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씨 마을의 꿈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자음과모음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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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12 옌롄커.

전염병을 겪는 마을 사람들 이야기.

어떤 소설인지 모르고 옌롄커가 쓴 것만 알고 빌렸다. 몇 달 전에 사서를 읽었다. 사서보다는 5년 정도 앞서 펴낸 책이었다.

에이즈가 한 마을을 휩쓸고 멸망시키는 이야기이다.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마꼰도가 멈추지 않는 비 속에 사라진다면, 옌롄커 소설 속 마을들은 가혹한 열병과 가뭄 속에 망해간다. 기후 만으로도 힘든데 그 안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망할 선택을 계속하고, 나쁜 놈들은 치부와 권력 유지, 상승을 위해 사람들을 착취한다.
사서에서도 그렇고, 이곳에서도 마을 사람들은 너무 고분고분하다. 현실에 순응하는 인민.
사전투표율이 25퍼센트를 넘었다. 사람들은 감염 걱정을 하면서도 비닐장갑을 끼고 붐비는 투표소 앞에 줄을 섰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미리 투표하고 온 곁의 사람이 실제와 화면의 다른 점을 말했다. 손세정제? 없었어. 마스크 내리고 본인 확인? 안 해, 신분증만 보고 투표용지 줌. 기표소가 왜 가림막 없는 칸막이냐고? 바이러스 갇혀 있다 감염될까봐? 그런데 내가 간 곳은 가림막 다 있었어 예전 선거 때 쓰던 거랑 똑같은. 우리 나라 사람들은 말 잘 들어. 그러니까 저렇게 줄을 서지.

15년 전 쯤 쓰인 소설인데, 자꾸 지금의 상황과 겹쳐졌다. 열병(에이즈)에 걸린 사람은 죄인 취급 받고 가족과 마을 사람 모두로부터 소외된다. 죽을 날만 기다리던 그들은 학교에 모여 같이 밥을 지어 먹고 공동생활을 한다. 신약을 기다리다 죽어간다. 죽어가는 와중에 사랑도 하고, 도둑질도 하고, 단체로 걷는 식량 주머니에 돌이나 기왓장 같은 걸 넣어 사기도 치고, 권력과 주도권과 이권을 위해 싸운다. 골룸처럼 마을 촌장 관인을 두고 아귀다툼도 한다.
딩수이양 노인은 어떤 직책이 없지만, 마을 촌장처럼, 학교 교장이나 교사처럼 일하고 관리한다. 그에게는 아들 딩후이와 딩량이 있는데, 그들은 정부에서 매혈을 권장하는 틈을 타 사설 채혈소와 이동 채혈 서비스를 운영한다. 이익을 최대한 늘리려고 피를 정량보다 더 뽑고, 사람들의 마음을 교묘히 달래 뽑은 피 또 뽑게 하고, 주사기와 솜을 재활용하는 비위생으로 결국 딩씨 마을의 수많은 사람이 에이즈에 걸린다. 딩량도 그와중에 피를 팔다 에이즈에 걸린다.
딩후이는 자기 피는 안 팔고 남의 피만 뽑아다 팔아서 에이즈에 걸리지 않았고, 내내 돈을 벌 다양한 방법을 궁리한다. 마당에 현장에게 바칠 쥐깨풀을 키우고, 정부에서 내려오는 지원금과 물품을 착복하고, 열병으로 죽은 이에게 나라가 주는 관을 가로채 주변 마을에 팔아 먹고, 죽은 미혼자들을 맺어주는 음혼식(저승 듀오?) 서비스까지 주관해 수수료를 챙긴다. 그렇게 부를 축적해 딩씨 마을에 삼층집을 세우고, 딩씨 마을을 떠난 뒤에는 훨씬 으리으리한 집을 도시에 세우고 방 한가득 지폐다발을 쌓는다. 그런 딩후이는 자신은 아무 잘못도 없다고 끊임 없이 말한다. 일말의 뉘우침도 없다. 소설 속의 절대 악이다. 이런 딩후이의 아들 샤오창을 마을 사람들은 독이 든 토마토로 살해한다. 이 소설은 딩수이양의 손자이자 딩후이의 아들, 이미 죽은 사람이 화자가 되어 마을의 일을 관찰하고 설명한다.
중반부까지는 화자의 삼촌인 딩량과 링링의 사랑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둘다 배우자가 있지만 열병이 걸린 이후 내쳐져 학교에서 생활한다. 링링은 딩량의 사촌의 부인이지만, 둘은 눈이 맞아 사랑을 나눈다. 그러다 걸려서 망신당하고 링링은 남편 딩샤오밍에게 질질 끌려다 친정마을로 쫓겨난다. 딩량이 아버지와 형에게 부탁해 유산을 링링의 전남편 딩샤오밍에게 넘기기로 약속하고, 딩량의 전부인 팅팅에게 (죽는 사람이 워낙 많아 비싸지고 구하기도 어려워진) 관을 주는 댓가로 양쪽 모두 이혼하고 딩량과 링링은 법적으로 부부가 된다. 부부가 된 순간은 찰나였고, 둘다 병이 심해져 금세 죽는다. 번갈아 가며 낫고, 아프고, 낫게 하려고 애쓰고, 그러다 죽고 하는 부분이 참 환장할 노릇이었다. 지켜보는 사람도 이런데 서로를 지켜보는 두 사람 마음은 어땠을까. 권여선의 봄밤 속 수환과 영경 알류커플도 왠지 자꾸 생각났다. 난 왜 이렇게 불쌍한 커플들 좋아하냐…
뒷부분은 쟈껀주와 딩유에진이 딩수이양 노인을 몰아내고 관인을 남발하며 학교와 마을을 망치는 장면이 주로 나온다. 학교의 공유 물건을 각자의 집으로 가져가고, 마을의 나무를 베어낼 권리를 역시 개개인에게 나누어준다. 남은 건 텅비고 유리창마저 사라진 폐허같은 학교, 가는 묘목만 남아 가뭄 한 번에 죽음의 땅이 되버릴 황량한 마을. 물건과 나무를 가져간 이유 마저 처량하다. 자신이나 가족이 죽고나면 사용할 관을 만들기 위해. 관을 직접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딩후이가 관을 빼돌려 팔아먹었기 때문에.
병이 퍼지는 마을의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죽음을 기다리고 죽음에 대비하는 일 밖에 없다.
죽은 뒤에 치러지는 혼례와 화려한 관짝과 요란한 무덤에 감탄하는 일 밖에 없다. 정작 죽은 이는 모르고 곧 죽을 자들만 부러워하는 허례허식. 산 자들, 죽거나 죽을 이들을 쥐어짜 치부한 자들만 온갖 물질을 쥐고 거들먹대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가. 딩후이는 심지어 열두 살에 독살 당한 아들, 화자인 딩샤오창을 대여섯 살 많은 죽은 여자에게 음혼으로 장가 보내려고 한다. 화려한 장례와 음혼식조차 사람들에게 죽은 뒤에 이렇게 장례를 치러주마, 하는 보여주기식 마케팅이었다.
딩수이양 노인이 마을을 떠나기 싫다는 화자의 울부짖음을 들은 듯 딩후이를 죽여버린다. 잡혀갔다 돌아온 노인의 눈에 비친 마을의 텅 빈 모습을 그린 게 인상적이었다. 딩수이양은 병자들을 돌보고 마을이 엉망이 되지 않도록 애를 쓰긴 했지만, 자꾸 의문이 들었다. 그는 과연 결백한가. 마을을 이지경으로 만들고도 뉘우칠 줄 모르는 아들들을 증오하고 죽이고 싶어하지만, 그 또한 상부의 압박으로 사람들에게 피는 땅에서 솟는 우물물처럼 계속 만들어진다고 가르쳤다. 가뭄에 마른 우물물처럼 매혈은 결국 사람들을 말라죽였다. 그는 사람들이 매혈로 잘 살게된 다른 마을에 견학하도록 유도했다. 피를 팔지 않던 사람들은 부유해진 다른 마을을 보며 결국 미친 듯이 피를 팔게 된다.
딩 노인은 아들의 간통을 알리겠다고 협박하는 쟈껀주와 딩유에진에게 학교 관리 책임을 넘겼다. 이후 환자들의 평화는 사라지고 공동생활은 유지되지 못해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아들들을 엉망진창으로 키워내 마을의 죽음을 재촉한 것도 결국 누구인가. 부모가 자식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래도, 마을 사람들에게 그렇게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딩노인이 아들들은 왜 하나도 설득하지도 통제하지도 못하고 그 지경이 되게 내버려뒀는지 알 수 없었다. 대부분 일이 벌어지는 동안은 관망하다가 피해자가 발생한 난 뒤에야 개두해라, 사죄해라, 죽어라 할 뿐이다.
이야기 속 여성들의 처지도 처량했다. 열병이 심하게 진행된 쟈오씨우친이 자기 가족도 아닌 환자들 식사 준비를 도맡아 한다. 어떤 댓가도 없이 당연하게 그렇게 되고, 쟈오씨우친은 열이 받아 식량을 훔치고, 그게 들통나자 울분을 터뜨린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그녀가 밥을 짓는 대신 공동으로 걷는 식량을 내지 않게 한다. 여전히 밥을 하는 사람은 그녀이다. 다른 놈들은 손이 없나...돌아가면서 하면 안 되나...그녀가 나중에 댓가로 받는 건 죽은 뒤 들어갈 관짝이나 만들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 한 그루를 베어낼 권리였다.
똑같이 간통으로 잡혔는데 링링은 바로 남편한테 끌려다 쫓겨나고 딩량은 그와중에도 멋쩍게 웃고 우리 부인한테 이르지마, 이지랄하다 코골고 자빠져 잔다...하아… 부인한테는 나 죽으면 재가해, 하면서도 뒤로는 자기 가족들에게 제발 부인이 나 죽은 뒤에도 재혼 못하게 막아줘요 하는 찌질함도 잊지 않는다. 그러면서 링링이랑 사랑에 빠져… 그나마 양쪽 다 합의이혼하고 결혼해서 소원성취한 건 다행이지만. 넘어져 다친 딩량이 아파서 죽겠다고 열이 펄펄 끓으니 링링이 자기 몸에 찬물을 끼얹어 인간 물수건이 되어 딩량을 안고 열을 내려놓고 정작 자기는 고열로 시달리다 죽는 장면이 어이 없고 안타까웠다. 링링이 죽자 딩량은 칼로 자살한다. 서로 먼저 죽겠다고 시합하는 것 같았다… 말로는 네가 먼저 죽어 막 이러더니…

자연재해나 전염병의 시대에는 사람의 존엄도, 인권도, 사랑도, 다 뒷전이다. 그지옥 속에도 돈을 벌겠다고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는 사람들을 쥐어짜는 잔혹한 무리가 있다. 이 소설의 딩후이가 그랬고, 레미제라블에서 죽은 사람들 금붙이를 털던 여관주인이 그랬고, 코로나 초반에 마스크를 쟁여 놓고 비싸게 팔던 놈들이 그랬고...악한은 쎄고 쎘다.
아픈 이웃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목숨을 걸고 치료하고 돌보고, 물품이나 돈을 지원하고, 남의 아픔에 같이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 덕에 다 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사람이라는 종을 이어간다.
적극 돕지는 못하더라도 같이 아파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아픈 사람을 더 아프게 하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 아픈 사람 모두가 얼른 다 나았으면 좋겠다. 아픈 사람이 더 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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