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 선언 - 상호의존의 정치학 니케북스 사회과학 시리즈
더 케어 컬렉티브 지음, 정소영 옮김 / 니케북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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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18 더 케어 컬렉티브.

돌봄의 윤리에 대한 관심은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을 읽으면서 다시 살아났다. 주디스 버틀러나 프레데리크 보름스가 상호의존성, 상호연대를 이야기하면서 돌봄에 대해 무척이나 강조했다.
아직 쥐뿔도 모를 때, 지금도 개뿔도 모르지만 대학원 수업 듣던 시절 학기말 페이퍼로 돌봄노동에 관해 써 냈던 기억이 났다. 그때 내가 생각한 돌봄노동은 굉장히 협의의 개념이었구나, 이제와 이 책 보면서 느낀 점이다. 엄마가 남의 아이를 돌보는 일을 하고 계신 걸 서두로 해서, 누군가는 자신의 사회생활을 지탱하기 위해 내내 돌봄을 받고 이런 행위가 주가 되는 노동 산업이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지만, 사회과 교육과정이나 교과서에서는 이에 대해 거의 다루고 있지 않다는 뭐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10년도 더 넘게 지나서 자세한 기억은 안 나서 모르겠다...내 상상인가...지도교수님은 이제 정년퇴임 하셨을 테고 난 영구 수료생으로 남을 것이고…

일단 눈독 들인 책은 최근에 두툼하게 나온 ‘돌봄의 사회학’, 이거 하나 갖추면 뭔가 돌봄학 전문가 될 거 같은 기분, 그런데 너무 비싸고 두꺼워서 전자책 살까 하다가 일단 냅뒀다. 그냥 저장만 해두고 또 한 십년 지날 것 같아서… 중고서적 중에 돌봄의 윤리, 돌봄의 철학 관련 저자들의 책을 찾아 봤는데 번역된 것이 썩 많지는 않아 보였다.
‘돌봄: 정의의 심장’(대니얼 엥스터, 2017, 절판)
’보이지 않는 가슴‘ (낸시 폴브레, 2007, 아직 파네?!?!)
뭐 이게 다여? … 더 찾았던 거 같긴 한데 주제가 좀 안 맞는 번역서들만 있어서 제꼈다. 특히 돌봄 강조 오지게 하던 프레데리크 보름스 책이 궁금했는데, ’폭력 앞에 선 철학자들‘이라는 공저 하나, ’현대 프랑스 철학‘이라는 뭔가 대학교재로 썼을 것 같은 책 하나, 뭐 돌봄 이야기 안 나올 것 같아 보여서 일단 넘겼다. 폭력 뭐시기는 궁금하긴 함. 사르트르에서 데리다까지래… 이름만 봐도 어려운 걸…

전자도서관에서 ‘돌봄 선언’을 확인하고 이걸 먼저 빌려 읽기로 했다. 그야 말로 선언문이고 당위적 주장과 그 근거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일단 이 책을 읽고 나니 재밌자고 읽은 건 아니다만 분량 적은데도 엄청 더디 읽었고 읽는 동안 와 돌봄...중요하지 중요해 그런데 이제 관심이 식고 있다….뭐 그렇게 되어 겨우 꾸역꾸역 읽었다.

무섭고 슬픈 뉴스들을 전해 듣는다. 나는 어느 무렵부터 포털 뉴스 면을 자세히 안 보게 되었는데도 어쩌다보면 건너건너 사람들은 소식들을 잘도 물어오지. 병이 든 사람들, 그런데 누군가 계속 지켜봐주고 사랑해주고 일상으로 돌아오도록 돕는 사람이 없거나 병이 너무 심한 사람들은 결국 자기 자신이나 남을 공격하고 만다. 나는 그런 마음을 알아서 슬프다. 지금은 괜찮지만. 충분하지만. 그래도 불안하고 고통스러워서 병원에도 달려가 (내가 산업 진출에는 실패한) 현대약학의 힘을 빌지만.

내가 돌봐야 할 사람들도 생각한다. 혼자가 아니라서, 우리 아이들의 양육자는 셋이나 되서 그나마 다행인 것 같다. 나는 방임형, 권위주의형에 가깝고 애들이 다른 어른들 말을 안 들으면 그제사 이놈의 자식 이러고 쫓아가서 착한 어린이로 만드는 옛날 (그나마 쥐톨만큼이나 양육 관심 두는)아버지들 같은 역할을 하고 있구만…

육아, 병자 간호, 노인 부양, 가족과 친족의 몫처럼 여겨지던 돌봄 개념에서 더 확장해 이 책에서는 자신을 돌보는 일, 지역 사회, 글로벌 사회, 가족 이외의 연대를 통한 돌봄까지, ‘난잡한 돌봄’ 이라는 이름으로 돌봄의 의미를 확장하고 있었다.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으니 누가 곤란하면 일단 가서 돕고 오지랍 떨라는 것이지… 누구나 사랑받고 관심 받고 도움 받는게 필요하겠지만, 또 원치 않는 돌봄 시도는 또 침해가 될 수 있으니 이놈의 자유주의자 새끼는 그런 거 부터가 걱정이다. 그리고 그간 봐온 수많은 연대들은 바운더리 안의 사람들은 잘 챙기지만 그 바깥의 사람들한테는 또 똑같이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인 문제죠?’ 하는 걸 자주 봐왔다. 이 책은 그런 경계들을 국경, 전통적 핵가족을 비롯해서 느슨하게 벽이 아닌 그저 다름의 구획 정도로만 흐리게 하고 싶은 것 같은데...인간은 너무나도 귀신같이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을 구별하고, 차이점을 빌미로 배척하고, 쟤는 당해도 싸, 우린 그럴만 해, 뭐 그런 존재라서 인간을 되게 훌륭한 존재로 가정해야 가능할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이 자꾸만 들었다. 그리고 이 말 싫어하는 사람도 많을 것 같은데, 프리라이더는 어떻게 할지? 막 자기 애는 열심히 남한테 맡기고 볼일 보다가 정작 반대로 도움 요청하면 이런 저런 사정 대가며 거절하는 사람들까지 묵묵히 포용해야 하는지? 포용할 수 있는지? 그런데도 공적기관이나 시장에서 제공하는 돌봄들에 대해 마냥 비판적일 수 있을지…

수많은 아이들과 염려 많은 그 아이들의 부모들까지, 그리고 내가 만들어 놓은 아이들과 함께 사는 곁의 사람과 직계존속까지, 가깝게는 그렇게 전통적이고, 직업적인 범주의 돌봄을 나는 다시 시작할 시간을 맞이하기 직전이다. 그전에 나부터 돌봐야 할 것 같긴 해… 책도 제대로 못 읽고 엄청나게 산만해지고 소비중독은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아시발 또 졌다 자본주의새끼한테...를 시전하고 있으니… 운동을 하고, 내가 먹고 싶은 걸(그나마 살이 안찌고 건강한 쪽으로 도움될 듯한 걸) 먹고, 책은 근래엔 잘 못 읽고 사 쌓고 정리만 하고, 나가서 돌아다니며 걷고, 집에선 가끔 실내자전거랑 아령이랑 새로 영입된 케틀벨도 들었다 놓고, 1-2주에 한 번은 병원에 가고, (야 근데 이제 약이라도 먹어서 착해질라고 사람 시늉할라고 노력하는데도 강제로 일터에서 쫓겨날 수도 있겠더라...들키지 마!!!) 뭐 그런 것도 돌봄이겠죠. 손 한줌의 온라인 이웃들에게 댓글도 달고 대댓글도 달고 뭐 그런 것...우린 언제나 어딘가와 이어지길 원하는게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난 그 갈래가 확장되길 원치 않는 걸요? 좌파의 적인가요? 난 우리엄마 말대로 진짜 보수가 되고 있는 걸까요? 난 그냥 한 사람만 마주하는게 편하고 음성보다는 영상보다는 글로 마주하는게 편한 감각 예민쟁이일 뿐인데. 난 이제 어떤 집회에도 나가지 않기로 했고 어떤 공직 선출 투표에도 참여하지 않기로 했는데. 이런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그런데도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이니, 돌봄 책들이니, 한때는 미디어학이나 커뮤니케이션 이론에 관심 가졌던 거 보면 나는 이어지는 법을 제대로 몰라서 내 나름대로 책으로라도 사람 대하는 법을 익혀 인간 흉내를 내보려다 나가떨어진 걸까요?
일단은 이런 예민하고 불안한 나부터 잘 돌봐 보겠습니다…수신이 되야 평천하도 한다잖아...

+밑줄 긋기

-그들이 지적한 것처럼 옛 영어 caru의 의미 중에는 보살핌, 근심, 걱정, 슬픔, 애통, 괴로움이 포함되어 있는데 우리 시대와 공명하는 단어들이다. 돌봄은 우리 시대를 위한 희망의 정치를 계획하고 그에 생기를 불어넣으며 우리의 삶을 다른 사람들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한다.
— 주디스 버틀러


-셀프케어 산업은 돌봄을 자신을 위해 각자 개인적으로 돈을 주고 사야 하는 것으로 격하시켰다. 이런 것은 우리가 당면한 돌봄의 문제에 임시방편조차 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우리는 오랫동안 서로를, 특히 가난하고 취약한 이들을 돌보는 것에 실패했다.

-다름을 배려하고, 또는 더욱 확장된 형태의 돌봄을 개발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공간들이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잘 알려진 용어를 빌리자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무관심이 구조적 수준의 ‘평범함banality’에 젖어들고 있다.

-‘돌봄’은 사회적 역량이자, 복지와 번영하는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보살피는 사회적 활동이다. 무엇보다도 돌봄을 중심에 놓는다는 것은 우리의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y을 인지하고 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까지만 해도 국경은 국가를 구분해주는 물리적 표식에 불과했는데 오늘날에는 국경이 국가 내부까지 파고들어 일상의 면면에 점점 더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무관심한 국가
1980년대부터 국가의 수장들은—가장 악명 높은 이들로 영국의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와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이 있다—모든 종류의 돌봄은 개인적 문제이며 개인이 경쟁적 시장과 강력한 국가의 중추라고 여기게 몰아갔다. 그러한 추동은 자기관리로 위장한 억지 논리이며 선량하고 책임감 있는 시민에 대한 기만적 정의의 일환이었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이상적인 시민이란 자율적이고 기업가적이며 실패를 모르고 자급자족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들의 승승장구는 복지국가의 해체, 그리고 민주적 제도와 시민 참여의 와해를 정당화한다. 돌봄이 개인에게 달린 문제라는 생각은 우리의 상호취약성과 상호연결성을 인지하기를 거부하는 데서 비롯된다.



-최근에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특정 집단의 노인, 특히 노동자계층 여성 노인 사망률이 100년 내에 가장 높은 수준으로 치솟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영국에서는 자살률이 증가하고 있고, 제한적인 단기 치료를 위한 지원이 늘었음에도 정신건강 문제를 치료받기 위한 대기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는 한편, 필요한 돌봄을 받지 못하고 있는 노인이 150만 명이나 된다. 코로나바이러스에 떠밀려 현재 우파 정부가 이전 좌파 정부에서 그림만 그렸던 사회 지원들을 제공하고 있지만, 불공평한 대우와 결합한 심각한 불평등의 전통은 팬데믹이 가장 방치되고 소외되었던 사람들에게, 특히 노인, 여성, 흑인과 아시아인을 비롯한 소수 인종 집단, 빈곤층, 장애인 등에게 가장 큰 타격을 입히게 했다.

-영국 사회정책의 선구자인 리처드 티트머스Richard Titmuss는 누구나 받을 자격이 있는 보편적 복지혜택의 중요성을 주장하면서 모든 국민이 국가에 대해 동등한 지분이 있음을 보장했으며, 불평등을 ‘도덕적으로 옳지 않고 건강한 사회를 좀먹는 것’으로 판단했다. 인기 라디오 쇼에서 영국 심리학자 도널드 W. 위니콧Donald W. Winnicott은 아이에게 ‘보듬어주는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인간의 의존성을 부각했는데, 이 의견이 돌보는 복지국가에 대한 하나의 아이디어로 편입되어 어머니들에 대한 지원과 제대로 된 집과 복지서비스 제공으로 발전했다.

-왜 여성이 이 모든 돌봄 노동을 떠맡아야 하는가? 그리고 만일 도와줄 가족이 없다면 어떻게 되는가—가족에게 거부당하거나 가족을 거부한 사람들은? 사기업의 돌봄 서비스를 이용할 만한 돈이 없다면? 이러한 돌봄 체계는 결국 돌봄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방치하고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최악의 경우에는 필연적이지 않은 질병과 죽음을 불러온다. 오로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친족만을 돌보도록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는 ‘자기 것 돌보기’의 편집증적 형태를 초래하는데 이런 태도는 최근 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극우 포퓰리즘의 시발점이다.

-보편적 돌봄이란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모든 돌봄이 우리의 가정에서뿐 아니라 친족에서부터 공동체, 국가, 지구 전체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우선시되는 것을 의미한다.

-돌봄은 평등하게 배분되어야 한다. 비생산적인 일로도 여성의 일로도 치부되어서는 안 되고, 임금노동 영역에서 가난하거나 이민자이거나 유색인종인 여성들의 일로 떠맡겨져서는 안 된다. 목표는 사회 전체가 돌봄의 보람과 짐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글로벌 사우스: 대체로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등 남반구 지역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데, 글로벌 노스라고 칭하는 유럽과 북미 지역 선진국에 대칭되는 개념이다. 경제적 수준이 낮고 정치·문화적으로 주변화된 국가들을 가리킬 때 ‘개발도상국’이나 ‘제3세계’ 대신 쓰이는 용어다.(옮긴이 주)
-‘보편적 돌봄’ 개념을 홍보하고자 한다. 이는 돌봄을 삶의 모든 수준에서 우선시하며 중심에 놓고, 직접적인 대인 돌봄뿐 아니라 공동체를 유지하고 지구 자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종류의 돌봄에 대해 모두가 공동의 책임을 지는 사회적 이상을 말한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염려는 다른 모든 인간의 감정과 같이 변덕스럽고, 종종 다른 필요나 욕망, 또 개인적 만족감이나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 등의 정서적 상태와 부딪치거나 죄책감이나 수치심 같은 감정과 얽히기도 한다. 돌봄 노동에 대한 평가절하는 말할 것도 없고, 돌봄의 어려움, 특히 잘했는지, 제대로 했는지에 대한 불안은 돌봄 관계에서 분노와 공격적 태도를 쉽게 유발한다. 심지어 모범으로 신화화된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이것이 바로 로지카 파커Rozsika Parker가 유명한 저서 《둘로 찢긴 감정: 모성애의 양면성 경험Torn in Two: The Experience of Maternal Ambivalence》에 쓴 것처럼 어머니들이 자녀들에 대해 갖는 혼란스럽고 상충되는 감정들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페미니스트들이 강조한 이유다. 로지카 파커는 그러한 돌봄의 양면성을 인지하는 것 자체가 활력을 주고 마음을 재생시킨다고 본다.

-‘독립된 삶’은 우리가 모든 일을 혼자 하기를 원한다거나, 다른 사람은 필요로 하지 않는다거나, 고립되어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독립된 삶은 비장애인 형제자매, 이웃, 친구들이 당연시하는 선택과 통제권을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동등하게 갖기를 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소수자들은 ‘게이 동네’로 이사 가서 그들의 돌봄에 대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친구나 연인과 함께 살면서 가족 같은 관계를 만들었다. 이는 필요에 의한 것이었지만 돌봄과 친밀함의 관계를 법으로 규정된 이성애 관계를 넘어선 범주로 확장하려는 급진적인 게이해방운동의 일부로 옹호되었다.
20세기 후반,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사회운동의 영향으로 사회가 ‘탈脫전통화’되면서 대안 친족 구조가 딱히 자신들을 급진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생활에까지 퍼졌다.

-인간, 비인간을 막론하고 모든 생명체 간 이루어지는 모든 형태의 돌봄이 필요와 지속가능성에 따라 공평하게 그 가치를 인정받고 사용되어야 한다. 이것을 우리는 난잡한 돌봄의 윤리라고 부른다.

-난잡함이란 더 많은 돌봄을 실천하고 또 현재 기준에서는 실험적이고 확장적인 방법으로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너무 많은 돌봄 요구를 너무 오랫동안 ‘시장’과 ‘가족’에 의존해 해결해왔다. 우리는 그 의미의 범주가 훨씬 넓은 돌봄 개념을 만들 필요가 있다.

-난잡한 돌봄은 모든 여성이 어머니가 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는(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떠나) 것을 인지하고 자신의 아이들이 아닌 아이들을 돌보는 것, 지역 공동체를 돌보는 것, 환경을 돌보는 것이 동등하게 가치 있는 일로서 적절한 자원과 보상이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지한다. 난잡한 돌봄은 이민자와 난민을 돌보는 것이 자국민을 돌보는 것과 똑같이 중요한 일이라고 주장하고, 미국 국경에서 부모로부터 강제로 분리되어 난민수용소에 격리된 아이들의 운명에 대해 우리의 가족과 같이 생각하고 염려해야 한다고 다그친다. 난잡한 돌봄은 어머니나 여성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돌봄 역량을 가지고 있고, 서로 함께 돌봄을 실천할 때 우리의 삶이 향상된다는 것을 인지한다.
-강력한 공동체 모델로서 지역 도서관은 소중히 여겨지고 발전되어야 한다. 우리는 또 도서관을 책에 국한하지 않고 더 많은 ‘사물 도서관’을 만들고 재사용과 재분배의 다른 형식들을 발전시킬 수 있다. 기후재앙이 눈앞에 닥친 시대에 전동 드릴이든 비싼 아이 장난감이든 또는 와플 메이커든 간에 일 년에 몇 번 쓰지 않을 물건을 사는 것은 지나친 낭비다

-자원을 공유하는 것은 함께 일하며 살아가도록 한다. 자원이 평등하게 사용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배제되고 소외된다. 공유하기 위해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보다는 덜 분명해보이긴 해도 역으로 공유하는 것도 공동체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

-돌봄 인프라는 또 임금노동 시간의 단축을 포함하는데, 이는 사람들이 가족 내에서나 다른 돌봄이 필요한 환경에서 돌봄 역량을 확장하도록 적절한 시간과 자원을 허용한다.

-가장 좋은 직접적인 대인 돌봄은 서두르지 않고 관계의 지속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돌봄을 받는 사람이 가진 역량을 주체적 능력과 웰빙을 계발하는 데 최대한 사용할 수 있도록 여러 요소를 고려하는 것이고, 이는 시간이 요구되는 일이다.

-주4일제 캠페인을 통해 호응을 얻고 있는 노동시간 단축이 돌봄에 대해 교육하고 돌봄 역량을 확장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데 핵심인 이유다. 이는 동시에 돌봄의 제공 또는 돌봄 요구의 필수요소인 민주적 논의에의 쌍방 참여를 증진한다.

-시장은 돌봄의 책무와 제공을 구매력에 근거하여 배분할 뿐이다. 자본이 많은 사람이 늘 승자다. ‘패자’들은 시장을 이용하는 데 한계가 있고 특히 가족이나 공동체 안에서도 돌봄 제공을 받는 데 제약이 있다. 시장이 중재하는 돌봄 서비스 분배는 기존의 소득 불평등과 돌봄 부족을 반영할 뿐 아니라 심각하게 악화시킨다. 고소득자들은 질 좋은 교육에서부터 주거시설에 이르기까지 돌봄에 대한 필요를 충족시키고 ‘인적 자원’이라고 여겨지는 것에 대한 투자의 선순환을 일으킨다.

-“너희는 우리를 묻어버리려고 했지/ 그러나 너희는 우리가 씨앗이었다는 것을 잊었지!”

-즉 팬데믹은 우리의 삶이 지속되는 데 결정적인 필수 기능들을 극적으로 또 비극적으로 조명했다. 간호사, 의사, 택배기사들과 쓰레기 수거 노동자들의 노동을 말이다.
-센이 1980년대에 영향력 있는 ‘잠재가능성 접근Capability Approach’ 이론을 개발한 것도 바로 WIDER에서였다. 이 이론은 ‘빈곤’을 좋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잠재가능성의 상실이라는 의미로 재규정하고, ‘발전’이라는 개념을 경제를 넘어 사람들이 어디서 살든 사회생활에 참여할 수 있는 잠재가능성을 확장하는 것으로 폭넓게 정의했다.

-레베카 솔닛Rebecca Solnit이 언급했듯이 ‘모든 저항운동은 세상의 균형을 바꾸거나’ 그럴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어떤 한 곳에서 발생한 저항의 양식이 억압을 받는다 해도 지리적 경계를 뛰어넘어 다른 지역에서, 심지어 지구 반대편에서 또 다른 형식으로 싹을 틔울 수 있다.
-우리 모두 필연적으로 타인에 대해 양면성을, 심지어는 공격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은 특히 가장 멀리 떨어진, 모르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사실이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양면성이 종종 억제되긴 하지만 마찬가지일 수 있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에 의하면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일단 복잡한 갈등 관계에 함께 얽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그 강력한 결과와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취약성과 상호의존성을 아울러 인식하면—우리가 지구적 차원에서 새로운 돌봄에 대한 상상을 발전시킬 수 있는 이유다.

-세계시민이 된다는 것은 낯섦과 마주했을 때 편안함을 느끼고,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 어떤 종류의 다름과 마주치든 간에 우리는 다름과 공존할 수밖에 없음을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돌봄 선언》은 우리가 많은 돌봄 요구를 너무 오랫동안 ‘시장’과 ‘가족’에 의존해 해결해왔다고 지적하면서 “그 의미의 범주가 훨씬 넓은 돌봄의 개념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생각해보면 많은 경우 돌봄이 그 자체가 아닌 다른 감정들의 일부 또는 확장처럼 취급되는 것이 사실이다. 돌봄이 사랑, 효, 모·부성애 등의 개념과 결합되어 부당하게 그 방법과 내용이 정해지고 제한된다. 사회적으로 구분된 관계가 그 관계를 규정하는 감정으로 본질화되고 돌봄이 그 감정의 한 면으로 일축된 경우가 많다.
(역자 해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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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25-02-18 0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우리말을 늘 안 쳐다보기 일쑤입니다. ‘돌봄노동’이라는 이름은 허울은 될 테지만, 말다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돌보다’는 ‘일 아닌 살림’이거든요. 아스라이 먼 옛날 옛적부터 ‘돌보다·돌보다’는 ‘일도 짐도 아닌 살림’인데, ‘사랑으로 짓는 살림’입니다.

‘돌보다 = 돌아보다’입니다. ‘돌아보다’를 줄여서 ‘돌보다’입니다. ‘돌아보다’란 “동글게 동그라미를 그리듯 모가 하나도 없이 오롯이 다 보다”를 뜻합니다. 손부터 뻗기 앞서, 눈으로 차분하고 참하고 차근차근 보노라면 어느새 어느 곳에 어떻게 손을 대면서 추스르고 가다듬을는지 스스로 알아보게 마련입니다.

‘돌보다·돌아보다’를 할 줄 아는 사이라서 ‘동무’이고, 이렇게 어울리는 사람이기에 ‘두레’를 이루는‘둘’입니다.

누구나 보금자리라고 하는 집에서 아이어른으로서 돌아보고 동무로 어울리고 두레로 일을 하는 둘(어버이·어른 + 아이)인 터라, 이 둘은 ‘너 + 나 = 우리’로 맞닿습니다. ‘너나우리’일 적에는 “다르면서 하나인 우리”이고, 이를 줄여서 ‘하늘(한울 : 하나인 울타리)’라 합니다.

반유행열반인 2025-02-18 17:11   좋아요 0 | URL
그런 허울들 벗어나려는 노력으로 저 운동하시는 분들도 돌봄 뜻을 더 넓히는데 힘쓰고 계시더라구요 ㅎㅎ

2025-02-18 0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18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18 0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18 17: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19 21: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20 0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20 0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