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상과 거울 아침달 시집 35
양안다 지음 / 아침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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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0 양안다.

해일이 오면 우리 온몸으로 받아낼 수 있을까. (‘악보가 육체라면, 음악이 영혼이라면’ 중)

첫번째로 좋아하는 시인이 황인찬이고 두번째가 양안다라고 했는데, 이 시집을 읽는 동안 회의를 느꼈다. 미안해 안다야 너 쫓겨날 것 같아. 전에 읽은 두 시집 ’천사를 거부하는 우울한 연인에게‘랑 ’작은 미래의 책‘은 뭔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느낌은 있네, 였는데 이번 두툼한 이 시집은 뭔말인지도 모르겠고 잘 느끼지도 못했다. 시집의 구성은 조금 독특했다. 앞부터 시가 좌르르륵 나오고 중간에 꺼꾸로해도 자낙스라는 거울이 있고 대칭으로, 앞부분과 역순으로 같은 제목의 시들이 또 이어진다. 시집 구성은 재밌지만 시는 절반 넘어가도록 건지지 못해서 또 초조했다.

그러다가 시선집 ’가장 아름다운 괴물이 저 자신을 괴롭힌다‘가 눈에 들어와서 펼쳤다. 최승자가 옮긴 머레이 시랑, 미야자와 겐지 시랑, 이거저거 아무거나 펼치고 읽어도 세상에, 다 좋잖아. 그러니까 시를 읽는 내 눈깔이 내 뇌가 삐꾸인 게 아니고 시는 좋은 걸 잘 옮긴 걸 잘 골라서 읽어야 괴롭지 않겠구나… 시선집은 너무 좋아서 그만, 아껴 읽어야지 하고 덮어버림…그러고나서 양안다 시집 남은 걸 후다닥 읽어 치워버렸다. ㅋㅋㅋㅋㅋㅋ안다야 미안해.

12월이니까 12월이라는 시 두 편만 베껴 놔야 겠다.

-옷장은 닫혀 있었다. 창문도 닫혀 있었다. 거실에서 눈이 내리지 않았다. 암막 커튼은 물결치고 밤의 진폭을 증가시켰다. 올해가 끝나가고 있구나. 창밖에는 사람들이 연말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어린아이가 부모의 손을 잡고 시간에 대해 배울 것이다. 밤은 빛을 사랑할 것이다. 어느 연인은 귓속말로 밀담을 나눌 것이다. 세상 모든 비밀이 폭로될 것이다. 세계는 유지될 것이다. 무질서를 사랑할 것이다. 떠돌이 개는 배를 불릴 것이다. 옷장은 닫혀 있었다. 거울은 닫힌 옷장을 향해 있었다. 오래 살기로 약속. 꼭. 그날은 눈이 내렸다. 12월에는 눈이 무척 느리게 내리는 것 같아. 너도 그래? 그래. 그랬던 것 같다. 필름은 온전히 손상되지 않았다. 표정이 기억나지 않았다. 목도리는 무슨 색이었더라. 장갑을 끼고 있었던가. 아니. 언 손을 맞잡고 있었다. 코트에 단추가 몇 개 있었떠라. 그런데 목소리는? 나는 눈빛을 사랑했지만 옷장은 닫혀 있구나. 귀가 멀어버렸구나. 전야제가 있을 것이다. 캐럴이 들릴 것이다. 나는 그것을 찬송가와 헷갈리곤 했다. 종교를 가져본 적 있어? 아니. 그러나 그때 눈빛에 매혹된 이후로 종교를 이해할 수 있었다. 밤새도록 허름한 기도가 계속될 것이다. 소원과 속죄가 반복될 것이다. 세계는 유지될 것이다. 그때 나는 언 손을 맞잡고 설원에 가고 싶었다. 끝도 없는 설원을 함께 기록하고 싶었다. 그런데 정말…...창문은 닫혀 있던 걸까? 나는 암막 커튼을 걷었다. 거실에서 눈이 내리지 않았다. 머릿속은 이미 눈보라. 익사할 것이다. (‘12월’ 전문)

-갑작스러운 날이었습니다. 아침이
잠들어 있는 동안 마당에는 새들이 한바탕 죽어 있었지.
창문은 입김을 잃고
머리채 흔들며 미치는 건 눈보라였습니까? 보세요. 얼어붙은 영혼이
너에게 손 내미는 것을. 내가 겨울을 시기하는 것이
당신을 절벽으로 몰아붙인다…...
-증상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재해는 늘 뜻밖의 일이었으니까요.
창문 바깥에
가득 차 있는 건 겨울의 매혹이었을지도.
예기치 않은 날씨 변화에 압도되는 건 너였다. 내가 작은 우산을 쥐고
죽은 새의 내장을 헤집는 동안…...이런 추위가 나를 못 견디게 해. 나의 증상이 너를 못 견디게 하는 것처럼.
들었습니까? 박제된
프리지어의 목소리를…... “추위에 매료되는 동안
약간의 현기증을 겪곤 해요.” 그러나 떠돌이 개들은
여전히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얼어붙은 영혼이 내민 손을 잡은 건
우리가 아니라 죽기 직전의 새들이었다. (‘12월’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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