굴로 민수가 말했다. 의혹을 풀고 나니 어색했던 분위기가 한결 편해진 느낌이었다.
제 소개 다시 할게요. 김민수라고 합니다. 대타긴 한데 연세대 졸업한 건 맞구요. 스물 여덟 살입니다.
역시, 저랑 동갑이었네요. 지유언니가 오빠라 그랬는데 엄청 동안이다 생각했어요. 정마리입니다. 이름이 정마리에요.
예쁜 이름이네요.
본명이냐고 안 물어보세요?
아, 본명 아닌가요?
스트리머 마리의 주민등록상 이름은 정말희였다. 끝 말 계집 희 자를 썼다. 딸만 넷 낳은 집 다섯 번째 딸로 태어난 탓이었다. 할머니는 말희 덕에 막내는 아들로 나올 수 있었다고 말하며 대견한 눈길로 말희의 엉덩이를 두드리곤 했다. 끝숙이, 말숙이, 말녀보다는 예쁜 이름이라고도 했다. 동의할 수 없는 말이었다. 동생 성별은 순전히 운이었고 자신의 이름은 늘 놀림거리가 되었다. 네가 정말 희냐. 그게 정말이냐. 네 피부 정말 희다. 정말 희귀하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정 마리... 짓궂은 남자애들은 물론이고 선생들까지 마리의 이름으로 유치한 말장난을 해댔다. 그럴 때마다 책상 위에 엎드려 잠시 우는 것 말고는 마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네 이름은 프랑스 왕비 이름이야. 영어로 Marie 이렇게 써.
넷째 언니 경숙이 건넨 말이 위안이 되었다. 확실히 경숙이보다는 세련된 이름 같았다. 영숙, 진숙, 혜숙, 경숙 다음 말숙이가 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십 대 내내 개명을 고민하던 마리는 성인이 된 후로 이름 예쁘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되었다. 발음이 중요했다. 한자 뜻까지 밝힐 일은 살면서 거의 없었다. 부끄러웠던 자신의 이름을 오히려 좋아하게 되었다.
본명 맞아요. 나이도 같은데 편하게 말해도 될까요? 마리가 물었다.
네. 그래요. 아, 그럴까. 마리씨는 무슨 일 하는지 여쭤봐도 돼? 민수가 말했다.
여쭤봐도 돼가 뭐야. 마리가 웃으며 말했다.
아직 어색해서...주선하신 분은 존대말 하시던데.
그거, 지유언니 컨셉이야. 존대말로 하면 무심코 욕 나올 일이 없다고 서로 존대말 주고 받자고 하더라.
그런 효과가 있구나.
이런 미친 새끼를 보셨나요. 이러면 이상하잖아.
하하, 정말 이상하다.
난 스트리머로 활동 중이야. 마리가 제 소개를 했다.
뭐? 민수가 깜짝 놀란 듯 큰 소리로 되물었다.
스트리퍼 아니고. 유튜버라고 하면 알래나?
아, 미안해. 게임하면서 설명하는 영상 본 적 있어.
비슷해. 게임은 아니고. 유튜브 많이 안 보나 봐?
응, 거의 안 봐.
신기하네.
내가 더 신기해. 게임 말고 어떤 쪽이야?
먹방.
히야. 민수가 다시 한 번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마리는 민수가 너무 잘 놀란다고 생각했다. 진짜로 놀라는 것이 아니라면 과한 리액션이었다.
먹방은 알아?
제대로 본 적은 없는데, 텔레비전에도 나오잖아. 잘 먹는 연예인들 아래 자막으로 먹방 중-
맞아. 그런 거야.
의외인데.
뭐가?
많이 못 먹게 생겼는데. 이런 말 실례지만 몸도 마른 편이고 먹는 거랑 거리가 멀어 보여.
꼭 많이 먹어야 먹방인 건 아니야.
그럼 조금 먹나?
많이 먹을 때도 있고.
어떤 걸 먹어?
이것 저것.
상상이 잘 안 돼. 최근에는 뭘 먹었어?
음. 요즘에는 ASMR이라고.
오토너무스 센서리 메리디언 리스폰스. 자율 감각 쾌감 반응.
연대 나온 남자로군.
전에 궁금해서 인터넷에서 찾아 봤어. 그런 음식도 있어?
먹는 소리로 만족을 주는 영상이 인기야. 요즘에는 특이한 소리가 나는 걸 먹어. 소리를 리얼하게 잡으려고 마이킹에 좀 더 신경 쓰고.
예를 들면.
층층이 쌓여 있는 파이를 클로즈업 했다가 파사사삭 하고 부숴서 먹기도 하고.
파사사삭.
남들 다 먹는 거라 안 하려 했는데 구독자들이 자꾸 요청해서 벌집 꿀도 먹었어.
오 벌집까지. 어떤 소리가 나?
글쎄. 찔꺽 파사삭 쯔업쯔업 이러나.
맛있겠다.
목 막히게 달아. 입이랑 손도 죄다 끈적끈적해지고.
왜 보는지 왠지 알 것 같다. 듣기만 해도 흥미롭네.
이런 영상은 얼마 안 돼. 주력 종목은 따로 있어.
뭔데?
라면.
라면?
고작 라면이냐는 듯한 반응에 마리는 살짝 기분이 상했다. 검색창에 ‘라면’을 치면 수 백만 건의 동영상 목록이 뜬다. 그 첫 페이지에 마리가 라면을 먹는 영상이 있다. 사백 만이 넘는 조회수. 광고 수익을 통한 경제적 이익과 약간의 유명세를 마리에게 가져다 준 영상이었다. 오십만 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고 그 대다수는 당장 라면 사러 간다, 벌써 물 올렸다 처럼 라면이 먹고 싶어졌다는 내용이었다. 라르가즘 느껴진다-는 댓글은 가장 많은 공감을 얻었다. 그걸 본 마리 역시 빵 터지며 웃었다. 그러다 그 댓글의 댓글에 달린 푸드 포르노를 소비하는 우매한 대중 어쩌고 하는 긴 글을 보자 금세 식는 기분이 들었다. 뻘뻘 땀을 흘리며 후르륵 쩝쩝 소리를 내고, 입술 사이로 면발을 빨아들인 뒤 연신 입과 양볼을 우물거리다, 때때로 흘긋대며 카메라로 치켜 뜬 시선, 마지막으로 그릇을 쳐 들고 국물을 꿀꺽거리고 마시면서 목 울대가 꿀렁거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엄지 손가락으로 입술을 스윽 문지른 뒤 혀로 입술을 핥는 동작까지, 훌륭한 연기력의 에로배우 주연, 철저하게 연출된 한 편의 포르노를 보는 것 같다, 고 영상 속 마리의 모습을 묘사 및 품평한 댓글이었다. 역겨운 새끼 혼자 라면 끓여 먹으면서 자위할 놈이네, 거울 보세요 진짜 변태는 그 안에 있습니다, 님이야 말로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보고 있습니다, 등의 비난 댓글이 달렸고 비공감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런데도 마리는 생각날 때마다 이 댓글을 다시 읽고 영상을 보는 일을 (누군가의 신고로 댓글이 사라지기 전까지) 멈출 수 없었다. 그저 잘 먹는다, 맛있겠다, 하는 말로 표현되던 장면이 그 묘사 이후 정말 섹시하게 보였다. 뻘뻘 후르륵 쩝쩝 우물 흘긋 꿀꺽 꿀렁 스윽 같은 진부한 의성어 의태어들을 자막 처리해 화면 곳곳에 붙이고 싶은 욕구를 억눌렀다. 먹는 모습만으로도 에로틱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면 내 먹방도 어떤 경지를 넘어선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과연 이 영상 이후 구독자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식품 회사로부터 홍보 제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인터넷 용어 사전에 라르가즘이라는 단어가 실리고 주석에 채널 마리의 라면 먹방 영상이 링크되기도 했다.
영상 찾아봐도 되나? 실례인가? 민수가 휴대전화를 꺼내며 조심스레 물었다. 세 번째 실례라는 단어를 들은 마리의 입에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얘는 왜 이렇게 실례라는 말을 많이 쓸까. 이것도 혹시 컨셉일까.
실례는 아닌데, 실물 놔두고 뭐 하러.
어?
영상은 나중에 찾아 보시고, 점심은 라면 먹자.
괜찮겠어? 민수가 당황한 듯 물었다.
괜찮냐니? 나 라면 좋아해. 별 걸 다 묻는다는 듯 마리가 답했다.
그게 아니라. 소개팅날 분식점에서 돈가스 먹었다고 욕 먹는 인터넷 글을 본 기억이 나서.
나도 봤는데 욕 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 소개팅날 먹는 음식이 따로 있나.
마리씨가 좋으면 나도 상관 없어. 라면 먹자.
그래. 너무 내 얘기만 했다. 민수씨 얘기도 좀 해 봐.
머그를 들어 올리며 마리가 말했다. 아메리카노가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 봐 줘. 민수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연대 나왔으면 공부 되게 잘했겠다.
수능 시험까지는 잘 봤던 게 맞고, 대학 가서는 형편 없었어. 학사 경고도 한 번 받았으니까.
나도 그거 받아봤어. 전공은 뭐였어?
사학과.
우아, 역사 공부하는 덴가? 대단하다.
대단하기는. 난 내가 학문 쪽에 재능이 있을 줄 알았거든. 그런데 역사 소설 좋아하는 거랑 역사학 공부는 별 상관 없더라고. 학과 공부가 너무 지루했어.
공부는 지루하지...사학과 졸업하면 주로 뭘 해? 마리는 에둘러 물었다. 사학과 나와서 놀고 있는 사촌 신세를 한탄하는 고모의 말을 언뜻 들은 기억이 나서 조심스러워졌다.
동기들 대부분 대학원 진학해서 연구를 계속했어. 근데 대학원 졸업하고 학위 생겨도 별로 갈 데가 없어. 그렇다고 학부만 졸업하면 갈 데가 더 없어.
그래서, 갈 데는 찾았어? 지금은 무슨 일해?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해 답답해진 마리가 대놓고 물었다.
학부 졸업하고 일 년 정도 취업 준비하다 잘 안 됐어. 대학원 진학해서 이제 석사 이 년차야.
대학원생이구나. 전공은? 한국사? 세계사?
그게, 국문과로 갔어. 시 전공.
마리는 귀를 의심했다. 시? 요즘 세상에 아직도 시를 읽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시 전공이면 시인이 되는건가? 마리가 다시 물었다.
국문과 대학원에서는 시를 연구하지 시 쓰는 법을 가르치지는 않아. 창작은 문예창작학과가 따로 있긴 한데. 어쨌든 시를 쓰고 싶은 건 맞아. 민수가 부끄러운 듯 말했다.
시인이라니 뭔가 멋지다. 교과서에 실리기도 하잖아. 기억난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반같이.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맞아 그거. 돌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연과 행 구분 없이 기계적으로 읊는 시 구절들이 마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중학교 때 수행평가 때문에 외운 시였다. 국어 선생은 새대가리라도 여덟 줄짜리 시는 외울 수 있다고 했다. 반 전체가 이 시를 외울 때까지 수차례 암송 시험을 보았다. 교탁 앞에 한 명씩 서서 시를 읊다 머뭇대거나 틀리면 선생에게 야구 배트로 엉덩이를 맞았다. 맞은 아이들은 다음 시간에 또다시 교탁 앞에 서야 했다. 마리는 세 번째 도전에서 성공한 뒤에야 겨우 매타작을 피할 수 있었다. 암송 시험은 그 뒤로도 세 번 더 이어졌다. 얌마 새대가리들아, 다섯 번 빠따친 건 신기록이다. 여섯 번 쳐야 되냐, 진도 좀 나가자. 선생의 협박이 통했는지 남은 두 아이가 완벽하게 시를 낭송했다. 반 아이들이 우뢰 같은 박수를 쳤다. 이후 시에 등장하는 이미지를 마주할 때마다 마리의 머리 속에는 야구 배트에 엉덩이를 맞는 모습이 저절로 떠올랐다. 햇살 비추는 덕수궁 돌담길을 거닐 때 빠따. 봄 하늘을 바라보며 빠따. 햇반을 따끈히 데워 놓아도 빠따.
그걸 다 외우네. 대단하다. 이번에도 민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빠따지 뭐. 마리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뭐?
공교육의 폐단이라고. 이거 말고 아는 시 없어.
김영랑 시 좋지.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이라니. 생각에 잠긴 민수의 얼굴 위로 미소가 물결처럼 번졌다. 그걸 본 마리는 뜻없이 외우던 구절에서 처음으로 어떤 느낌을 받았다.
그 어려운 시들을 맨날 읽고 연구하는 거잖아. 그게 더 대단해.
시를 연구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아. 정말 어려운 건 쓰는 것 같아.
넌 잘 쓸 것 같아.
고마운 말인데 그렇지 않아. 못 써.
왠지 시인 같이 생겨겼는데.
푸하, 시인 같이 생긴 건 뭐야?
그냥, 늘 고민할 것 같은 얼굴이야. 동영상도 안 보고 글자만 보고.
...유튜브만 안 보는 거야. 그래도 네 영상은 볼게.
고마워. 좋아요랑 구독하기도 눌러 줘. 말하고 나니 마리는 왠지 부끄러웠다.
당연하지. 민수가 엄지 손가락을 들어올리며 좋아요 시늉을 해 보였다. 그 덕에 마리의 부끄러움이 조금 가셨다.
너도 네가 쓴 시 보여줄 수 있어? 마리가 물었다.
언젠가는. 아직은 쓴 게 없어. 민수가 약간 시무룩하게 답했다.
잘 쓴 거 아니라도, 그냥 궁금해서 그래.
진짜로 쓴 게 없어. 매일 쓰려고 시도는 해. 연필을 뾰족하게 깎고, 노트를 펼치고. 머리 속 단어들을 종이 위에 옮기려고 해. 그런데 이게 맞나, 이 단어로 시작하는 게 맞나, 자꾸 돌아보게 돼. 결국 한 글자도 못 쓴 채로 노트를 덮어. 그게 몇 년 째야. 보여줄까.
민수가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표지에 아무 무늬도 없는 회색 노트였다. 오래 들고 다닌 듯 표지가 약간 구겨지고 낡아 보였다. 마리가 노트를 받아 표지를 넘겼다. 첫 줄에 연필에 눌린 점 하나만 허공에 뜬 것처럼 찍혀 있었다. 맨 끝장까지 페이지를 넘겨 보았지만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약간 실망스러운 마음으로 마리는 노트를 돌려주었다.
점심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다시 카페 안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마리와 민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대전화를 챙겨 넣던 민수의 주머니에서 얇은 종이 조각이 팔랑거리며 떨어져 마리의 뾰족한 구두 코를 덮었다. 마리는 살짝 허리를 굽혀 종이를 집어들었다. 수험표라고 적힌 종이에 흑백으로 인쇄된 사진은 틀림없이 민수의 얼굴이었다. 그 옆에 적힌 이름은 이주찬이었다. 마리가 민수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고마워, 라고 말하며 손을 내민 민수의 표정이 애처로웠다. 마리가 건넨 수험표를 서둘러 주머니에 구겨 넣는 민수는 당황스러워 보였다.
걸으면서 얘기해 줄게. 민수가 억지로 지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햇살은 따뜻했지만 아직 바람이 찼다. 비슷비슷한 디자인에 색상만 다른 트렌치 코트를 걸친 젊은 여자 한무리가 웃으면서 지나갔다. 건물 옆 그늘진 곳에 남녀 몇이 서서 담배 연기를 뿜었다. 길 한 켠을 차지한 노점에서 휴대전화 케이스와 셀카봉을 팔았다. 쉴 새 없이 중국어로 말하며 셀카봉 하나를 집어 들어 폈다 접었다 하는 사람들이 노점 앞에 서 있었다. 민수와 마리는 사람들의 무리로 좁아진 길을 빠져 나가듯 지나며 대로변을 걸었다. 검색을 해 볼 수도 있었지만 걷다보면 라면을 파는 가게를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비교적 한산한 길목을 지날 때 민수가 입을 열었다.
처음 사학과 간다 할 때도 집에서 반대가 심했어. 그래도 학비랑 기숙사비는 대 주셨거든. 부족한 생활비는 과외로 충당하고. 그런데 또 국문과 대학원에 왔으니 집에선 더는 못한다고 지원을 끊으셨어.
갑자기 센 바람이 불었다. 약간의 간격을 두고 걷던 마리와 민수는 똑같이 인상을 찡그리며 겉옷 앞섶을 여몄다. 바람이 파고들지 않게 두 팔로 몸통을 감싸듯 움츠린 채 둘은 계속 걸었다. 라면을 파는 곳은 좀체 나타나지 않았다. 예전에 이 거리 어딘가에서 분식점을 본 것도 같은데, 김밥이나 라면 따위를 팔아서 세를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긴 했다. 둘은 대로변 건물 사이의 골목으로 꺾어 들어갔다. 뒷골목이 식당가인 듯 싶었다.
여전히 과외로 생활비를 벌어. 그거 만큼 돈을 벌만한 일이 잘 없으니까. 그런데 내 전공이 애매하잖아. 학부가 국문과가 아니니 언어영역이나 논술 과외는 구하기 어렵고. 문과인데 외국어 전공도 아니니 수학도 영어도 가르칠 수 없고. 가르치긴 해도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까지고 고등학생 학부모들은 꺼리더라. 한국사 과외 같은 건 구하는 사람도 없어. 대부분 인터넷 강의 듣지.
처음 보는 사이에 자신의 경제적 곤궁함을 드러내는 것이 마리에게는 어색했다. 더구나 소개팅 상대였다. 부모가 가진 건물 몇 채나 마라롱샤를 사 줄 재력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래도 대놓고 벌이가 어려운 처지를 말하는 것을 듣고 있자니 불편했다. 마리도 그런 적이 있었다. 하루 종일 서 있거나 몸을 움직여 일해도 생활비와 집세를 대기에 빠듯했던 날들. 물욕을 못 참고 필수품 외의 지출을 한 뒤에는 며칠 간 부실한 편의점 음식으로 끼니를 떼우거나 종일 굶고 집에 와서 밥을 몰아 먹었다. 처음 업로드한 영상은 편의점 신제품 도시락 메뉴를 소개하는 것이었다. 혼자 꾸역꾸역 식은 도시락을 퍼먹는 일은 괴로웠다. 그런데 가상의 상대와 대화하듯 반찬의 맛과 양을 품평하며 먹으니 재미도 있고 왠지 먹을만 해졌다. 이것 밖에 먹을 게 없어서가 아니라 소개를 위해 일부러 찾아 먹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었다. 영상은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연예인 이름이 붙은 이런저런 도시락을 먹어달라는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도시락 살 돈이 없는 날에는 밥을 지어 고봉으로 퍼 놓고 김에 싸 먹거나 케찹을 뿌려 비비거나 참치 캔을 까서 먹었다. 허기진 마리에게는 다 맛있었다. 그 많은 밥을 한 번에 먹으면서도 살이 찌지 않은 마리가 신기하다는 채팅창 글이 보였다.
신기하기는. 이게 오늘 첫 끼야. 니들도 맨날 이렇게 먹으면 말라 죽어.
마리의 멘트에 수없이 많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 대화창을 덮었다. 조회수와 구독자 수가 어느 정도 늘자 영상에 광고를 붙일 수 있었다. 먹는 영상을 올려달라며 이곳 저곳에서 식료품을 보내왔다. 이제 마리에게 먹을 걱정은 없어졌다. 먹을 것은 물론이고 돈을 주며 홍보를 요청하는 회사들의 연락이 이어졌다. 맛있게 먹기만 하면 돈이 생겼다. 하루 한 번 뭔가를 먹는 영상을 찍어 편집해서 올렸다. 남은 시간에는 다음 영상에 먹을 음식을 고민하거나 운동을 하거나 촬영 때 입을 옷과 화장법을 궁리하면 되었다. 이렇게 쉽게 돈을 벌어도 되나 잠시 고민했고 그런 고민은 금세 사라졌다. 사람들은 마리가 먹는 모습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마리가 먹고 있으면 자신들도 뭔가가 먹고 싶어진다고 했다. 뭔가를 먹고 싶게 만드는 것을 회사들은 좋아한다. 사람은 뭔가를 먹어야 살 수 있다. 그러니 마리는 계속 먹고 사람들은 계속 그것을 보고 또 뭔가를 먹고 뭔가가 잘 팔리고 회사와 마리는 돈을 벌고 사람들은 계속 살아간다.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민수야, 그러니까 너도 스트리머가 되지 그래. 역사를 가르치거나 시를 낭송하거나. 그런데 사람들은 역사도 시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게 없어도 살아갈 수 있으니 돈을 벌 수는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마리는 생각했다.
번화가의 뒷골목은 세계를 축소해 놓은 듯했다. 일본 경양식, 시카고 피자, 멕시코 타코, 브라질 스테이크, 베트남 반미, 인도 정통 카레 등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했다. 그런데도 한국 라면을 파는 음식점은 보이지 않았다. 민수가 가리키는 곳에 일본 라멘집이 있었다. 마리는 적당히 타협하기로 했다. 피크 타임은 지났을 시간인데도 라멘집 앞에는 입장을 대기 중인 사람들이 줄지어 있었다. 마리와 민수도 그 줄 끝에 섰다. 그들의 뒤로 또다른 커플이 섰다.
요즘 공무원 시험을 보려면 한국사 능력 검정시험을 먼저 통과해야 한대. 중고등학생들도 입시 때문인지 준비하는 애들이 많고. 민수가 말했다.
시험을 보려고 시험을 보는 거네. 마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거렸다.
그치. 공부할 과목도 많은데 시간은 부족하지. 그런데 다른 시험에 비해 한국사 능력 검정시험은 응시자 확인이 허술해. 주민등록증이나 운전면허증 말고도 허용된 신분증이 다양하고. 허점이 있지.
허점을 말하는 민수의 입에서 범죄의 냄새가 언뜻 풍겼다. 줄 맨 앞에 서 있던 그들에게 미닫이 문이 드디어 열렸다. 가게 안은 일본 간장 특유의 짭짤한 냄새와 훈훈한 국물에서 피어오른 수증기와 손님들로 꽉 차 있었다. 둘은 이인용 테이블로 안내되었다. 바 자리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마리는 생각했다. 자신이 먹는 모습을 민수가 마주 볼 수 있는 자리였다. 민수는 미소라멘을, 마리는 카라이돈코츠라멘을 시켰다. 메뉴 이름 옆에 작은 고추가 세 개 그려져 있어 그나마 한국 라면에 비슷할 것 같았다.
연간 네 번, 수능처럼 일 년에 한 번이 아니라 내 입장에서도 적당한 빈도야. 민수가 목소리를 낮췄다. 가게 안은 일본음식점 답지 않게 영어로 된 노래가 흘러나왔고 그 소리를 이기기 위해 크기를 높인 사람들의 목소리로 시끄러운 편이었다. 누가 들을 만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조심할 필요가 있는 이야기이긴 했다. 마리는 말없이 민수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점수 자체가 중요한게 아니라 합격선만 넘겨서 급수를 받는 절대평가야. 누가 붙는다고 누가 떨어지고 이런게 아니고. 마리의 침묵에 민수가 덧붙였다. 누가 붙든 떨어지든 마리에게는 상관이 없었다. 세상에 돈 버는 방법은 참으로 다양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돈은, 합격 확인되면 받는 건가? 마리가 물었다.
응. 합격자 발표날 계좌로 돈이 들어와.
많이 받나?
두 시간 남짓인 걸 생각하면. 높은 시급이지.
민수가 주문한 음식이 먼저 나왔다. 부연 회갈색 국물 위에 숙주와 파가 잔뜩 올라가 있었다.
먼저 먹어. 전공을 잘 살렸네. 마리는 최대한 좋은 말을 골랐다. 창조 경제, 란 말이 먼저 떠올랐지만 입에 담았다가는 비꼬는 것으로 들릴 법했다. 민수가 라멘을 좀 덜어주려 했지만 마리가 사양했다. 젓가락으로 면을 뒤적이며 민수가 계속 말했다.
전공이니까 그냥 보면 될 거 같지? 안 그래. 시험 한 달 전부터 공부해야 돼. 그러고도 조마조마해. 한 문제라도 놓치면 세 달 공치는 거니까. 아니 아예 일 자체가 끊길 수도 있지. 불합격하면 의뢰자도 피해가 커서 위약금을 물어줘야 할 수도 있다고 했어. 아직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지만.
마리의 라멘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둥둥 뜬 동그란 기름 방울이 유독 붉게 번뜩였다. 숙주를 얹은 모양새는 민수의 라면과 비슷했지만 파 사이로 푸른 고추가 드문드문 보였다. 매운내가 코끝으로 올라왔다. 마리는 젓가락으로 딱딱 집게 흉내를 내고 잘 먹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영상에서 음식을 먹기 전 늘 취하는 동작과 멘트였다. 마리는 익숙하게 면발을 집어 올렸다. 푸짐해 보이지만 무리 없이 입에 들어갈 만큼이었다. 입 속으로 적당히 밀어 넣고 면발의 나머지 부분을 입술의 움직임과 흡입력으로 빨아들였다. 우물우물 입 안에 들어온 음식을 씹어 삼키고 수저로 국물을 떠서 후루룩 마셨다. 먹는 것을 잊은 듯 민수는 마리의 모습을 넋을 잃고 쳐다 보았다.
라면 식는다. 얼른 먹어. 한 젓가락을 더 씹어 삼킨 마리가 민수에게 말했다.
진짜 맛있게 먹네. 네 라면이 더 맛있나 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 민수가 젓가락을 뜨며 말했다.
나는 그냥 먹는데 다들 잘 먹는다고 하더라.
정말이야. 특기를 잘 살린 것 같아. 민수가 엄지 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마리의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오늘도 시험이 있던 거야? 마리가 물었다.
응. 오전에 다녀왔어.
잘 봤어?
쉽게 나왔어. 무난히 1급 나올 것 같아. 말하는 민수의 얼굴이 환해 보였다. 월급날 직장인의 얼굴빛이 저 정도일까. 통장에 광고 수익이 입금되었을 때 마리가 지은 표정도 저만큼 밝았을 것이다.
열심히 사는구나. 마리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열심히 사는 건가.
그럼. 역사 공부도 해야 하고, 전공 공부도 해야 하고, 시도 써야 하고.
꼭 뭘 해야 하는 건 아닌데, 내가 그렇게 만든 거지.
하고 싶은 게 있는 건 좋잖아.
마리는 하고 싶은 거 없어?
대답을 하기 위해 마리는 하고 싶은 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먹고 살 걱정하지 않는 것. 이것은 하고 싶지 않은 것에 가까웠다. 지유언니가 들고 나온 보스턴 백, 디자인 같고 색만 다른 걸로. 이건 갖고 싶은 것이다. 그 가방을 사고 싶다, 라고 하면 하고 싶은게 되는 걸까. 유명해지고 싶다. 이건 하고 싶은 걸까 되고 싶은 걸까. 왜 유명해지고 싶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하지. 높은 조회수, 알아보는 사람들, 쇄도하는 광고 협찬, 높은 수익, 그러면 나는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을까. 마리는 그냥 잘 살고 싶었다.
그냥...열심히 살고 싶어. 잘 살고 싶다는 말에서 한마디만 바꾸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마리의 처음 생각과는 사뭇 다른 말이 되었다. 이런들 저런들 어떠랴 싶었다.
열심히,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잖아.
내가?
응. 영상 올리는 거 부지런하지 않으면 못할 것 같아.
그냥 먹는건데. 누구나 매일 먹는 걸.
누구나 매일 먹지만, 그걸 남들에게 보여주는 건 또 다른 일 같아. 뭘 먹어야 좋아할지 궁리하고, 화면에 잘 비춰지게 세팅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해야 되고, 반응도 살펴야 되고. 남들에겐 당연하고 개인적인 일을 사회적인 일로 만드는 거잖아. 쉬운게 아니지.
민수의 말은 그럴 듯하게 들렸다. 먹는 모습으로 남들의 호감을 얻기란 확실히 어려운 일이었다. 좋은 반응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돼지, 하마, 창녀, 돈벌레, 성괴, 온갖 비유의 대상이 되었다. 바나나, 오이, 아이스바, 생크림, 요거트, 목적이 분명한 먹거리들을 요청하는 도배글을 신고한 적도 있었다. 남성 스트리머의 먹방 채널에서는 볼 수 없는 댓글이었다. 그럼에도 계속하고 있는 이유는 분명했다. 다른 일보다는 쉽게 버니까, 그만두고 딱히 할 일이 없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민수의 말처럼 자신이 노력하는 부분들이 분명 있었다. 시청자에게 즐거움을 주고, 나도 이 일을 좋아하고, 더 잘 하고 싶고, 열심히 하고 있다.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열심히 산다. 마리에게 이렇게 말해 준 사람은 없었다.
좋게 봐주니 고맙네. 라멘은 내가 산다. 마리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고맙기는, 내가 사야지. 시험 잘 봤다니까. 민수가 대꾸했다.
다음에, 합격자 발표나면 네가 쏘는 걸로 하자. 은근한 목소리로 마리가 말했다.
그래. 그 땐 좀 더 근사한데로 모실게. 민수가 못 이긴 척 말했다. 그러고는 마리의 전화번호를 물었다. 둘은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라멘집이 있는 골목을 빠져 나오자 대로 옆의 대형서점이 보였다. 민수는 밥도 얻어 먹었으니 책을 한 권 사주겠다고 했다. 마리는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민수를 따라 서점으로 들어섰다. 잡지 코너에서 부록으로 주는 화장품을 구경하는 마리 옆으로 민수가 다가왔다. 벌써 계산을 마쳤는지 테이프로 봉한 종이 봉투를 건네 주었다.
이번엔 남의 책이지만 언젠가는 내 책을 선물할게. 민수가 말했다.
그래. 꼭 사인해 줘야 돼. 책 선물 처음 받아 봐.
정말이야?
정말이야.
돌아가는 지하철에 앉아 마리는 지유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있다가 연락할게요. 지유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아직 촬영중인 모양이었다. 우리가 정말 친한 사이인 걸까. 마리는 생각했다. 잘 가고 있냐는 민수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미소 지으며 마리는 오늘 재미있었고 시집 고맙다는 답장을 보냈다. 민수는 라멘 맛있었고 다음에는 자기가 꼭 사겠다고 답을 해 왔다. 전화기를 가방에 넣으며 마리는 민수에게 받은 종이 봉투를 꺼냈다. 테이프를 떼어 내자 얇은 시집 한 권이 보였다. 책의 중간을 펼쳐 보았다. 계시라도 받은 듯 한참 책장에 시선을 고정했다. 몇 번을 반복해서 눈으로 읽던 마리는 흡족한 표정으로 책표지의 접힌 부분을 펼쳐 읽던 페이지 사이에 끼워 두었다.
집에 돌아온 마리는 바깥옷만 벗어 걸어 놓고는 화장대 앞에 앉았다. 화장이 약간 망가지긴 했지만 거울에 비친 모습이 여전히 마음에 들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공들여 꾸민 걸 지우자니 아까웠다. 마리는 화장을 지우는 대신 고치기 시작했다. 눈 밑 번진 자국은 면봉으로 훑어내고 퍼프로 조심스레 얼굴을 두드렸다. 마스카라와 립스틱을 덧바르니 다시 생기가 돌았다. 고데기를 꺼내 머리 끝 몇 군데를 살짝 집어주니 금세 컬이 살아났다. 마리는 활짝 웃은 뒤 셀카를 찍었다.
책상 앞에 앉은 마리가 시집을 펼쳤다. 오면서 읽은 시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시집을 책상 위에 엎어둔 마리는 컴퓨터 전원을 켜고 카메라와 촬영용 조명의 각도를 바로 잡았다. 녹화 시작 버튼을 누른 마리는 시집을 집어 들었다.
안녕하세요. 마리입니다. 오늘은 마음의 양식, 책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가끔 색다른 게 먹고 싶은 날이 있잖아요. 오늘 저녁은 밥 대신 밥에 대한 시 한 편 읽어드리겠습니다.

밥 생각
김기택

차가운 바람 퇴근길 더디 오는 버스 어둡고 긴 거리
희고 둥근 한 그릇 밥을 생각한다
텅 비어 쭈글쭈글해진 위장을 탱탱하게 펴줄 밥
꾸룩꾸룩 소리나는 배를 부드럽게 만져줄 밥
춥고 음침한 뱃속을 따듯하게 데워줄 밥
잡생각들을 말끔하게 치워버려주고
깨끗해진 머릿속에 단정하게 들어오는
하얀 사기 그릇 하얀 김 하얀 밥
머리 가득 밥 생각 마음 가득 밥 생각
밥 생각으로 점점 배불러지는 밥 생각
한 그릇 밥처럼 환해지고 동그래지는 얼굴
그러나 밥을 먹고 나면 배가 든든해지면
다시 난폭하게 밀려들어올 오만가지 잡생각
머릿속이 뚱뚱해지고 지저분해지면
멀리 아주 멀리 사라져버릴 밥 생각

영상을 업로드하고 잠시 후 새로고침을 눌렀다. 첫 댓글이 달렸다.
그냥 먹기나 하지. 뭔 시 낭송이야.

이 날 채널 마리의 구독자 수는 소폭 감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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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160
메리 셸리 지음,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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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21 메리 셸리.

처음 프랑켄슈타인 속 괴물 이미지를 접한 컨텐츠는 어릴 적 텔레비전에서 방영한 외국 드라마 ‘몬스터 가족’이었다. 엄마랑 할아버지는 드라큘라, 아빠는 허만이라는 큰 덩치에 초록얼굴의, 모자라지만 착한 동네형 같은 괴물 모습이었다. 그다음에는 애니메이션 ’두치와 뿌꾸‘에서 힘이 센 몬스라는 친구가 비슷한 이미지로 나왔다. 사실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이 아니고,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만든 박사 이름이래! 그런 이야기를 여러 번 듣고, 드디어 메리 울스턴 셸리의 소설을 읽어보니 프랑켄슈타인은 딱히 박사는 아니고, 그냥 과학 덕후였다가 선을 세게 넘어서 자신이 감당못할 무언가를 만들고 폭망하는 청년이었다. 김금희 소설 ‘경애의 마음’에서는 한 등장인물이 ’피조‘라 칭해지며 ‘The Creature‘를 한글화?한자화? 하려는 시도도 읽힌다.

소설 제목이 프랑켄슈타인인 건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고드윈이 결혼 후 퍼시 셸리의 성을 따 메리 셸리가 되고, 처음엔 진짜 저자를 밝히지 않고 출간된 이 소설이 퍼시 셸리의 소설로 추측되던 것 만큼 싱크가 안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도록 다들 동명의 영화 속 괴물 이미지를 그 놈 이름은 프랑켄슈타인이다...하고 혼동을 겪게 했으니… 그렇다고 딱히 적절한 제목이 생각나지도 않는다. ‘괴물‘ (봉준호 영화냐?), ’인조인간‘ (이것도 뭔 SF나 드래곤볼 같은 데서 나중에 써먹는 말), ‘왜 태어 났니‘, ‘가엾은 아버지 왜 저를 낳으셨나요‘(‘1943년 3월 4일생’이란 노래에서, 사실 아버지 아니고 어머니인데 어떤 드라마에서 꼬맹이가 엄마 앞에서 저 노래를 자꾸만 부르다 얻어맞았다)… 그냥 프랑켄슈타인 해야겠다. 아님 뒤에 Jr.나 2세, 라도 붙여주든가...

200여년 전에 여성이 소설을 쓴다는 게 환영 받지 못한 건 안타까운 이야기이다. 많은 여성 작가들이 남성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했던 것도 얼핏 듣긴 했었는데, 제인 오스틴이 거의 모든 작품을 익명으로 출판한 것도 이번에 알았네… 모르는 게 아직도 많은 나…

소설 보기 몇 년 전 이토 준지가 만화로 그린 프랑켄슈타인을 봤긴 했다. 소설의 서사는 만화에서 봤던 그대로여서 더 뭔가 나오려나? 하는 기대는 채우지 못했다. 스위스, 독일, 영국,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북극해 등 유럽과 인근의 온갖 지명과 풍광을 묘사한 건 흥미롭긴 했다. 20대 초반의 메리는 그 모든 곳을 가 보진 못했겠지. 책과 남들에게 듣는 이야기로 상상해서 빅터(프랑켄슈타인)와 그의 창조개체가 쫓고 쫓기는 곳들을 그려냈겠지. 어리고 어리석은 인간의 으스스한 시도와, 그로 인한 탄생, 이후 겪게 되는 빅터 주변 사람들의 비극과 고통은 기껏 낳은 자식을 유기, 방치, 학대하는 부모의 모습과, 그로 인해 망가진 자식의 삶이랑 겹치기도 했다.

그렇지만 너무 서사가 알려져서 그런지, 이미 내용을 알고 읽어도 재미있는 소설들도 있는데 이건 막 엄청 잘 쓴 건 아니라 그런가, 내가 읽기에 썩 재미 있지는 않았다. 빅터와 만난 월턴이란 북극 탐험선 선장이 그의 누님에게 자신이 알게된 기이한 이야기를 편지로 전하는 형식, 이야기 속 이야기로 편지 안의 편지도 많이 나오고, 대화로 그간 있던 일을 길게 넋두리하듯 전해주는 구성은 흥미로운 서사와 대비해 그렇게 매력적인 짜임은 아니었다. 그냥 아, 나 이제 프랑켄슈타인 원작 드디어 읽었다… 그 이상 빠져들만한 매력은 없었고, 약간 의무감으로 읽은 느낌도 들고, 안타깝게도 뭘 더 건지거나 배운 게 없으니 (아, 낳아놓고 방치하면 괴물되서 쫓아오고 쫓아다니게 된다 정도) 굳이, 굳이 싶은 독서였다. 이런 것도 끝까지 다 읽어봐야 아 별 거 없네...하고 까불게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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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도들을 세상을 떠받드는 코끼리를 제시하면서 그 코끼리를 거북이 위에 서 있게 만든다. 착상이 무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혼돈에서 만들어진다는 것, 그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소재는 우선 주어져야 한다. 그것은 어둡고 형체가 없는 내용을 제시할 수는 있으나 내용 자체를 다 만들어낼 수는 없다. 발견과 발명에 관한 모든 것에서, 하다못해 그것이 상상력에 속하는 부분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콜럼버스와 그의 달걀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발명은 대상의 가능성을 포착하는 능력에 있다. 그리고 대상에 연관된 아이디어를 주무르고 빚어내는 능력에 있다. (14, 1831년판 서문 중)

-현대 철학자들이 치열한 노력 끝에 대단한 발견을 이루어 낸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공부한 것들은 늘 불만스럽고 흡족하지 못한 느낌이었다. 아이작 뉴턴 경은 스스로를, 인간이 탐험하지 않은 방대한 진실의 바닷가에서 조개껍질을 줍는 어린아이처럼 느꼈다고 한다. 자연 철학의 각 분과에서 연구하는 그 후계자들에 대해선 나도 웬만큼 알았지만, 어린 내가 보기에도 그들은 똑같은 것을 찾는 초보자였다. (59-60, 똑같이 조개 주워도 맥락 따라 평가가 다른데, 사실 사소하다고 오만 부리는 건 비슷하다. 이 꼬맹이 지가 웬만한 자연과학은 다 이해하고 시시해-하듯 구는데 너임마 원자 분자 양자 잘 모르던 시절 놈이지…나도 잘 모른다만...)

-돌이켜 보면 내 취향과 의지를(유사 과학에서 수학으로) 바꿔 버린 기적과도 같은 이 변화는 내 수호천사가 즉석에서 내놓은 방편이 아니었나 싶다. 그때까지도 내 운명을 결정하지 못한 채, 나를 덮칠 준비를 하던 폭풍의 방향을 돌림으로써 나를 구하려고 한 천사의 마지막 몸부림 말이다. 수호천사가 승리했다는 사실은, 그렇게 힘들던 오랜 공부를 포기하면서 찾아온 특별한 평화와 기쁨으로 나타났다. 그렇게 해서 나는 불행이란 곧 수호천사들의 고발이며, 행복은 그들의 무관심이라는 가르침을 깨우쳤다.
그것은 착한 천사의 강력한 노력이긴 했지만 큰 효과가 없었다. 운명은 너무 힘이 셌고, 변할 줄 모르는 운명의 법칙은 철저하고 끔찍하게 나를 파멸시키라고 명령했다. (62, 착한 천사는 누군가에게는 수학을 시작함으로써, 다른 누구에게는 수학을 관두게 함으로써 평화와 기쁨을 주는 군요...그냥 좀 잘 하게 도와주지. 천사는 착한 척하는 무능력한 악마의 다른 이름)

-프랑켄슈타인의 영혼이 외쳤다. 그렇게 많은 업적이 이루어졌다면, 앞으로 내가 더 많이, 훨씬 더 많은 것을 이루리라. 이미 찍힌 발자국을 따라가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미지의 힘을 탐사할 것이며, 창조의 가장 은밀한 신비를 세상에 펼쳐 보이리라. (70, 1인칭 시점인데 자기를 3인칭으로 부르는 것도 그렇고, 위대해지고 싶은 사람들은 과연 저렇게 난 짱이 될 거야! 하고 내적대화를 하는지 궁금하다. 오글오글. 아닌가 월턴이 전해주는 이야기라 그런가. 화자 막 헷갈리고 흔들림)

-나를 뺀 모든 것이 잠들거나 즐거워했소. 나는 악마처럼 마음에 지옥을 품었고, 아무에게도 동정 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나무들을 뿌리째 뽑아 버리고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하며 아수라장을 만들고 싶었고, 그런 다음 앉아서 그 황폐함을 즐기고 싶었소. (180, 중2병이라는 증세와 유사한데, 그러니 인간들아, 청소년들에게 좀 더 다정하게 대하고 괴물 취급하지 말자…)

-나는 상처를 받은 만큼 복수할 거요. 사랑을 일깨울 수 없다면 두려움을 일깨우겠소. 주요 표적은 불구대천의 원수, 바로 당신이오. 내 창조자인 당신을 영원히 증오하기로 맹세했으니까. 조심하시오, 나는 당신을 파멸시킬 것이오. 당신 가슴이 무너지고 찢기어 세상에 태어난 것을 원망할 때까지. (190-191, 그러니 신이여, 부모여, 자신이 창조한 그것에 끝까지 책임지지 못한다면 파멸하고 무너지고 찢길 각오를 하시오.)

-외롭게 사랑 없이 살아야 한다면 난 미움과 악의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오. 그러나 다른 이에게 사랑을 받는다면 내 죄악의 동기가 해소될 것이고 나는 사람들에게서 잊힌 채 살아갈 거요. 나의 악행이 내가 싫어하는 고독을 강요받은 결과였던 만큼, 나와 동등한 존재와 교류하며 산다면 반드시 선을 행하게 될 거요. 나는 섬세한 존재의 애정을 느낄 것이고 지금은 배척당하고 있는 존재와 사건의 사슬에 연결될 것이오. (193, 가끔 끔찍한 범죄가 일어날 때마다 저 사람들은 잃을 사랑 조차 없어 끝까지 간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래서인가 난 어려서 그렇게나 많은 친구들의 소개팅을 주선하면 세상이 더 나아질 거라고 기대했나 보다. 모두들 사랑을 하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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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 오브 아프리카 열린책들 세계문학 87
카렌 블릭센 지음, 민승남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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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18 카렌 블릭센.


5년 전에 이 책을 전자책으로 사게 된 것은 아마도 다른 책에서 언급된 걸 흥미롭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을 알게 해 준 그 책이 무엇인지 지금은 그게 더 궁금하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독후감을 뒤져도, 구매날짜를 조회해 그 무렵 읽은 책들을 봐도 단서가 없다. 어떤 것들은 끝내 알기를 포기해야 옳다.

아프리카도 그런 동네가 아닐까, 읽다보니 든 생각이다. 화자는 유럽에서 동아프리카 은공 지역으로 건너와 커피 플랜테이션을 하며 가축도 키우고 농장을 운영했다. 그런데 망했다. 부유해질 꿈을 안고 아프리카에 커피 원두 장사를 하려다가 망해 버린 유럽인 이야기는 어디선가 이미 들어본 이야기였다.

-“람보 좋아해요?”
말랐지만 건강해 보이는 아랍계 아프리카 사람이 하얀 흙벽 그늘에 웅크리고 앉아 내게 물었다. 날카로운 눈매에 성긴 콧수염 그리고 흰색 터번. 실베스터 스탤론의 팬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람보요?” 나는 잘못 들었나 싶어서 다시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람보.” 남자는 옷이 바닥에 끌리지 않도록 허리끈을 추슬렀다. “람보.” 그는 더 없이 무관심한 표정으로 되풀이했다. “파랑기(유럽인) 말이오.”
“정말 람보 팬이세요?” 나는 놀라 물었다. 사실 콜카타에서는 찰스 브론슨이 더 인기였다. 나는 좀더 확실히 하기 위해 이두박근에 힘을 주어 보였다. “이런 거 좋아해요?”
남자는 짜증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거듭 말했다.
“람보말이오, 람보! 가볼래요? 좋아해요?”
“안 가요. 안 좋아해요.” 나는 그만 자리를 떴다.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스물 네 시간이나 걸리는 지루한 기차 여행 끝에 고지대에 있는 외딴 마을 하레르에 이제 막 도착한 순간이었다. (“커피견문록”(스튜어트 리 앨런), 24-25)
커피에 대한 책을 펼쳤을 때, 시작부터 람보 타령을 해서 뭐지...했는데 랭보였다. 랭보는 커피상인, 무기상인(미수) 이거저거 시도하다 쫄딱 망해 프랑스로 돌아가서 죽었다. 에티오피아에는 랭보가 말년에 살던 집이 있고, 그 작은, 관광객 별로 없는 마을의 명소인 모양이었다.

커피로 먹고 살려다 망한 유럽인이 이 둘 뿐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철없던 어느 시절에는 난 그냥 내 외모로 추정되는 고향 같은 에티오피아나 아님 중남미, 베트남 어드메 가서 커피 체리나 손으로 따고, 밤에는 노동에 절어 죽은 듯 자고, 먹여주면 먹고, 다른 고민은 안 하고,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언제 한 번 택배 상하차나 농촌 김매기 품팔이나 갯벌 꼬막캐기 알바로 가서 뒤지게 고생을 해 봐야 정신을 차리지...

음사부, 하고 원주민들에게 불리는 농장 주인 화자는 동아프리카의 키쿠유족, 소말리족, 마사이족과 야생동물이 공존하는 (공존이라긴 좀 그런게 서로 경멸하고 가끔 쎄게 싸운다) 세계에서 원주민들에 대한 애정과 이해를 담은 눈과 글로 자신이 보고 듣고 겪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원주민에게 호의적이고 그들을 함께 사는 동지들 취급을 해주는 것 같은데, 그래도 그들을 소작인, 하인, 자신이 돌보고 가르침을 주고 치료해주고 물음에 답해줘야 하는 사람들로 바라보는 걸 보면, 농장의 주인, 고용주, 백인 지배자, 그리고 원래부터 자기들이 살던 땅인데도 많은 결정권을 가지지 못한 채 빼앗기고 체념하고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원주민, 그 둘 사이의 권력 관계가 너무 명확해서 좀 씁쓸하기도 했다. 우리 같이 고생하면서 나름의 우정을 쌓았어요, 하는 건 화자의 관점이고, 농장 생활에 관해 글을 남길 수 없었던 다수의 원주민들의 진짜 속마음은, 그들 입장의 이야기는 뭐 알고자 해도 알기 힘들겠다. 아프리카계 작가들의 이야기를 읽으면 좀 다가가려나? 잔혹하고 억압하고 착취하는 백인 이야기 말고, 백인 고용주와 진정한 교감과 우정을 나눴어요, 하는 이야기도 어디 있긴 있나 궁금하다. 그런 거 쓰면 왠지 자기 시스터, 브라더들한테 총 맞을 것 같고… 일본인 주인한테 친밀감 느끼고 내지인 될래요, 하는 치숙의 화자 취급 당할 것 같기도 하다.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화자가 금가루 설탕가루 커피가루 다 뿌려 보여준 아프리카의 풍광을 묘사한 문장들은 아름다웠고, 그녀가 만난 아프리카인들의 모습도 생생했고, 사자 쏘고, 비행기 타고 날고, 들개 떼 마주치고, 가젤이랑 친구되고 뭐 그런 건 내가 겪을 수 없을 이야기들이라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소설 속에서는 고귀한 친구로 묘사되어 있지만 작가의 자전적 소설로 읽는다면 사실 남편인 남작이랑 결별하고 연인이 되었던 인물 데니스의 죽음과, 키쿠유족 부족장의 죽음, 그리고 농장이 몰락하고 다 팔고 뿔뿔이 흩어지고 키쿠유족도 보호구역으로 들어가는 결말은 화자에 조금 이입되어 슬프고 안타까웠다. 뭔가를 잃는 사람은 한번에 대부분을 잃는 경우가 그렇게나 많다. 그러니까 한번에 조금씩만 잃었던 지난 날을 감사해야 할지도…

이 소설은 안 봤고 영화만 언뜻 봤다는 엄마 이야기를 들어보면, 온통 로맨스 범벅에 카렌과 데니스의 연애담에만 초점을 둔 듯한 영화는 딱히 안 봐도 될 것 같다. 혹시라도 영화만 보고 이국적 배경에서의 사랑 이야기에 몰입했던 사람이라면 이 소설에서는 기대하는 걸 전혀 찾을 수 없을 수도… 그래도 모르고 넘어가기에는 많은 빛나는 순간이 있어서 한 번 읽어봐도 연애질 영화보다는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밑줄 긋기
-〈아프리카로부터는 항상 무언가 새로운 것이 생겨난다〉

-한곳에서 오래 ─ 심지어 여러 세대에 걸쳐 ─ 사는 유럽인은 주거 환경에 대한 유목 민족의 철저한 무관심에 절대로 융화되지 못한다. 소말리족의 가옥은 맨땅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고 대못으로 뚝딱뚝딱 박아 놓아서 겨우 일주일이나 버틸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안에 들어가 보면 놀랍게도 매우 정갈하고 산뜻했다. 아랍 향료 냄새가 은은히 풍기고 좋은 양탄자와 벽걸이, 놋쇠그릇과 은그릇, 상아 칼집에 든 녹슬지 않는 재질의 날을 지닌 칼들이 보였다. 소말리족 여인들은 예의 바르고 기품 있게 행동했고, 친절하고 쾌활했으며 웃음소리가 마치 은 종소리 같았다.

-카만테는 생각이 깊은 아이였다. 오랜 고통의 세월 속에서 사려 깊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모든 것에 대해 나름의 결론을 끌어내는 성향을 키워 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평생 자신의 방식으로 고립된 삶을 살았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했다.

-갑자기 머리 위에서 쏴 하는 소리가 들린다면 그건 키 큰 나무들을 스치는 바람 소리지 빗소리가 아니었다. 그 소리가 땅에서 들린다면 관목과 키 큰 풀들 속에서 나는 바람 소리지 빗소리가 아니었다. 땅 바로 위에서 살랑거리고 달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면 옥수수 밭의 바람 소리였다. 그 소리는 빗소리와 너무도 흡사해서 번번이 속고, 애타게 기다리는 존재를 연극 속에서 본 것처럼 약간의 만족감까지 얻지만 그래도 역시 빗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대지가 공명판처럼 깊고 풍부한 포효로 응답하면, 그리하여 우리를 둘러싼 세상이 모든 차원에서, 위아래 전체에서 노래를 부르면 그건 빗소리였다. 그건 마치 오랫동안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가 바다로 돌아간 것과 같았고 연인의 포옹과도 같았다.

-그들은 식당으로 들어와 내가 글을 쓰는 모습을 한참씩 구경하기도 했는데 그들이 등지고 있는 벽의 패널 색깔이 그들의 머리 색깔과 같아서 밤에는 그들의 흰 옷만 보였다.(요즘 쓰면 여기저기서 욕받이가 될 묘사…거의 백 년 전이니 뭐…)

-원주민은 〈배 속에 차가운 돌덩이가 들어앉았다〉는 말을 자주 했으며 그것을 이유 삼아 농장 일에서 손을 놓곤 했다.

-하지만 그 사연은 어둠에 싸여 있다.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온 그 꼬질꼬질한 싸구려 종이는 온몸으로 말하고 악까지 써대는 듯하지만 난 아무 말도 알아들을 수 없다.

-백인이라면 편지에 예쁜 말을 써서 보내고 싶으면 이렇게 쓸 것이다. 〈나는 당신을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인은 이렇게 쓴다. 〈우리는 당신이 우리를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내가 적어 준 진술서는 조고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판무관이 그걸 읽어 본 뒤 니에리의 키쿠유족들의 이의 신청을 기각하여 그들은 결국 아무 소득 없이 우거지상을 하고 자기네 마을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진술서는 조고나의 소중한 보물이 되었고 나는 그것을 여러 차례 보게 되었다. 조고나는 구슬로 수놓인 작은 가죽 주머니를 만들어서 진술서를 넣고 주머니에 끈을 매달아 목에 걸고 다녔다. 이따금, 특히 일요일 아침에 그는 갑작스럽게 우리 집에 나타나 가죽 주머니에서 진술서를 꺼내 읽어 달라고 했다.

-나는 어린 황소 세 마리를 거세시켜 쟁기와 우마차를 끄는 온순한 소로 만든 뒤 공장 마당에 가두어 둔 적이 있었다. 그날 밤 하이에나들이 피 냄새를 맡고 찾아와 그 소들을 죽였다. 나는 그것이 바로 마사이족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저 아래 강가에서 하이에나들의 울부짖음이 들려왔고 노파들이 밤중에 하이에나로 변한다는 키쿠유족의 전설이 떠올랐다. 어쩌면 지금 와이나이나의 어머니는 밤공기 속에서 이빨을 드러내고 강가를 따라 총총히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마법이 제법 친근하게 다가왔고 그럴듯하게 여겨졌다. 아프리카에는 밤에 많은 것들이 돌아다니니까.

-나는 코끼리를 쏘아 죽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름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서 땅 위를 걸어 다니던 거대하고 당당한 생물체가 내 행동으로 인해 더 이상 살아서 걸어 다닐 수 없게 된 것이다. 키쿠유족들이 그에게 물을 끼얹고 원숭이 가죽으로 만든 커다란 망토까지 벗겨 놓아서 그는 품위까지 잃은 상태였다. 벌거숭이가 된 그의 모습은 인간들이 가죽이나 뿔 같은 기념품을 취한 뒤 버린 동물의 시체처럼 보였다.

-다 구운 후 숯가마에서 꺼내 땅바닥에 펼쳐놓은 숯은 아름다운 작품이다. 불순물이 다 빠져 무게가 가볍고 비단결처럼 부드러운 숯은, 불멸성을 얻게 된 나무의 작고 경험 많은 검은 미라다.

-그의 오디세이를 관통하는 강한 정서가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법에 대한, 법이 이룬 모든 것에 대한 혐오였다. 그는 타고난 반역자로 모든 무법자에게 동지 의식을 느꼈다. 그에게 영웅적 행위란 법에 대한 저항을 의미했다. 그는 법의 구속을 받지 않는 왕들과 왕족, 마술사, 난쟁이, 미치광이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했으며 법에 정면으로 맞서는 범죄, 혁명, 사기, 간계에 매료되었다. 반면 선량한 시민에겐 깊은 경멸을 느꼈고 법에 구속되는 것은 곧 노예근성의 표시라고 믿었다. 우리가 함께 나무를 베어 넘어뜨릴 때 알게 된 사실인데, 그는 심지어 중력의 법칙조차 받아들이지 않았다. 편견 없고 진취적인 정신의 소유자들은 그 법칙을 정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누군가는 세상 사람들 중에서 가장 나쁜 처지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들을 추방한 건 사회가 아니었고 이 세상의 어떤 장소도 아니었다. 그들을 추방한 건 시간이었으며 그들은 우리 시대에 속해 있지 않았다. 그들을 배출할 수 있는 나라는 영국뿐이었으나 격세유전의 예인 그들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영국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현 시대에는 집이 없어서 이곳저곳을 떠돌며 살아야 했고 그러다가 우리 농장에도 찾아왔다. 그것에 대해 그들 자신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떠나 온 영국에서의 삶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는데 친구들은 참고 견디는 의무를 자신들만 권태롭게 여겨 그것에서 도망친 것처럼 생각하는 듯했다.

-「자, 우리 쓸데없이 목숨 걸러 가요. 우리 목숨에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게 바로 우리 목숨이 지닌 가치니까요.Frei lebt wer sterben kann(죽을 수 있는 자, 자유로이 산다).」

-그 순간 아프리카는 끝도 없이 커졌고 데니스와 나는 무한히 작아져서 그곳에 서 있었다. 우리의 손전등 불빛 바깥은 어둠뿐이었고 어둠 속에서 사자들이 두 방향으로 누워 있고 하늘에선 비가 내렸다. 사자의 굵직한 포효가 잦아들자 주위에선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고 사자는 혐오감을 나타내기라도 하듯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커피 밭에 커다란 동물의 시체 두 구가 놓여 있었고 밤의 정적이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도시 사람들은 모든 움직임이 일차원에 한정되어 있고 줄에 묶여 조종당하기라도 하듯 정해진 선을 따라 걷는 슬픈 고난과 예속의 삶을 산다. 그러다 들판이나 숲을 거닐게 되면 선이 평면이라는 이차원으로 바뀌며 그것은 노예들에게 프랑스 혁명과도 같은 멋진 해방을 의미한다. 하지만 하늘을 날면 삼차원이라는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며 향수병에 시달리던 우리의 가슴은 오랜 유배 생활과 갈망 끝에 우주의 품으로 뛰어든다. 중력과 시간의 법칙이,

삶의 초록 숲에서
길든 짐승들처럼 노니네, 아무도 모르지
그것들이 얼마나 온순해질 수 있는지!

-나는 이구아나를 쏜 적이 있다. 가죽으로 아름다운 물건을 만들 수 있으리란 생각에서였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고 나는 그 일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돌 위에서 총을 맞고 죽어 있는 이구아나에게 다가가는데 몇 걸음 옮기기도 전에 이구아나가 선명한 색을 잃어 가는 게 보였다. 이구아나가 지닌 모든 색이 마치 긴 한숨을 내쉬듯 빠져나갔고 내가 다가가 만졌을 때는 콘크리트 덩어리처럼 우중충한 잿빛이 되어 있었다. 그 찬란한 빛을 발했던 건 이구아나의 몸속에서 맹렬히 고동치던 살아 있는 피였다. 그 불길이 꺼지고 영혼이 빠져나가자 이구아나는 모래 자루처럼 죽은 물체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피는 한 방울도 내면 안 되는데 뾰족한 수가 있겠어?」 내가 말했다.
「멤사히브, 시뻘겋게 달군 칼을 쓰면 됩니다. 그러면 피가 안 나지요.」 파라가 대꾸했다.
「게다가 살을 딱 1파운드만 베어야지 그 이상도, 이하도 베면 안 되는걸.」 내가 말했다.
「그런 걸 갖고 누가 겁을 먹겠습니까? 손에 작은 저울을 들고 1파운드가 될 때까지 조금씩 떼어 내면 되지요. 그 유대인에겐 조언을 해줄 친구도 없었나요?」 파라가 응수했다.

-우리 인간으로 말할 것 같으면, 누군가에게 혹독하게 이용을 당해 봐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우리가 기린들에게 저지른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빌 것이다.

하이에나는 창조의 상보적 특성을 한 몸에 구현한 자족적이고 조화로운 존재라는 점 때문에 갈망도 두 배로 느낄까요?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모두 삶의 포로인데 더 많은 재능을 타고날수록 더 행복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더 불행할까요?

-이윽고 늙은 창녀가 앵무새에게 그 말을 시켰는데 듣고 보니 고대 그리스어였다. 앵무새는 매우 천천히 말했고 소년은 그 말을 알아들을 만큼은 그리스어를 할 줄 알았다. 그건 사포의 시 가운데 한 구절이었다.

달도 지고 플레이아데스(七曜星)도 지고,
한밤은 가버렸네,
시간은 흐르고 또 흘러
나 홀로 외로이 누워 있네.

소년이 시를 번역해 주자 늙은 창녀는 혀를 차며 작고 째진 눈의 눈알을 굴렸다. 그녀는 소년에게 다시 말해 달라고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키쿠유족은 시체를 매장하지 않고 땅 위에 두어 하이에나와 독수리들이 처리하게 한다. 나는 태양과 별들 아래 누워 즉각적으로, 깔끔하고 공개적으로 깨끗이 뜯어 먹혀 자연과 하나가 되고 풍경의 흔한 요소가 되는 그런 장례 풍습이 마음에 들었다.

-파라는 데니스를 맞이하도록 농장에 두고 왔기에 나는 말 상대가 없었다. 키쿠유족 하인들은 현실에 대한 인식뿐 아니라 현실 자체가 우리와 달랐기에 말 상대로 쓸모가 없었다.

-결국 집에 가재도구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자 나는 살림이 차 있을 때보다 텅 빈 집이 더 살기 좋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파라에게 그런 마음을 표현했다. 「원래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데.」

-카멜레온은 겁에 질려 있었으나 무척 용감해서 딱 버티고 서서 입을 크게 벌리고 적을 겁주기 위해 몽둥이처럼 생긴 혀를 수탉을 향해 휙 내밀었다. 수탉은 놀란 듯 잠시 주춤하더니 이내 날래고 단호하게 부리를 망치처럼 내리찍어 카멜레온의 혀를 빼먹었다.
그 둘의 대면은 10초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나는 파씨마의 수탉을 쫓아 버리고 커다란 돌멩이로 카멜레온을 쳐서 죽였다. 카멜레온은 혀로 곤충을 잡아먹고 살기에 혀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내 계획은 사소한 것은 모두 포기하고 내게 아주 중요한 것만 지키자는 것이었지만 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나는 내 인생에 대한 일종의 몸값으로 소유물을 하나씩 버리는 것에 동의했는데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자 나 자신이 운명이 버릴 것 중에서 가장 가벼운 것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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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성 소화 선집 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전집 9
김준형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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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15 김준형 옮김.

패설집 ‘이야기책’, ‘소낭’, ‘진담론’, ‘파수추’, ‘어수신화’, ‘성수패설’, ‘기문’, ‘교수잡사’, ‘각수록’, ’파적록‘, ’거면록‘ 총 11권에서 성 소화만 200여 개 골라 한문글을 한글로 옮긴 책이다. 옮기신 선생님은 패설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분이다. 패설은 입으로 전해지던 이야기를 글로 옮겨 소설의 전신 쯤 되는 서사가 있는 글로 읽혔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성 소화는 성적인 우스개 이야기, 요즘 말로 섹드립 모음집 쯤 되겠다. 이게 원조 음담패설이다. 책은 600쪽이 넘지만 한문 원문이 같이 수록된 거라 한글 번역글만 따지면 그래도 3-400쪽은 될 것인데, 어쩌다가 이 책을 중고로 구해가지고 끈덕지게도 다 읽었다.(너도 너다 참…)

한글 아닌 한문으로 적힌 걸 보면 이 글의 향유 계층은 한자 좀 아는 양반네나 한시 지을 줄 아는 기생언니들 쯤 되었을 것 같다. 야한 이야기만 한가득인데, 가끔 책마다 겹치는 이야기가 있기는 해도 이게 근대, 현대로 구전된 건 없는지, 다 새로 읽는 이야기였다. 인간들 야한 쪽으로도 파고들기 시작하면 이야기 지어내는 상상력과 말장난과 풍자와 해학이 끝도 없는 것이다. 이런 데서 느끼는 미감을 골계미라 한다던데 이 말 떠올릴 때마다 왠지 낯설다. 그니까 무슨 느낌인지는 알겠는데 그걸 미로 분류할 것인지는… 에이 모든 미가 선이거나 고상하거나 우아할 필요는 없으니 뭐…

혼자 재미 삼아 읽으래면 읽을 만하지만, 저 이야기들이 입에서 입으로 떠돌던 대로 어디 가서 내가 책에서 읽은 이야기인데- 하고 썰 풀다가는 당신은 철컹철컹, 성희롱과 성폭력의 처벌이 비교적 강화된 시대에 살고 계십니다. 다같이 재미있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누군가는 불쾌하고, 수치심을 느낄 수도 있으니까 굳이 입 밖으로 내진 말고 마음에 묻어 두십시오… 과거의 이야기가 해학, 풍자, 부조리 비판,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사회적 위계 관계가 분명하던 시절 설움 받던 민중 계층이 양반이나 권력자를 우스개거리로 삼을 때나 좀 힘낼 수 있어서였던 것 같다.
그러니까 섹드립을 칠 때는 당신보다 권력 관계에서 윗대가리에 있는데 약자를 모질게 대하는 사람을 조롱하고 웃음 거리로 만들어야 그나마 덜 욕먹을 일이겠지만, 그런 건 진짜 용기가 필요한 일이겠다. 당신은 직업을 잃거나 평판을 잃을 수도 있다! 우리 작은 데 목숨 걸지 말고 몰래 재미있고 평온하게 오래 삽시다. 그래서 모두의 안전을 위해 한글 번역된 이야기는 안 옮겨 왔어요… 한문문학, 특히 패설에 대해 관심 있는 분들은 저자 선생님 논문이나 도서관의 이 책(있다면) 빌려다 보시는 걸로… (판사님 검사님 이 독후감은 옆집 고양이가 챗지피티에게 쓰라고 시킨 글입니다!)

아니 참, 온갖 섹드립, 패드립으로 꽁꽁 뭉친 가르강튀아나 팡타그뤼엘은 인문주의, 르네상스 고전 이러면서 칭송하는데, 조선 후기의 성 소화는 약간 늦은 건가, 늦게라도 민본주의 하겠다는데 죄 단편이라 그런가, 너무 안 알려지고 후려쳐지고 억까인 느낌도 없지 않다. 왜 옮기질 못해 왜… 한문 원본 하나만 살짝 올려두니 한자 잘 아시는 분은 재미있게 읽으시라고...

+한문글의 번역 제목: 벌레들의 말로 겸인을 구해내다
등장인물: 이항복, 그의 겸인, 임금(선조), 모기, 말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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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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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14 귀스타브 플로베르.

‘나보코프의 문학강의’에서는 ‘맨스필드 파크’, ‘황폐한 집’, ‘보바리 부인’,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스완네 집 쪽으로’, ‘변신’, ‘율리시스’를 다루고 있다. 대학 다닐 때는 학기중에는 그렇게도 참고문헌 안 읽고 놀러만 다녔다. 방학 맞이해서야 겨우 뒤늦게 읽고 아, 수업 들을 때 미리 읽었더라면, 하는 책 잘 안 보는 날라리였다. 그래서 이 책 볼 때는 공손하게 다뤄지는 소설들 하나하나, 나보코프 선생님의 픽이잖아, 이미 읽은 건 넘기더라도 안 읽은 건 꼭 읽어보고 강의를 확인하자, 했다.

2017년에 펭귄판 ‘보바리부인’을 읽었다는데, 오늘 책을 다 읽고 독후감 대강 휘갈긴 걸 찾아 보니 오, 나름 줄거리 요약도 해 놨었네…
https://m.blog.naver.com/natf/221305340066

그런데 몇몇 장면 인상깊었다는 느낌만 남아서, 이건 다시 읽고나서 나보코프 책을 마저 보자, 했다. 그랬더니 진도가 안 나가요… 흥미롭긴 한데 너무 두껍잖아… 이번엔 강의를 먼저 읽자, 하고 나보코프의 눈으로 본 ‘보바리 부인’을 훑고 나니, 와, 이거 되게 재밌겠는데, 프로이트의 음흉한 미소 운운하는 나보코프도 제법이지만 역시나 직접 소설을 보는 게...하고 다시 읽던 걸 속도를 내서 마저 읽었다.

8년 전에 읽은 책은 안 읽은 거나 다름 없고,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너무도 다르다. 엠마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만큼 다를 것이다.(아닐까 넌 다시 태어나도 그 모양일까) 그래서 마치 처음 읽는 소설 같았고, 와, 플로베르의 문장을, 이야기 구성을, 온갖 인물상을 즐겁게 읽을 수 있는 내가 된 게 좋았다. 글 좀 쓰시는, 읽으시는 선생님들이 플로베르 짱짱맨하는 것도 납득이 되었고…
그런데 나보고프 선생님 강의 읽기 전에 프루스트나 조이스의 소설을 먼저 읽는 건 영 무리가 아닐까 싶다. 이번처럼 다이제스트라도 먼저 맛 보고 읽든가 말든가 하는 걸로…

스포일러를 죽도록 싫어해서 책을 다루는 책들을 극도로 회피하는 편이지만, ’마담 보바리‘는 결말을 알고도, 그 결말로 달려가는 과정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웠고 문장은 시처럼 아름다웠고 또 슬펐다. 결말은 전에 읽어서 대강 기억나니까, 플로베르 선생님, 또 죽여야 합니까? 자꾸 묻게 되었다. 거 나중에 에밀 졸라 선생도, 톨스토이 선생도, 박찬욱 선생도 간통녀는 뭐, 이 시대엔 죽어야지 별 수 있나…하고 다 죽여버리긴 합니다만… 상대 남자는 가끔은 죽고 대부분은 잘 자고 잘 사는 것 같긴 합니다… 다른 결말은 사실 저도 상상을 못하겠네요. 소설 수업 듣던 시절에 선생님이 묻는 소설의 끝에 대해 ‘그냥 다 죽는 거죠, 끝’ 이랬던 나새끼도 생각나는데…

이야기에선 그렇게 쉽게 죽지만 현실은 불행히도 삶은 계속된답니다. 계속되는 삶에 대해서도 한 번 들여다 봐야겠네요. 대개는 환멸-절교 뭐 이런 전개던데(사강 같은 거) 다른 끝이 있을까요? 하여간에 엠마 한 명 죽이는데 이렇게 수 년 간 집요하게 모든 방향을 한 점으로 주욱 끌고 나아간 플로베르 선생님 품격 있고 섬세한 킬러로 존경합니다…

+밑줄 긋기
-설탕가루까지도 다른 데 것보다 더 희고 더 보드라워 보였다. (76)

-미래는 일종의 캄캄한 복도였고, 그 끝에 나 있는 문은 꽉 잠겨 있었다. (95)

-그래서 나는 지팡이를 짚고 화단을 어슬렁거리든가, 친구들을 고래 뱃속에다 재워준다든가, 비명을 내지르고 죽었다가 불과 사흘 뒤에 소생하는 하느님 같은 그런 아저씨는 믿지 않습니다. 그 자체가 엉터리 같은 얘기인 데다가 물리학의 모든 법칙에 완전히 어긋납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러한 사실은 신부들이 항상 창피스러운 무지 속에 안주하고 있으며, 민중도 그 속으로 같이 끌어들이려고 한다는 증거입니다. (117, 오메 씨 같이 패기로운 불신자들 보면 난 왜 껌뻑 죽는지. 내가 이럴 줄 알고 플로베르님은 적당히 익살꾼이던 오메를 막판에 악성 저널리스트에다 권력과 명예에 미친 놈으로 급하게 몰아간다. 원래 그런 놈인데 내가 못 알아 본 걸 수도 있고...)

-남자로 태어나면 적어도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온갖 정념의 세계, 온갖 나라를 두루 경험할 수 있고 장애를 돌파하고 아무리 먼 행복이라 해도 붙잡을 수가 있다. 그러나 여자는 끊임없이 금지와 마주친다. 무기력한 동시에 유순한 여자는 육체적으로 약하고 법률의 속박에 묶여 있다. 여자의 의지는 모자에 달린 베일 같아서 끈에 매여 있으면서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펄럭거린다. 여자는 언제나 어떤 욕망에 이끌리지만 어떤 체면에 발목이 잡혀 있다. (131-132, 이거 놔라 놔… 시대적 특징이 드러나는 서글픈 서술. 지금은 어떨까? 그냥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묶여 있는 기분이다.)

-하기야 그녀의 남편도 그녀의 일부분인 그 무엇이 아니겠는가?
엠마 쪽으로 말하면, 자기가 그를 사랑하는지 어떤지 생각조차 해본 일이 없었다. 연애란 요란한 번개와 천둥과 더불어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라고 그녀는 믿고 있었던 것이다. 하늘에서 인간이 사는 땅 위로 떨어져 인생을 뒤집어엎고 인간의 의지를 나뭇잎인 양 뿌리째 뽑아버리며 마음을 송두리째 심연 속으로 몰고가는 태풍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이다. 그녀는 집 안의 테라스에서 물받이 홈통이 막히면 빗물이 호수를 이루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태연히 안심하고 있다가 문득 벽에 금이 간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148, 가랑비에 옷 젖듯 엠마의 연애가, 빚이 와장창 해버릴 것을 미리 밑밥 깔듯 찰지게 비유를 하는 것이다. 아 나 이 부분 보고 감탄하면서 이따위로 밖에 평 못 하는게 스스로 빡치네…)

-중류층 마누라들은 그녀의 검소함을, 환자들은 그녀의 예의바름을, 가난한 사람들은 그녀의 자비로움을 칭찬했다.
그러나 그녀는 탐욕과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주름이 똑바로 잡힌 옷은 산란한 마음을 감추고 있었고 그토록 정숙해 보이는 입술은 마음의 고뇌를 말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레옹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모습을 마음껏 그려보는 즐거움을 위해 고독을 원했다. 그가 직접 눈앞에 보이면 그 명상의 쾌락이 흐트러지는 것이었다. 엠마는 그의 발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뛰었다. 그러다가 막상 그가 앞에 오면 감동이 사라지면서 오로지 커다란 놀라움만이 남았다가 어느덧 그것도 슬픔으로 변하고 마는 것이었다. (158-159, ‘날 사랑하는 게 아니고 날 사랑하고 있단 너의 마음을 사랑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하고 오지은은 노래했었다. 책 다 읽기 전날 큰어린이랑 아이패드로 노래방 틀어놓고 한 번 불러봤다.)

-이때부터 레옹의 이 같은 추억은 그녀의 권태의 중심처럼 되어버렸다. 그것은 러시아의 황야에서 나그네들이 눈 위에 버리고 간 모닥불보다도 더 강하게 권태 속에서 소리를 내며 타고 있었다. 그녀는 거기로 달려가서 그 옆에 웅크리고 앉아 꺼져가는 그 불을 조심스럽게 해적여보았고 불 기운을 돋울 수 있는 것이 없을까 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찾는 것이었다. 가장 아득한 기억들이건,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잡을 수 있는 기회건, 실제로 겪은 일이건, 마음속으로 상상한 일이건, 산산이 흩어지는 관능의 욕망이건, 마른 나뭇가지처럼 바람에 꺾이는 행복의 계획이건, 자신의 보람 없는 정조건, 깨어져버린 희망이건, 집안의 잡일이건, 자신의 슬픔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긁어모으고 무엇이든 받아들여 이용하려고 들었다.
그러나 땔감이 저절로 떨어진 것일까, 아니면 땔감을 너무 많이 쌓아올린 탓일까, 불길은 그만 사그라져 버렸다. 사랑은 부재로 인하여 조금씩 꺼져 갔고 미련은 습관 속에서 질식해 버렸다. 그녀의 창백한 하늘을 붉게 물들이던 불길의 남은 빛은 더욱 어두운 그림자에 덮여 점점 사라져갔다. (181-182, 모닥불 하나로 집요하게 마음의 변화를 그리는 플로베르 아저씨… 난 왜 이렇게 못 쓰죠? 하게 만드는 문장이나 비유나 묘사들이 참 많았다. 나보코프의 픽이 될 만했다. 허허)

-‘(…) 보바리 부인!......모두들 당신을 그렇게 부르지요!......사실, 그건 당신 이름이 아니죠! 다른 남자의 이름인걸요!’
그는 되풀이했다.
‘다른 남자의!’
그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226, 수작부리는 대목인데 나도 이 소설 이름이 엠마가 아니라 굳이 보바리부인인지 오래도록 자문해봤다. 이런저런 이유를 짐작해 보지만 플로베르 씨는 이미 먼지가 되어서 가서 물어볼 수도 없고...챗지피티한테 물어봤더니 구구절절 떠드는데 출처를 모르겠네 그건 누구 생각이니)

-하늘은 푸르렀고 나뭇잎은 움직이지 않았다. 온통 꽃이 만발한 히이드로 뒤덮인 넓은 공터가 여러 군데 있었다. 오랑캐꽃들이 상보처럼 깔렸는가 하면 번갈아 수목의 덤불이 나타나곤 했다. 수목들은 나뭇잎의 다양한 종류에 따라 회색, 갈색, 황금색 등으로 달라졌다. 때때로 덤불 밑에서 새들이 나직하게 날개를 퍼덕이는 소리, 혹은 떡갈나무 숲에서 날아오르는 까마귀들의 연하고 목 쉰 울음소리가 들리곤 했다. (231, 하아, 인물 묘사나 서사나 서술 아닌 이런 부분을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그게 문학이로군 하고 감탄하다 위축되는 부분이라 퍼 놨다. 군더더기라 여기지 말고 서사의 밑바탕에 배경음악처럼 깔리도록, 가능하면 변주나 오브제나 복선 같은 게 되도록 문장이라는 깔개를 능숙하게 깔아 놓는 게 대문호랑 쪼렙 글싸개의 차이겠지...)

-‘(…) 내 친구가, 동생이, 천사가 되어주세요!’ (233, 야이씨 로돌프 새끼 넌 동생한테 이런 개수작이냐… 저런 대사로 농축된 비열함을 풍기는 것도 재주다.)

-그때 그녀는 옛날에 읽었던 책 속의 여주인공들을 상기했다. 불륜의 사랑에 빠진 서정적인 여자들의 무리가 그녀의 기억 속에서 공감어린 목소리로 노래하기 시작하며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 자신이 이런 상상 세계의 진정한 일부로 변하면서 그녀는 예전에 자신이 그토록 선망했던 사랑에 빠진 여자의 전형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이리하여 젊은 시절의 긴 몽상이 현실로 변하고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설욕의 만족감도 느끼고 있었다. 그녀도 그만하면 어지간히 고통받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제 바야흐로 승리를 거둔 것이다.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사랑이 환희로 끓어올라 한방울 남김없이 분출된 것이다. 그녀는 뉘우침도 불안도 고민도 없이 그 사랑을 음미하는 것이었다. (236-237, 이미 있던 이야기들에서 공범의식 느끼기보다, 나는 클리셰가 되지 않을 거야...나는 책이 아니야… 책 속 그 모든 여자들처럼 죽지 않을 거야… 해야 하는 거 아니냐. 드라마는 됐고 진짜 삶을 내놔, 해야지. 여기서 이미 사망플래그 세우고 있어 가엾은 엠마...)

-그 전날과 마찬가지로 숲속 나막신 만드는 사람의 오두막 안이었다. 벽은 짚으로 되어 있고 지붕이 너무 낮아서 몸을 웅크리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마른 나뭇잎 침상 위에 꼭 붙어 앉아 있었다. (237, 거지 같은 배경 속의 눈먼 사랑을 묘사하는게 진짜 플로베르는 천재 맞는 듯…)

-그러나 암소가 건널 수 있도록 대놓은 널빤지가 걷혀 있을 때는 강을 따라 담장을 끼고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강둑은 미끄러웠다. 그녀는 넘어지지 않도록 시든 계란풀 더미를 손으로 붙잡곤 했다. 그러고는 갈아놓은 밭을 건너지를 때는 발이 빠져서 비틀거렸고 조그만 반장화가 금방이라도 벗겨질 것만 같았다. 머리 위에 묶어 맨 스카프는 목장에 부는 바람에 펄럭였다. 그녀는 황소들이 무서워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숨을 몰아쉬면서 뺨이 장밋빛으로 변하고 온몸에서 수액과 초목과 대기의 신선한 냄새를 발산하며 도착했다. 로돌프는 그때까지도 자고 있었다. 마치 봄날 아침이 그의 방안으로 찾아들어온 것만 같았다. (….)
마침내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이렇게 자주 찾아오는 것은 신중하지 못하다, 그녀의 평판에 누가 될지도 모른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238-239,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산넘고 물건너 갔더니 저따위 반응이라니 로돌프 확 씨)

-“세상에는 좋지 못한 약국이 있듯이 나쁜 문학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술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부문을 한데 싸잡아서 단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갈릴레이를 감옥에 가두었던 저 끔찍한 시대에나 어울릴 케케묵은 발상이죠” (314, 속물적인 오메 씨가 신부님 앞에서 깝죽거리는 말들이 웃긴 나도 속물인 거죠? 그래서 직업도 따라가 보려 했으나 땡탈락)

-아, 만약 그녀가 아직 싱싱한 아름다움을 고이 간직하고 있을 때, 결혼의 더러움도 간통의 환멸도 느끼기 전에, 누군가의 든든한 가슴에 생을 위탁할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더라면 미덕과 애정이, 쾌락과 의무가 둘이 아닌 하나였을 테고 행복의 저 드높은 곳에서 밑으로 굴러떨어지는 일은 결코 없었으리라. 그러나 저런 행복은 틀림없이 모든 욕망을 비웃기 위해서 상상해 낸 거짓일 것이다. 이제 그녀는 예술이 과장하여 보여주는 정열들의 보잘것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엠마는 생각을 딴 데로 돌리려고 애쓰면서 자신이 맛본 고통의 그 같은 재현이 한갓 눈에 즐거울 뿐인 조형적 환상이라 생각하려고 노력했고 심지어 마음속으로 경멸이 깃들인 연민의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324, 엠마의 바람은 저절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고 대부분의 사람이 얻지 못하는 무언가가 아닐지. 그래서 드라마나 영화나 로맨스 소설이나 미연시-요즘은 이런 거 안 하나- 속 연애에 이입하는 건 아닌지.)

-“아, 그래 모르시겠다? 그렇다면 가르쳐주지! 넌 거기서 황납으로 밀봉한 파아란 유리병을 보았을 테지. 안에 하얀 가루가 들어 있고 내가 그 겉에 위험이라고 써놓기까지 했어! 그 속에 뭐가 들었는지 알아? 비소야, 비소! 그런데 넌 그걸 건드릴 뻔한 거야! 그 옆에 있는 냄비를 집어왔으니!” (360, 뭔가 PPL영상 마냥 여기 독약이요 독약! 한 방에 숑 가요! 하며 홍보 중인 오메씨…)

-호전적인 그 무엇이 그녀를 들뜨게 했다. 남자들을 두들겨 패주고 얼굴에 침을 뱉어주고 모조리 박살을 내고만 싶었다. 그녀는 파랗게 질린 채 분노에 떨며 눈물 젖은 눈으로 텅 빈 지평선 저쪽을 더듬으면서 숨막히는 증오의 감정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이 계속 빠른 걸음으로 앞을 향해 걸었다. (438, 그 감정 조금이라도 빨리 느꼈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까. 그런데 사치랑 연애랑 겹쳐서 골팰 뿐이지 어느 한 기질 때문에 둘 모두 파국인 건 아니지 싶다. 각자 다른 방향에서 한 번에 덮친 거지.)

-이어서 신부는 천주께서 불쌍히 여기소서와 용서하여 주옵소서의 기도를 올리고 나서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성유에 적셔서 종부성사를 시작했다. 우선 지상의 모든 영화를 그토록 갈망했던 두 눈에, 다음에는 따뜻한 미풍과 사랑의 냄새를 그토록 좋아했떤 콧구멍에, 다음에는 거짓을 말하기 위해 벌어지고 오만에 전율하며 음란한 쾌락에 울부짖던 입에, 다음으로는 기분좋은 감촉을 즐기던 두 손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는 그토록 빨리 달렸건만 이제는 이미 걸어다니지도 못할 발바닥에 성유를 발랐다. (468, 성호 하나하나마나 엠마의 삶을 요약)

-“남자가 여자 없이 산다는 것은 순리가 아니니까 그렇죠!” 하고 약제사는 말했다. “그래서 갖가지 범죄도 생기고…...”
“원 별 소릴 다 듣겠네!” 하고 사제는 소리쳤다. “결혼 생활에 몸담고 있는 인간이 어떻게, 예를 들면 고해의 비밀 같은 것을 지킬 수 있겠습니가?” (479, 남의 빈소에서 부르니지엥 신부님과 약제사 오메가 신앙/이성 이러고 티격태격 내내 싸우는 것은 익살스러웠고,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지지 않도록 후반부까지 균형 잡는 플로베르 선생님의 내공이 느껴지고…)

-달빛처럼 흰 비단옷 위에 물결 모양으로 무늬가 지면서 떨렸다. 엠마의 모습은 그 밑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샤를르에게는 그녀가 자기의 몸 밖으로 번져 나와서 주위의 사물들 속으로, 침묵 속으로, 밤의 어둠 속으로, 지나가는 바람 속으로, 올라오는 습기 찬 향내 속으로 녹아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480-481, 죽음을 대하는 눈을 이렇게 아름답게 그린 표현은 난 다른 데선 아직 못 봤는데 비슷한 거라도 있으면 좀 가져와 보세요…)

-약제사와 신부는 다시 그들의 일에 몰두했다. 물론 때때로 졸지 않을 수 없었고 눈을 뜰 때마다 잠만 잔다고 상대방의 흉을 보았다. 그러면 부르니지엥 씨가 방안에 성수를 뿌렸고 오메도 질세라 클로르 수를 마룻바닥에 조금 뿌렸다. (482, ㅋㅋㅋ 미안 엠마 너 죽었는데 웃어서... 이 사람들은 너무 웃겨…저러다 같이 졸고 먹고 하하호호)

-자정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마을은 고요했다. 샤를르는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여전히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다.
로돌프는 기분 전환을 위해서 온종일 숲속을 헤매다닌 뒤 자기 집에서 편안히 자고 있었다. 저 멀리 레옹도 역시 자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시각에 자지 않고 있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전나무 숲속의 무덤가에서 한 아이가 무릎을 꿇고서 울고 있었다. 흐느낌으로 찢어질 듯한 그의 가슴은 달빛보다도 더 부드럽고 칠흑 같은 밤보다도 더 헤아릴 길 없는 엄청난 회한에 짓눌려 어둠 속에서 헐떡이고 있었다. (490, 엠마는 끝끝내 쥐스텡의 사랑은 알지도 못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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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09-15 1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맨스필드파크, 스완네집쪽으로, 율리시스....제겐 전부 지루하고 재미없는 책들이었네요..
전부 읽다가 만 책들...언제 재밌게 읽으면서 완독하려나...ㅎㅎ
차라리 플로베르가 이들에 비해서는 100배 재밌는 듯합니다..^^

반유행열반인 2025-09-15 16:09   좋아요 0 | URL
맨스필드는 축약판 보고 후회했고 저도 뒤의 두권은 엄두가 나질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