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세트] 기생충 각본집 & 스토리보드북 (총2권)
봉준호 지음 / 플레인아카이브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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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15 봉준호.

재미있어서 영화도 두 번봤다. 영상화 되기 이전 머릿속에 떠오른 걸 그려놓고 그걸 다시 영화로 만든 게 신기했다. 스토리보드. 뭔가 구상할 때 이런 식으로 하는 구나. 영화는 볼 때마다 정말 신기하다.
너는 계획이 다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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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의 응답 - 우리가 궁금했던 여성 성기의 모든 것
니나 브로크만.엘렌 스퇴켄 달 지음, 김명남 옮김, 윤정원 감수 / 열린책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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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14 니나 브로크만·엘렌 스퇴켄 달.

아이들이 자라면 권하고 싶은 책 3종 세트 완성.
질의응답+마이 시크릿 닥터+만화로 보는 성의 역사.
내가 십 대일 때 이런 책들을 읽었다면, 아님 십 년 전, 십칠 년 전에만 읽었더라도 조금은 마음 편하게 이십 대를 보냈을 것 같다. 삶 자체가 달라졌을지도.
여성이 겪을 수 있는 과정이란 샅샅이 겪었고 열심히 찾아보고 공부한다고는 했는데도, 성에 대한 책을 때마다 아직도 몰랐던 것들, 여태 궁금한 것들을 알아가는 재미가 있었다. 아직 살 날이 많으니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

이 책은 피임법을 고민하다 검색결과에서 누군가의 서평이나 원문 미리보기로 자주 등장했다. 책쉼터라고 집콕 지원한다면서 전자책 두 권을 무료로 빌려주는 데 마침 이 책이 있어서 신나서 빌렸다.
30년 넘게 살면서 호르몬 피임법을 고려해 본 적이 없는데, 근래 해 볼 걸 다 해 봤다. 정보 수집 열심히 하고 의사 상담도 해봤는데, 의사는 그냥 정석대로 처리하는 편. 내가 궁금했던 것들은 이 책에 다 있었다.

-궁금했던 점1. 피임약 쉼없이 주욱 먹어도 되나.
피임약 작년 말에 처음 처방 받았는데, 휴약기 없이 이어서 먹으면 생리를 안 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게 몸에 나쁜가? 좋은가? 고민이었는데 이 책도 그렇고 마이시크릿닥터에서도 그렇고 생리를 안 하는 건 문제 없다고 한다.
생리가 뭔지부터 이해해야 한다. 자궁 내막이 에스트로겐 자극을 받아 수정란이 착상 잘 되도록 무럭무럭 두텁게 자라난다. 그런데 배란 이후에도 임신이 안 되면 내막은 쓰잘데 없어져 시무룩 하며 다 떨어져 나와 몸 밖으로 흘러나간다. 이게 생리.
피임약이나 호르몬제의 원리는 배란 자체가 안 되게 한다. 그러니 피임약을 먹다가 주기 끝나고 약 쉬는 동안 출혈이 있는 건 엄밀히 말하면 일반적인 생리가 아니다. 복합 피임제는 소량의 에스트로겐과 배란 억제하는 프로게스테론이 같이 들어 있는데, 어쨌거나 에스트로겐이(약에 든 거랑 우리 몸이 분비하는 게) 있어서 자궁 내막이 조금이나마 자라고, 피임약의 호르몬 제공이 중단되면 그 조금 자란 내막이 떨어져 나온다. 배란 없는 생리, 이거는 소퇴성 출혈이라고 한다. 생리보다는 양도 조금만 나오다 멈추고, 다시 약을 먹으면 배란이 안 되는 효과가 지속된다.
굳이 약을 쉬어가며 소퇴성 출혈 유도하는 건, 저자들 말에 따르면 사람들이 피를 봐야 임신이 아닌 걸 안심해서, 생리 안 하면 불안해하니까, 라고 한다. 그런데 생리 안 한다고 몸에 나쁠 거 없다고 한다. 그니까 원하면 두달이고 세달이고 주욱 피임약 휴약기 없이 먹어도 된다는 (그러면 생리를 안 하고 살 수 있다는!) 게 내가 읽은 책의 저자인 의사(마이시크릿닥터)/의대생(이 책)들의 의견.
그런데 뭐 병원 가서 간호사나 의사랑 상담하면 꼭 7일 휴약하고 다시 먹으라고 한다 ㅋㅋㅋ 이유는 설명 제대로 안 하고 하여간 그러라고 한다.
내가 얻은 정보는 이러하고 판단은 복용자가…

나는 처음 피임약을 먹는거라 의사 말을 듣기로 했다. 야스민이라는 4세대 피임약을 세 달 치 처방 받았다.
이전 세대 오래된 피임약은 처방 없이 약국에서 살 수 있는 일반의약품이고 값도 조금 더 싸다. 야스민이나 야즈는 비교적 최근에 나온 프로게스테론이 들어 있다보니 의사 처방 없이는 살 수 없는 전문의약품이다.
흡연자나 고연령자는 피임약 먹으면 몸 안에 혈전(피떡)이 생겨 혈관 막히고 죽을 수도 있어서 의사랑 다른 병력과 건강 상담하고 먹어야 한다.
암튼 약을 받고, 이전에 없던 부지런한 생활로 세 달 간 꼬박 21일 같은 시간 알람 맞춰 약 먹고, 7일 쉬고, 그렇게 세 번 했다.
장점은 어쨌거나 임신 안 함, 피부 엄청 좋아짐(이전 세대약은 오히려 여드름 폭탄 같은 거 생긴다는 데 이 약은 여드름 치료에도 쓴다고 함), 원래도 일정하던 생리 주기가 복용/휴약주기에 맞춰 칼 같이 딱딱 정해짐, 생리량 줄고 생리통 없어짐, 호르몬 수치가 내내 일정하니 심리적으로도 안정되는 기분(우울증 병력 있는데 감정적 기복 같은 게 복용 중엔 사라짐).
단점은 세 달 치 처방+약값이 7만원 넘었다...알람 맞추고 성실하게 먹어서 피임효과가 유지된 거지, 이런 저런 사정으로 시간 넘기고 복약 까먹는 사람은 불안에 떨어야 한다고 한다. 근데 약 챙겨먹는 거 상당히 귀찮음.

-궁금했던 점2. 임플라논, 좋으냐.
세 달 호르몬을 써 보니 할 만 하겠다 싶었다. 이번에는 피하지방에 심는 임플라논을 하기로 했다. 열심히 검색을 하고 병원에 갔다. 가기 전에 병원에 전화해보니 임플라논 시술을 원하면 다음 생리 시작하고 삼일 째에 오라고 했다. 아마 임신이나 배란 확실히 안 되었을 때 오라는 거였겠지만 나는 이미 피임약 먹고 있는 걸? 그래도 그 때 오라고 해서 약을 다 먹고, 휴약기에 출혈이 삼 일쯤 있을 때 병원에 갔다. 설명 간단하게 하고, 잘 안 쓰는 쪽 윗팔뚝에 마취주사 놓고, 얇은 면봉이나 성냥개비 같은 막대기 주사기로 쑤욱 넣고 반창고 붙이고 끝.
임플라논은 그렇게 삼 년 간 팔뚝 안에 고정된 채 매일 소량의 프로게스테론을 뿜뿜한다. 그 덕에 배란이 되지 않고, 임신도 되지 않는다.
이 책에서는 가장 높은 피임 확률을 가진 방법으로 임플라논을 꼽는다. 1등이라니, 괜히 뿌듯하군. 그 다음으로 자궁내 호르몬 장치(미레나 카일리나 등등)를 꼽는다.
임플라논 피임 면에서는 짱짱이지만 부작용을 겪는 사람도 많은 듯 하다. 일단 에스트로겐 없이 프로게스테론만 사용하다보니 생리주기가 일정치 않게 된다고 한다. 엄밀히 말하면 배란 없으니 일반 생리는 아니고, 어느 순간 조금씩 자라던 내막이 팡 떨어져 나오면서 아무 때나 피가 나온다. 피임약 먹다 쉬고 하면서 호르몬 공급 중단되서 나오는게 소퇴성 출혈이라면, 내막이 지맘대로 조금씩 자라다 팡 하면 파탄성 출혈이라고 한다. 약 먹을 때는 약을 쉬는 걸로 주기 조절이 되지만 몸에 뭐 심는 거는 조절이 안 된다.
자궁내 장치는 대부분 생리 자체가 없어지는데, 임플라논은 그렇지는 않은 듯. 아주 일부는 운이 좋아 무월경의 축복을 받지만, 나는 아니었어…
시술 한 달 되자마자 시작된 출혈이 일반 생리기간보다 오래 간다. 재수 없으면 몇달 혹은 1년 2년 동안 내내 출혈이 있다는 경험담...을 인터넷으로 접했다...망한 건가.
그래도 배란 후의 생리에 비해 양 매우 적음. 배 안 아픔. 생리대는 안 써도 팬티라이너 정도는 써야 함. 그 정도이다. 아 하여간 재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좋겠다. 이러다 말면 좋겠어.
하여간 편하고 피임효과 짱짱이라 자녀가 이성교제 시작했다고 하면 바로 넣어주고 싶다 임플라논...본인이 원한다면 말이다...일찍 애 낳고 싶다면 뭐 안 말린다...대신 나한테 애 봐달라고 하지 마라...비정한 모정…

위에 주절거리고 쓸 만큼 이 책은 피임법 만큼은 엄청 친절하게 시간과 분량을 할애해서 자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다 피임이란. 십 년 전의 나야 그걸 간과했다니 유감이면서도 다행이다. (일찍 계획 없이 애 엄마가 된 자의 자아분열)

그외에도 성기의 구조와 기능에 대한 궁금증, 사용법(!), 월경, 성매개 또는 성매개병이 아닌 생식기 질환, 유산, 임신 중단, 온갖 주제에 대해 간략하게라도 짚고 넘어간다.
헤르페스 걸리면 어떡해...헤르페스 걸린 사람이랑 뽀뽀한 사람이 나한테 옮기면 어떡해...했는데 생각보다 위험한 병 아니라고, 누구나 걸릴 수 있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엄청 오래 개 쿨하게 설명해서 내 편견과 무지와 혐오를 반성했다.

내 몸에 대해 아는 건 더 나은 선택을 하고 나은 삶을 살고 불행을 줄이기 위해서 너무도 중요한 일이다. 그러니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든 한 번쯤 읽기를 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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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씨 마을의 꿈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자음과모음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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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12 옌롄커.

전염병을 겪는 마을 사람들 이야기.

어떤 소설인지 모르고 옌롄커가 쓴 것만 알고 빌렸다. 몇 달 전에 사서를 읽었다. 사서보다는 5년 정도 앞서 펴낸 책이었다.

에이즈가 한 마을을 휩쓸고 멸망시키는 이야기이다.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마꼰도가 멈추지 않는 비 속에 사라진다면, 옌롄커 소설 속 마을들은 가혹한 열병과 가뭄 속에 망해간다. 기후 만으로도 힘든데 그 안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망할 선택을 계속하고, 나쁜 놈들은 치부와 권력 유지, 상승을 위해 사람들을 착취한다.
사서에서도 그렇고, 이곳에서도 마을 사람들은 너무 고분고분하다. 현실에 순응하는 인민.
사전투표율이 25퍼센트를 넘었다. 사람들은 감염 걱정을 하면서도 비닐장갑을 끼고 붐비는 투표소 앞에 줄을 섰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미리 투표하고 온 곁의 사람이 실제와 화면의 다른 점을 말했다. 손세정제? 없었어. 마스크 내리고 본인 확인? 안 해, 신분증만 보고 투표용지 줌. 기표소가 왜 가림막 없는 칸막이냐고? 바이러스 갇혀 있다 감염될까봐? 그런데 내가 간 곳은 가림막 다 있었어 예전 선거 때 쓰던 거랑 똑같은. 우리 나라 사람들은 말 잘 들어. 그러니까 저렇게 줄을 서지.

15년 전 쯤 쓰인 소설인데, 자꾸 지금의 상황과 겹쳐졌다. 열병(에이즈)에 걸린 사람은 죄인 취급 받고 가족과 마을 사람 모두로부터 소외된다. 죽을 날만 기다리던 그들은 학교에 모여 같이 밥을 지어 먹고 공동생활을 한다. 신약을 기다리다 죽어간다. 죽어가는 와중에 사랑도 하고, 도둑질도 하고, 단체로 걷는 식량 주머니에 돌이나 기왓장 같은 걸 넣어 사기도 치고, 권력과 주도권과 이권을 위해 싸운다. 골룸처럼 마을 촌장 관인을 두고 아귀다툼도 한다.
딩수이양 노인은 어떤 직책이 없지만, 마을 촌장처럼, 학교 교장이나 교사처럼 일하고 관리한다. 그에게는 아들 딩후이와 딩량이 있는데, 그들은 정부에서 매혈을 권장하는 틈을 타 사설 채혈소와 이동 채혈 서비스를 운영한다. 이익을 최대한 늘리려고 피를 정량보다 더 뽑고, 사람들의 마음을 교묘히 달래 뽑은 피 또 뽑게 하고, 주사기와 솜을 재활용하는 비위생으로 결국 딩씨 마을의 수많은 사람이 에이즈에 걸린다. 딩량도 그와중에 피를 팔다 에이즈에 걸린다.
딩후이는 자기 피는 안 팔고 남의 피만 뽑아다 팔아서 에이즈에 걸리지 않았고, 내내 돈을 벌 다양한 방법을 궁리한다. 마당에 현장에게 바칠 쥐깨풀을 키우고, 정부에서 내려오는 지원금과 물품을 착복하고, 열병으로 죽은 이에게 나라가 주는 관을 가로채 주변 마을에 팔아 먹고, 죽은 미혼자들을 맺어주는 음혼식(저승 듀오?) 서비스까지 주관해 수수료를 챙긴다. 그렇게 부를 축적해 딩씨 마을에 삼층집을 세우고, 딩씨 마을을 떠난 뒤에는 훨씬 으리으리한 집을 도시에 세우고 방 한가득 지폐다발을 쌓는다. 그런 딩후이는 자신은 아무 잘못도 없다고 끊임 없이 말한다. 일말의 뉘우침도 없다. 소설 속의 절대 악이다. 이런 딩후이의 아들 샤오창을 마을 사람들은 독이 든 토마토로 살해한다. 이 소설은 딩수이양의 손자이자 딩후이의 아들, 이미 죽은 사람이 화자가 되어 마을의 일을 관찰하고 설명한다.
중반부까지는 화자의 삼촌인 딩량과 링링의 사랑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둘다 배우자가 있지만 열병이 걸린 이후 내쳐져 학교에서 생활한다. 링링은 딩량의 사촌의 부인이지만, 둘은 눈이 맞아 사랑을 나눈다. 그러다 걸려서 망신당하고 링링은 남편 딩샤오밍에게 질질 끌려다 친정마을로 쫓겨난다. 딩량이 아버지와 형에게 부탁해 유산을 링링의 전남편 딩샤오밍에게 넘기기로 약속하고, 딩량의 전부인 팅팅에게 (죽는 사람이 워낙 많아 비싸지고 구하기도 어려워진) 관을 주는 댓가로 양쪽 모두 이혼하고 딩량과 링링은 법적으로 부부가 된다. 부부가 된 순간은 찰나였고, 둘다 병이 심해져 금세 죽는다. 번갈아 가며 낫고, 아프고, 낫게 하려고 애쓰고, 그러다 죽고 하는 부분이 참 환장할 노릇이었다. 지켜보는 사람도 이런데 서로를 지켜보는 두 사람 마음은 어땠을까. 권여선의 봄밤 속 수환과 영경 알류커플도 왠지 자꾸 생각났다. 난 왜 이렇게 불쌍한 커플들 좋아하냐…
뒷부분은 쟈껀주와 딩유에진이 딩수이양 노인을 몰아내고 관인을 남발하며 학교와 마을을 망치는 장면이 주로 나온다. 학교의 공유 물건을 각자의 집으로 가져가고, 마을의 나무를 베어낼 권리를 역시 개개인에게 나누어준다. 남은 건 텅비고 유리창마저 사라진 폐허같은 학교, 가는 묘목만 남아 가뭄 한 번에 죽음의 땅이 되버릴 황량한 마을. 물건과 나무를 가져간 이유 마저 처량하다. 자신이나 가족이 죽고나면 사용할 관을 만들기 위해. 관을 직접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딩후이가 관을 빼돌려 팔아먹었기 때문에.
병이 퍼지는 마을의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죽음을 기다리고 죽음에 대비하는 일 밖에 없다.
죽은 뒤에 치러지는 혼례와 화려한 관짝과 요란한 무덤에 감탄하는 일 밖에 없다. 정작 죽은 이는 모르고 곧 죽을 자들만 부러워하는 허례허식. 산 자들, 죽거나 죽을 이들을 쥐어짜 치부한 자들만 온갖 물질을 쥐고 거들먹대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가. 딩후이는 심지어 열두 살에 독살 당한 아들, 화자인 딩샤오창을 대여섯 살 많은 죽은 여자에게 음혼으로 장가 보내려고 한다. 화려한 장례와 음혼식조차 사람들에게 죽은 뒤에 이렇게 장례를 치러주마, 하는 보여주기식 마케팅이었다.
딩수이양 노인이 마을을 떠나기 싫다는 화자의 울부짖음을 들은 듯 딩후이를 죽여버린다. 잡혀갔다 돌아온 노인의 눈에 비친 마을의 텅 빈 모습을 그린 게 인상적이었다. 딩수이양은 병자들을 돌보고 마을이 엉망이 되지 않도록 애를 쓰긴 했지만, 자꾸 의문이 들었다. 그는 과연 결백한가. 마을을 이지경으로 만들고도 뉘우칠 줄 모르는 아들들을 증오하고 죽이고 싶어하지만, 그 또한 상부의 압박으로 사람들에게 피는 땅에서 솟는 우물물처럼 계속 만들어진다고 가르쳤다. 가뭄에 마른 우물물처럼 매혈은 결국 사람들을 말라죽였다. 그는 사람들이 매혈로 잘 살게된 다른 마을에 견학하도록 유도했다. 피를 팔지 않던 사람들은 부유해진 다른 마을을 보며 결국 미친 듯이 피를 팔게 된다.
딩 노인은 아들의 간통을 알리겠다고 협박하는 쟈껀주와 딩유에진에게 학교 관리 책임을 넘겼다. 이후 환자들의 평화는 사라지고 공동생활은 유지되지 못해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아들들을 엉망진창으로 키워내 마을의 죽음을 재촉한 것도 결국 누구인가. 부모가 자식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래도, 마을 사람들에게 그렇게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딩노인이 아들들은 왜 하나도 설득하지도 통제하지도 못하고 그 지경이 되게 내버려뒀는지 알 수 없었다. 대부분 일이 벌어지는 동안은 관망하다가 피해자가 발생한 난 뒤에야 개두해라, 사죄해라, 죽어라 할 뿐이다.
이야기 속 여성들의 처지도 처량했다. 열병이 심하게 진행된 쟈오씨우친이 자기 가족도 아닌 환자들 식사 준비를 도맡아 한다. 어떤 댓가도 없이 당연하게 그렇게 되고, 쟈오씨우친은 열이 받아 식량을 훔치고, 그게 들통나자 울분을 터뜨린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그녀가 밥을 짓는 대신 공동으로 걷는 식량을 내지 않게 한다. 여전히 밥을 하는 사람은 그녀이다. 다른 놈들은 손이 없나...돌아가면서 하면 안 되나...그녀가 나중에 댓가로 받는 건 죽은 뒤 들어갈 관짝이나 만들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 한 그루를 베어낼 권리였다.
똑같이 간통으로 잡혔는데 링링은 바로 남편한테 끌려다 쫓겨나고 딩량은 그와중에도 멋쩍게 웃고 우리 부인한테 이르지마, 이지랄하다 코골고 자빠져 잔다...하아… 부인한테는 나 죽으면 재가해, 하면서도 뒤로는 자기 가족들에게 제발 부인이 나 죽은 뒤에도 재혼 못하게 막아줘요 하는 찌질함도 잊지 않는다. 그러면서 링링이랑 사랑에 빠져… 그나마 양쪽 다 합의이혼하고 결혼해서 소원성취한 건 다행이지만. 넘어져 다친 딩량이 아파서 죽겠다고 열이 펄펄 끓으니 링링이 자기 몸에 찬물을 끼얹어 인간 물수건이 되어 딩량을 안고 열을 내려놓고 정작 자기는 고열로 시달리다 죽는 장면이 어이 없고 안타까웠다. 링링이 죽자 딩량은 칼로 자살한다. 서로 먼저 죽겠다고 시합하는 것 같았다… 말로는 네가 먼저 죽어 막 이러더니…

자연재해나 전염병의 시대에는 사람의 존엄도, 인권도, 사랑도, 다 뒷전이다. 그지옥 속에도 돈을 벌겠다고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는 사람들을 쥐어짜는 잔혹한 무리가 있다. 이 소설의 딩후이가 그랬고, 레미제라블에서 죽은 사람들 금붙이를 털던 여관주인이 그랬고, 코로나 초반에 마스크를 쟁여 놓고 비싸게 팔던 놈들이 그랬고...악한은 쎄고 쎘다.
아픈 이웃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목숨을 걸고 치료하고 돌보고, 물품이나 돈을 지원하고, 남의 아픔에 같이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 덕에 다 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사람이라는 종을 이어간다.
적극 돕지는 못하더라도 같이 아파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아픈 사람을 더 아프게 하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 아픈 사람 모두가 얼른 다 나았으면 좋겠다. 아픈 사람이 더 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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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밤의 공대생 만화
맹기완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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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5 맹기완.

스누에 연재하던 과학자 만화를 묶어 낸 책이다. 작가는 미국으로 유학갔다고 한다.

살까 말까 버티다가 안 샀는데 도서관에서 빌릴 수 있어서 신났다. 그림을 보면 안 사길 잘했다. 여러 인터넷 밈을 과학자 수학자 일화와 연관 지은 센스는 인정. 그러니까 이과의 굽시니스트 급 센스.(지만 그림은 아이패드에 낙서한 그림...나도 이번에 짭플펜슬 샀는데...만화는 못 그리겠지...내 주제에…)

종일 잡생각과 슬픈 마음을 잊으려고 만화책을 들여다 봤지만 그림은 각막을 스칠 뿐… 우울함은 줄어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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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말들 - 나와 당신을 연결하는 이해와 공감의 말들
은유 지음 / 어크로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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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4 은유.

서브리미널이랬나. 무심결에 집어들어 읽고 나면 누군가 열심히 인용구를 실어나른 글에서 만난 책인 걸 뒤늦게 알곤 했다.

뭔가가 아닌 누군가를 알기 위해 에세이를 여러 권 읽었다. 그렇다고 엄청 본 건 아니고 나 치고는 많이 봤다.

이제 그만 봐도 되겠다. 나랑 맞지 않는 옷은 벗기로 했다. 내가 되겠다는 선언 만으로도 멀리 물러나 버린 마음은 아프다. 다루기 쉬운 납작한 사람이 아닌 입체적인 나는 더는 견디기 힘들 수도 있겠지.

말과 글의 공허함. 요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생각이다. 그 공허한 걸 너무나 좋아했고, 그 공허한 걸 잘 해 보겠다고 4월 말 강좌 수강신청까지 했다.

은유 책을 읽는 동안은 말하는대로 쓰는대로 살아온 사람들이 있는 것을 알았다. 이런 표현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그 상황에서는 허투루 살지 않았겠구나.

그렇지만 여전히 말과 글은 공허하다. 아무리 아름답게 말하고 써도 그 말과 글을 만들어 낸 사람을 겪는 일까지 아름답지는 않았다.

사람이 미워지려 할 때마다 상황과 사람은 매 순간 변한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변하지 않음을 가리키며 울었지만 실은 변했기 때문에 서러웠다. 말과 글이 순식간에 녹이던 시간만이 이제는 단단하게 내게 남았기 때문이다. 혼자일 새를 느낄 수 없이 마취된 도취된 날들은 사라지고 금단현상에 빠진 환자만 남았다. 병이 든 채 죽지 않으려면 회복하는 수 밖에 없다.

그러려면 읽고 쓰는 걸 멈춰야 할까. 계속해야 할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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