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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나, 마들렌
박서련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7월
평점 :
-20250222 박서련.
아마도 올해 중 2가 가장 많이 들어가는 날의 하나이다. 다음은 12월 22일이다. 2022년 2월 22일을 놓쳤을 땐 조금 분했는데 2022년 12월 22일은 날짜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다. 이젠 무얼 사든 비슷한 걸 최소 두 개는 마련해야 마음이 덜 불안한 나는 몇 년 전에 나, 나, 마들렌 광고를 보고는 그 소설이 많이 궁금했다.
전자 도서관에서 빌려서 표제작을 먼저 보고는 조금 실망했다. 제목 만큼 설정 만큼 크게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나와 나는 둘이니까 어디가서 마들렌 말고도 마카롱이나 휘낭시에를 만나고 돌아다니거나, 이쪽에서는 궁상스러운 삶을 이어가더라도 어디가서는 팔짜 고칠 궁리를 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왜 둘이 되면 꼭 하나를 없애는게 궁극의 해결책처럼 여겨지는지 모르겠다.
5년 전에 소설 강좌 들을 때, 짧은 소설 쓰기 과제로 ‘나는 ...이다’라는 주제가 나왔다. ‘나는 예진이다’라는 소설을 썼다. 이름 짓기 귀찮아서 여러 소설 쓰면서도 손예진이라는 이름으로 죄다 주인공 삼고는 했다. 예진이는 이래저래 잘 안 풀려서 우울한데, 똑닮은 예진이가 등장한다. 약사가 되어, 헤어진 내 남자친구와 잘 만나면서, 내 절친이었던 아이와 연락을 주고 받으며. 부모마저 잘난 예진이를 더 끌려하는 모양이다. 에이 시발 억울하면 먼저 작가가 되든가 했어야지… 그땐 꿈도 안 꿨는데 그로부터 2년 뒤엔 약사가 되겠다고 수능 공부를 하고 말야…
그 오래된 습작은 이 독후감 끝에 붙여두겠다. 읽고 싶은 사람만 선택 가능 ㅋㅋㅋ
앞부분 에스에프? 펜데믹 상상한 소설이나, 퀴어 등장하는 소설들이나, 영 재미도 없고 나랑도 안 맞았다. ‘체공녀 강주룡‘ 엄청 재미나게 읽고서 ‘호르몬이 그랬어’보고 와...진짜 단편 못 쓰네, 장편 좋았는데 이건 왜 이래...기복되게 심하네, 했던게 무색하게 그래도 하나 건졌다 싶은 소설이 있었다. ‘세네갈의 부고’라는 제목인데 이 소설에 도서관이 나와서 그런지, 불을 질러서 그런지(진짜 불지름) 하여간에 잘 썼다고 생각했다. 나는 생각보다 진지빠는 소설을 좋아하네… MtoF의 인공자궁 이식과 임신을 다룬 소설도 그럭저럭 상상력이 잘 발휘된 거 같아서 읽을만했고, 마지막 소설도 신파지만 욕할 정도는 아니어서 역시나 기복 심하네… 절반은 좋고 절반은 안 맞았으니 별점 3개 주려다 4개까지는 올려야지 하고 너그러워졌다.
다시, 제일 먼저 한참 전에 본 ‘나, 나, 마들렌’으로 돌아가면, 나, 나한테 그렇게 순순히 죽지는 말지...자꾸 쪼개지고 둘이 셋이 되더라도 그걸 굳이 칼로 목을 잘라낼 필요가 있을까? 차라리 마들렌을 쫓아내야지 바보, 싶었다. 하필 마들렌이냐… 맛 없어… 프루스트 버프 노리지 마라… 과자 친구 감자 친구 그딴 거 말고도 고자 친구 광자 친구 다 만들면서 무한히 쪼개져 봐라… 그런 나도 정작 예진이를 둘 밖에 만들지 못했다. 끽 해야 차유리에 돌이나 하나 박아 넣었다.
+밑줄 긋기
-질문은 다시 연예인 출연진에게로 돌아갔고 나는 테이블 아래를 더듬어 희강의 무릎 위에 손을 얹었다. 이윽고 희강이 그 위에 손을 겹쳐 깍지를 꼈다. 지금 하는 행동이 내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를 이 애가 알고 있을까 의심하면서, 그러나 영원히 몰라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손과 무릎 사이의 온기로 손끝에서부터 녹아 없어지는 나를, 나의 젤로를 상상했다.
네가 사랑하는 젤로는 너를 사랑해서 어른이 되어버렸어. (‘젤로의 변성기’중)
-오늘은 도서관에 불을 지를 예정이다.
-얼핏 만드는 일과 지키는 일 중 전자가 더 중요하고 어렵게 보일 수도 있겠으나 대부분의 경우 그건 착시다. 인간을 만드는 것까지야 뭐 대충 아무나 최소한 두 사람만 모이면 어떻게든 할 수 있지만 기껏 만들어놓은 한 인간이 죽지 않게 돌보아 주는 일은 누구한테나 어려운 것처럼…
-드바가 큰 소리로 말했다. 참관인은 발의 자격이 없지 발언권이 없는 게 아닙니다. 질문할 자격도 없습니까? 의장이 손짓하자 총학생회 홍보국장 비표를 건 사람이 드바에게 무선마이크를 갖다주었다.
드바는 마이크를 툭툭 치며 음향을 확인한 다음 말했다.
좆대로 해라,이 시발 새끼들아.
-뭐 대충, 생활 도서관이 죽지 않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는 노어노문학과로 입학했는데 과가 통폐합되어서 아는 러시아어가 많지는 않은데요, 러시아어로 건배 정도는 할 수 있습 니다. 아무튼 감사합니다. 참 경사스럽네요. 예바뇸!
진짜 그랬어?
진짜 그랬지.
미친놈인가 봐.
-˝학형, 드바 좋아했죠?˝
아진은 러시아어로 1을 뜻했고 그건 드바와 짝이라는 뜻이었다. 별명을 그렇게 지어서인지 원래 의도가 불순해서 별명을 그렇게 지었는지 모르겠으나 아진이 생활 도서관 관장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사귀기 시작했고 제법 오래 만났다.
˝좋아했지.“
-요란한 소리로 화재경보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함부로 털지도 못해서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던 길고 흰 재가 굉음에 반응하듯 상자에 툭 떨어졌다. 이윽고 천장의 스프링클러가 물줄기를 뿜어 댔다.
씨발, 빌어먹을 신축 건물, 시설 끝내주네.
불 꺼진 담배꽁초를 내던지고 상자를 몸으로 감싸 젖지 않게 막으면서 드바라면 꼭 그렇게 말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세네갈식 부고’중)
-문득 한 아이를 키우는 데에는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속담이 떠올랐다. 아이를 만들고 낳는 데에도 어쩌면 그런 게 필요한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있잖아, 보통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 둘이서 만드는데 말이지. 너를 만드는 데에는 수 세기에 달하는 시간에 걸쳐 누적된 의료 지식과 수백 수천억대의 자본과 엄마와 엄마의 엄마와 엄마 친구들의 노력이 들어갔어. 너는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아이야. 괜히 기분 좋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 짜로 그래서 그렇다고 하는 거야. 잠깐이지만 그런 너를 가진 걸 후회해서•••••• 미친 진짜 너무 아파서 쌍욕이 막 자동으로 나오네. (‘김수진의 경우’ 중)
-문학이 위대한 이유는 아무리 형설하기 어려운 사건이라도 이미 그것을 상상한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게 유일한 이유는 아닐지라도, 또 정확히 이런 상황을 예견한 건 아닐지라도. 프란츠 카프카식으로 말하기: 어느 날 아침 목 잘리는 꿈에서 깨어난 나는 자신이 침대에서 두 개의 몸으로 분화한 것을 알아차렸다. 마르셀 에메 인용하기: 그녀는 동시에 도처에 공재 가능했다. 즉 그녀는 자기 자신을 여럿으로 불어나게 할 수 있으며 원하는 장소마다 동시에 존재할 수 있었다. 육체뿐 아니라 정신까지도. (‘나, 나, 마들렌’ 중)
-나를 신이라 생각하면서 그렇게 말했다면, 언젠가 자기에게 죽으라 했던 이에게 그렇게 말했다면 그건 신에게 저항하겠다는 의미였다.
당신은 나한테 죽으라고 했지만 그렇게 순순히 죽지는 않겠다는 말.
(‘마치 당신 같은 신’ 중)
-사랑은 분수를 모르고 늘어만 난다. (작가의 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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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진이다. (20200429-20200508)
여자의 하얀 손이 풍성한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부드러운 머릿결이 이룬 곡선은 카페 천장의 주황빛 조명을 반사하며 윤기를 뽐냈다. 똑같은 아메리카노를 시켰지만 여자가 빨대 끝을 물자 그쪽이 더 맛있어 보였다. 뽀글대며 기포가 올라왔다 터지는 소리, 얼음이 잔에 부딪혀 달각이는 소리는 내 잔에서 더 요란하게 울렸다. 여자는 클러치백에서 지갑을 꺼내고는 엄지와 검지 사이로 집어 올린 것을 이쪽으로 내밀었다.
보다시피, 위조 아니고 주민센터에서 정상 발급 받았어요.
허리를 굽혀 여자가 든 것에 눈높이를 맞추고 자세히 살폈다. 이름 손예진, 930413-으로 시작하는 주민등록번호, 강남구 어드메 오피스텔의 주소지, 발급일자는 약 3년 전이었다. 그간 어떤 선거도 없던 탓에 불과 며칠 전 분실을 알아차렸을 만큼 신분증을 꺼낼 일이 없었다. 플라스틱 카드 위에 납작하게 박힌 얼굴 사진은 마주한 입체의 인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진도 실물도 나와 몹시 닮았지만 동일인이라고 쉽게 우길 수 없을 만큼, 예뻤다. 그러니까 성형외과 광고라면 내 쪽이 비포, 여자 쪽이 애프터였다.
얼굴 놓고 감탄할 때가 아니다. 정신을 차리고 여자를 노려보며 물었다.
이거 불법이에요. 왜 남의 신상을 도용해요?
어떤 인생을 살았길래 나를 훔쳐서까지 신분 세탁을 시도하는 건지 궁금했다. 왜 하필 나인가.
도용이 아니죠. 이게 저예요.
신분증을 흔들어보이는 여자의 표정과 말투에는 어떤 거짓도, 불만도, 동요도 담겨있지 않았다. 자잘한 초록잎을 떨고 있는 창 밖 키 큰 나무는 은행나무이다, 하며 지시하는 것만큼 담담했다. 그 담담함이 더욱 부아를 돋우었다.
남의 주민등록번호는 어떻게 알았어요? 그쪽이 손예진이면 나는 뭐예요?
침착하려고 애썼지만 튀어나온 내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저한테 물어 봤자, 저는 제가 손예진인 것만 알아요. 아는 대로 알려드린 것 뿐이에요.
거짓말 하지 마. 길 가던 사람 붙잡고 이런 짓 하는 이유가 뭐야?
나도 모르게 반말이 튀어나왔다. 여자는 신분증을 든 손 그대로 턱을 괴었다. 생각에 잠긴 듯 어딘가를 잠시 응시하더니 다시 내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저도 이상해요. 거리에서 선생님을 보는 순간, 제가 손예진이라고 말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어요.
제 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이곳을 당장 벗어나야 할지, 여자와 담판을 지어야 할지, 경찰에 신고부터 해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도용된 신분증을 빼앗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 순간 재빨리 손을 뻗었지만, 여자의 운동신경은 나보다 우월했다. 순식간에 내 손을 피한 여자의 손이 주민등록증을 지갑에 넣고 다시 지갑을 클러치백 안으로 밀어 넣었다. 두 손으로 굳게 쥔 클러치백을 무릎 위에 얹은 여자는 인상을 쓰며 스읍, 하고 입으로 나무라는 소리를 냈다.
미친년.
뻗은 손을 거두고 욕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싸움을 벌여 클러치백을 빼앗을 자신이 없었다. 주민센터 가서 재발급 받으면 여자의 신분증은 효력을 잃을 것이다. 최악의 상황을 떠올려봐도 내 명의로 대출받기, 대포통장 개설해 보이스피싱에 활용하기, 위조여권 만들어 해외로 도망가기 정도였다. 나는 잃을 것이 없는 취업준비생일 뿐이다. 겨우 신분증 하나로 내 신용등급이나 대출 가능 금액을 획기적으로 늘릴 방법은 없다. 다행이다 싶은 동시에 서글펐다.
집으로 향하면서 부모와 의논하겠다는 큰 결심을 했다. 한집에 살지만 나를 밥이나 축내는 말종 취급하는 그들과 대화를 끊은 지 오래였다. 용돈이 끊긴 뒤 피씨방에서 시간제 노동으로 일해 필요를 충당했다. 실체는 불분명하지만 어떤 곤경에 처한 것만은 분명한 상황이었고, 이런 때 기댈 곳은 결국 부모 뿐이었다. 내가 놓치고 있거나 손해를 볼 만한 부분을 그들이 말해줄 것이다. 잘 모르면 어디 가서 법률 자문이라도 하겠지.
멀찍이 공동 현관이 보일 즈음 집 앞 주차장에 새빨간 골프 한 대가 멈췄다. 차문이 열리고 여자가 내렸다. 어떻게 알고 집까지 왔구나. 익숙하게 공동 현관 비밀번호를 누른 여자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허겁지겁 여자 뒤를 좆았다. 엘리베이터를 탈 필요없는 1층, 현관문이 닫히기 직전 문틈에 손을 비집고 따라들어갔다.
예진이 왔어.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3인칭 표현을 쓰는 여자는 애교를 부리는 것 같았다. 얼핏 뒤따라 온 나를 가리키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이쯤되면 거리낌없이 여기까지 온 여자가 대체 무슨 일을 하려는 건지 궁금한 지경이었다.
소파에 파묻히듯 앉은 아빠는 늘 그러듯 텔레비전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안방에서 낮잠을 자는지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엄마, 좀 나와 봐.
안방 문 앞에 대고 말한 여자는 아빠 옆 빈 자리에 앉았다. 민소매 원피스 위로 가디건을 주섬주섬 걸치며 잠이 덜 깬 눈을 하고 거실로 나온 엄마가 여자를 보며 어? 소리를 냈다. 아빠가 옆을 힐끔 보더니 동그래진 눈으로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여자가 손짓하며 소파 옆 스툴을 가리키자 엄마는 별 저항 없이 거기 앉았다. 누구냐고 물을 타이밍을 넘긴 부모는 그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현관 앞에 그대로 서서 세 사람이 하는 꼴을 지켜보았다.
어제 월급 받았어. 예진이가 엄마 아빠 용돈 좀 드리려고 들렀지.
두 사람 앞에 따로따로 흰 봉투가 놓였다. 엉겁결에 봉투를 받아 든 부모는 내용물을 들여다본 뒤 얼굴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아직 얼떨떨한 표정이지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조금 밝아진 듯 보였다.
너 필요한데나 쓰지.
이렇게 말한 엄마는 봉투를 접어 가디건 주머니에 넣고 일어섰다. 현관 앞의 나를 보고 뭔가 잊었다는 듯 손뼉을 한 번 치더니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에서 오렌지를 꺼낸 엄마가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나는 황당해서 엄마 곁에 섰다.
저 여자 알아?
예진이잖아.
엄마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엄마까지 왜 그래? 난 어쩌라고?
그러게. 넌 어쩌냐.
무심한 대답을 흘린 엄마는 오렌지가 담긴 접시를 들고 주방을 나섰다. 낮은 탁자 위에 접시를 내려놓은 엄마는 다시 스툴에 앉았다. 나는 소파 옆 바닥에 앉았다. 포크가 네 개 놓여 있어 섭섭함이 조금 누그러졌다. 포크에 찍혀 흘러나온 과즙을 핥다가 부지런히 입 안으로 오렌지를 밀어 넣었다. 텔레비전에서 바다낚시를 하던 연예인이 월척을 낚았다고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가 팔뚝만한 송어 낚은 거 기억 나.
여자의 말에 아빠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그게 기억 나? 너 학교도 안 들어갔을 때인데.
송어 회무침이랑 구이 해 먹었잖아. 유치원에서 아빠가 고기 들고 있는 그림도 그렸어.
아직 집에 있을 걸.
웃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 아빠가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그림을 찾으러 간 모양이었다. 더는 보고 있기 힘들었다.
대체 왜들 이래? 내가 예진이잖아. 미친 여자가 헛소리 하는데 왜 가만 냅둬?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듯 여자는 엄마에게 휴대전화를 내밀며 말했다.
엄마, 우리 약국장님이 소개팅 시켜준대. 피부과 의사라는데, 사진 볼래?
훤하게 생겼네. 너 일하는 데가...
벌써 잊어버렸어? 00약국, 종로3가에 있는 엄청 큰 데야. 난 편입인데도 같은 약대 출신이라고 약국장님이 잘 챙겨주셔.
잘 됐네.
엄마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더 먹으라는 듯 접시를 여자 쪽으로 밀어주었다. 대학 2학년 마치고 약대 입문자격시험을 처음 치른 때가 생각났다. 학점도 공인 영어 점수도 턱없이 낮아 불합격했다. 졸업하던 해 한 차례 더 도전했지만 역시 실패였다. 애초부터 능력도 의지도 없는데 약사가 되길 바라는 엄마의 바람대로 시험을 준비하는 시늉만 했다. 생물교육을 전공했지만 교사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 자격증이 있으니 기간제교사나 시간강사, 방과후강사라도 알아보라고 부모는 성화했지만 주5시간짜리 강사 자리조차 경력 없는 내게 돌아오지 않았다. 임용고사든 사립학교 취업이든 도전해보라는 부모의 말을 흘려들으며 버틴 게 벌써 3년째였다.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을 아직 찾지 못했다. 지금은 피씨방 손님들에게 라면을 끓여주고 카운터를 지키는 동안 매크로를 돌려 얻은 게임 아이템을 팔아 연명하고 있다.
그런데 저 여자는 약사라고 한다. 대형 약국에 취업했고, 자기 차를 운전하고, 부모로부터 독립해 살고 있다. 나였으면, 싶지만 내가 아닌 삶. 그렇게 다 가진 여자가 뭐가 아쉬운지 자신이 손예진이라고 우긴다. 가진 건 이름 뿐인 나로부터 그 이름마저 빼앗으려 한다.
그걸 다 믿어? 꿍꿍이가 있어서 하는 거짓말이면 어쩔 거야.
내 말에 여자는 담담한 소리로 말했다.
00약국에 전화해 봐요. 손예진 약사 바꿔달라고 해.
여자와 나를 번갈아 보던 엄마는 빈손으로 방에서 나오는 아빠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어디서 봤는데 못 찾겠네...예진이 그림 못 봤어?
멋쩍은 표정을 한 아빠의 묻는 말에 엄마는 손사래를 쳤다.
그림 타령은 관두고, 00약국에 전화 좀 해 봐.
약국은 뭣하러?
손예진 약사 있냐고 물어 봐.
여기 있잖아, 예진이.
아빠가 여자를 보며 말했다. 매우 섭섭한 마음에 큰소리로 독촉했다.
얼른 해봐요!
번호를 검색하는지 한참 주물러대던 전화기를 귀에 붙인 아빠가 말했다.
약국이죠? 거기 손예진 약사님 통화할 수 있을까요? 예, 예, 알겠습니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나와 눈이 마주친 아빠는 얼른 엄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래요?
손예진 약사님 오늘 휴무래. 내일 전화 하래.
엄마의 물음에 아빠가 답했다. 마주 본 두 사람의 표정이 더 밝아진 것처럼 보였다.
쉬는 날이니까 왔죠.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약국이랑 짰을 수도 있잖아. 아니, 같은 이름 약사가 있는 걸 미리 알고 저러는 거야. 몇 년 전에 보이스피싱 당해 놓고 아직도 정신 못 차려?
예진이를 사칭해서 뭐에다 써.
아빠가 무심하게 말했다.
그래. 사칭이래도 뜯어갈게 뭐 있냐, 개뿔 없는 집구석.
엄마가 맞장구쳤다. 할 말이 없었다. 갑자기 들이닥쳐 자신을 손예진이라고 주장하는 여자를 두고 내 부모라는 사람들은 의심조차 못하고 있다. 오히려, 저쪽이 손예진이라고 굳게 믿고 싶은 것처럼 보여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저 인간이 나였으면 싶은 거지? 알았어, 내가 없어지면 되잖아.
홧김에 현관문을 나섰지만 붙잡거나 따라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발 가는대로 걷다 전화기를 꺼냈다. 주소록을 열고 이름 하나하나를 훑었다. 학교 친구들, 아르바이트 하다 만난 사람들, 게임 동호회 회원들. 나를 거쳐갔지만 한동안 잊은 채 살아온 사람들. 살면서 동명이인을 만나거나 겉모습이 닮았다 싶은 사람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생긴 게 비슷하고 이름이 같은 걸 넘어 자신이 손예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났지만, 이런 상황을 하소연할 만한 친구를 꼽아내기도 어려웠다. 대학 때부터 사귀던 찬민과 헤어지고 마지막 편입 시험까지 떨어진 3년 전, 그때껏 만든 모든 SNS계정을 없앴다. 나에 관한 변변한 게시물도 올리지 못하는 사실상 휴면 상태에다 남들 잘나가는 꼴을 관음증 환자마냥 훔쳐보는 일에 질려가고 있던 시기였다. 계정을 없애자 오히려 뭔가로부터 풀려나는 기분이었고, 이후 고립이나 다름 없는 생활을 했다.
검색창을 열고 손예진 세 글자를 써 넣었다. 내가 웹상에서 사라진 뒤에도 수많은 손예진이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계정에 열심히 자신의 일상을 전시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적어도 백 명은 넘는 손예진의 페이지를 드나들었을 무렵, 방금 전까지 실랑이를 하던 여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아이디 yeyejin93은 I’m Yejin. 00대 약학과 졸업. 00약국 약사, 라는 간단한 소갯말을 적어 두었다. 약병이 진열된 조제실 선반을 배경으로 한, 마스크를 턱 밑에 걸친 셀카가 가장 최근에 올린 게시물이었다. You must come back home- 밑으로 #컴백홈 #서태지마스크 #이주노였나 #00약국 #나는약사다 #직장셀카 등의 해시태그가 보였다. 댓글 몇 개가 달렸다.
약사여신님!
약사여래불약사여래불
마스크 하고도 예쁘시네요
꺅! 우리 서태지 덕질하는 노인들이라고 놀림 받아짢아! 중고나라 LP사러 간 생각난다...아직 가지고 있어ㅋㅋㅋ
마지막 댓글을 남긴 사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이디 callmepigcat을 누르자 낯익은 사진이 보였다. 고1때 단짝 엄지윤이었다. 엄지윤은 댓글에 언급한 LP사진을 올려 놓았다. 빨간 바탕 위로 날아오르는 통통한 흰 비둘기, 세 멤버의 노란색 실루엣.
10년 전 5만원 주고 살 때 찌니가 미쳐따고 했다. 현재 중고가 30만원!!!!! 찌니, 재테크는 이렇게 하는 거야ㅋㅋ
우리는 서로를 찌니와 쮸니로 불렀다. 새내기 때까지는 자주 연락하고 가끔 만나기도 했는데, 기억나지 않는 이유로 크게 싸운 뒤 소식이 끊겼다. 언제부터 왕래했는지 알 수 없지만 댓글을 주고 받는 지윤과 여자는 예전 우리만큼 친한 듯 보였다. 분노보다 슬픔이 밀려왔다. 숨지 말 것을, 좋아요를 누르며 근근이라도 관계를 이어갈 것을. 늦은 후회 속에 움츠려드느라 챙기지 못한 사람들을 잠시 떠올려보았다.
다시 주소록을 열어 지윤의 번호를 찾았다. 좁은 골목이 보여 안으로 들어섰다. 잠시 망설이다 통화버튼을 눌렀다. 신호음 뒤로 여보세요, 곧이어 누구세요? 하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전화번호를 삭제한 모양이었다.
나 예진이야. 오랜만이다.
찌니? 이 번호 아니잖아.
나 전화번호 바꾼 적 없어.
그랬나? 폰 바꾸면서 옛날 번호는 다 사라져서 네가 다시 알려준 번호로 저장했지. 너 번호 두 개야?
아니야. 지윤아, 너 나랑 인친이지?
새삼스럽게, 전에 만났을 때 너한테 아이디 물어보고 인스타 추가했잖아.
우리가 최근에 만났니?
찌니 너 오늘 이상해. 오랜만이 다 뭐야. 지난 주에도 같이 놀았으면서.
지윤아, 들어 봐. 고딩 때 우리 서태지 LP사러 갔잖아. 청계천에 있는 헌 책방에.
기억 나지. 내가 인스타에 사진 올렸잖아!
그래, 가기 전에 행운분식에서 네가 라볶이 사 줬어.
그랬나? 행운분식 진짜 오랜만에 듣는다. 라볶이 급 땡겨...
너 최근에 만났다는 예진이 말야. 내가 아니야.
한동안 지윤은 말이 없었다. 통화 상태로 메시지를 주고 받는지 키패드 터치음이 들렸다. 한참 뒤 지윤이 물었다.
누구세요?
예진이.
왜 예진이 사칭하세요?
너랑 인스타 친구 맺은 사람이 날 사칭한 거야. 그 인간 때문에 지금 힘들어.
헛소리 하지 마세요. 찌니는 나한테 지윤이라고 안 해.
오랜만이라 어색해서...쮸니...내가 찌니야.
그새 어디서 주워봤나 보네. 신고할 거에요.
통화종료음이 울렸다. 심장이 내려 앉는 것 같았다. 골목을 나와 다시 큰길로 나섰다. 어릴 때 본 만화가 떠올랐다. 함부로 버린 발톱을 쥐가 훔쳐 먹고는 주인공과 똑같은 모습으로 둔갑하여 진짜 행세를 했다. 신통한 스님이었나 지혜로운 원님이었나, 우연히 만난 누군가가 진위를 판별해주자 가짜가 물러나고 일상을 찾는 결말이었다. 거리를 둘러보았지만 제 갈 길 바쁜, 일면식 없는 사람들만 눈에 들어왔다. 그런 우연, 아니 커다란 행운을 마주칠 가망은 전혀 없어보였다.
가까운 이들에게 매달릴 수 밖에 없었다. 그들에 관해 아는 것 중 도움이 될 만한 사실을 꼽아보았다.
-거리에서 젊은 여자와 팔짱을 끼고 가다 마주친 아빠.
-몰래 든 계가 깨져 내 학자금 대출로 빚구멍을 메운 엄마.
-라볶이와 중고 LP 구입 자금을 학급비 횡령으로 마련했다고 고백하던 지윤.
전 남자친구 찬민의 허벅지 안쪽 화상 흉터에까지 생각이 튀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나와 상대방만 아는 일이지만 꺼내봤자 외면 또는 부인 당할 약점들 뿐이었다. 몇 안 되는 인연에 기대야만 드러나는 나의 처지란, 돌아가는 바람개비, 떨리는 나뭇가지, 날아가는 연 없이는 감지되지 못할 미약한 바람과 같았다. 나만 아는 내 소유물들을 생각했다. 몰래 쓰는 일기장, 책상 서랍 뒤에 숨긴 담배갑, 옷장 구석에 처박아 둔 티팬티, 만렙 찍은 게임 캐릭터... 나만 아는 것은 아무도 모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것들이 거기 있다는 사실을 남에게 밝히는 일 자체가 비루하고 수치스러웠다.
빨간 골프가 보였다. 어느 새 집 앞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날이 어둑한데 여자는 여지껏 돌아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문득 여자가 손예진이 아닌 다른 존재라는 것을 밝히는 편이 더 쉽게 느껴졌다. 선팅된 차창 주변을 빙 돌며 눈을 가늘게 뜨고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클러치백은 아까 여자가 지닌 것을 보고 나왔다. 자동차등록증, 면허증, 두고 간 전화기 같은 단서가 될 만한 물건을 찾으려고 차안 곳곳을 살폈지만 눈에 띄는 게 없었다. 잠긴 문을 여는 일도 문제였다. 고개를 들자 운전석 위 룸미러에 시선이 닿았다. 룸미러 아래 매달린 마름모꼴 작은 사진액자. 여자와 찬민이 다정하게 얼굴을 마주대고 있었다. 둘은 만났다, 아니 지금도 만나는 사이인지도 모른다. 그런 여자가 찬민을 두고 의사와 소개팅하겠다는 소리를 했다. 액자를 떼어내 사진 속 여자의 얼굴을 찢어 놓고 싶었다.
차 옆에 놓인 주차 방지 고깔을 집어 올려 운전석 옆 창을 내리쳤다. 유리는 꿈쩍없고 깨진 고깔의 플라스틱 파편만 튀어올라 뺨에 부딪혔다. 무겁고 단단한 게 필요했다. 깨진 고깔을 던져버리고 화단 주변을 살피자 경계석 옆으로 줄을 세워 반쯤 묻어 놓은 벽돌 크기의 보도블럭들이 눈에 들어왔다. 손으로 흙을 파헤치고 땅에 박힌 보도블럭 하나를 집어 올렸다.
102호 학생, 뭐하는 거야?
경비 아저씨의 묻는 소리가 뒤편에서 들려왔지만 그대로 손에 든 보도블럭을 차 쪽으로 던졌다. 차와 바닥에 차례로 부딪는 둔탁한 소리, 요란하게 울리는 도난방지 신호음. 바닥에 떨어진 보도블럭을 집어 한 번 더 힘껏 차창을 내리찍었다. 퍽 하는 파열음 뒤로 쩌적거리는 소리가 이어지고 찍힌 자국 주변으로 갈라진 무늬가 퍼졌다. 창문을 깨고 액자를 꺼내 부숴버리는 걸 목표 삼고 다시 보도블럭을 깨진 틈에 내려쳤다. 여자가 뛰어 나와 경찰을 부르면 함께 경찰서로 갈 생각이었다. 전산망에는 열손가락 지문 정보가 담겨 있을 것이고, 피의자든 피해자든 지문 조회를 하면 정체가 밝혀지겠지. 만약 여자의 지문조차 내 것과 같다면? 그때는 타협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요일제, 2부제, 번갈아가며 손예진을 할까. 큰 미련 없다고, 손예진은 너나 하고, 대신 소정의 사례와 다른 신분을 마련해주면 순순히 물러나겠다고 제안하는 모습도 머릿속을 스쳤다. 말리는 경비 아저씨를 뿌리치다 방금 전 아저씨가 나를 부르던 소리가 떠올라 잠시 멈칫했다. 저는 진작부터 학생이 아니에요. 이젠 아무도 아니에요. 속으로 답하며 보도블럭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추진력을 얻기 위해 힘껏 팔을 뒤로 젖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