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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8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평점 :
-20241122 라우라 에스키벨.
이 책 읽기를 더 미룰 수 없게된 건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북플 마니아에 라우라 에스키벨이 떠 있어서였다. 아 이게 누군데... 나 왜 마니아… 보니까 가장 가까이 높다란 책장 위에 꽂혀 나 얇은데? 금방 볼 건데? 하고 내려다보는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의 작가였다. 열두 달 마다 레시피 하나씩, 너네는 한 번도 안 먹어봤을 중남미 요리로다가, 그렇게 풀어나가는 이야기였다. 식욕이랑 성욕이랑 버무리면 누구 하나라도 걸리지 않겠냐, 이런 치트키를 뿅뿅 써가지고 유쾌하게 써 내려간 소설이었다.
누구나 사랑하고 사랑 받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건 이성애건 동성애건 범성애건 성애적 형태로 충족될 수도 있고, 아 난 에이섹슈얼, 그레이섹슈얼이라 그냥 로맨틱만 원해, 아니 다 됐고 난 얼큰한 국밥 한 그릇 뚝딱이면 그만이다, 거기에 알코올 추가요, 하고 만족할 수도 있다. 그런데 국밥 필요한 사람한테 자꾸 달라는 국밥은 안주고 배고픈데 주방에선 조리사님이 윙크만 오지게 보내거나, 밥은 됐고요 빨리 라면이나 한 사발 뚝딱하고 그냥 푸지게 더 안고 뒹굴고 싶은데요 하는 사람한테 만한전석을 차려준다고 행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소설 속에서는 가장 가까운 존재인 가족이 그렇게 엉뚱한 것만 허락하고 정말 원하는 걸 자꾸 안된다고 해서 내내 불행해질 뻔하다가 순간이나마, 혹은 늦게나마 원하던 걸 찾아가는 이야기가 펼쳐졌다. 엄마는 자기 몸종하라고 연애도 결혼도 못하게 해… 언니는 내가 좋아하는 남자랑 결혼해… 그런데 왜 이새끼 저새끼 군인새끼들 밥까지 이 언니들이 다 해먹여야 해...짜장면 시켜 먹어 새끼들아…
어느 책에선가 누군가에게 음식을 만들어 먹이면 옥시토신이었나 하여간에 행복해지는 호르몬이 듬뿍 나온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들은 행복해지려고 자꾸 우리를 먹이려 드시는 거였어… 효도하려면 아 내가 알아서 먹는다고! 를 자제하자… 가끔 먹고 맛있다고 엄지척해드리자… 나는 하도 잘 안 처먹어서 이렇게 불효자는 웁니다…
아무리 봐도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그나마 덜 빻고 지적이고 다정하고 사람이 된 놈이다, 싶은 게 존 박사 밖에 없었는데, 티타는 몸과 마음이 이끄는대로, 존 하고는 그냥 사돈댁하기로 하고 처음 사랑인 페드로와 불을 태운다. 그의 나이 향년 39세. 나랑 동갑이군요. 사실 나이 제도가 바뀌어서 어쩌다보니 나는 세상에서 가장 긴 39세를 보낸 기분이다. 구 한국나이 39세는 22년도였는데 만나이 39세는 아직도여서 이제 올해 12월 중순이나 되어야 드디어 앞자리가 바뀐다요… 나이랑 몸무게랑 페어링하는 시대가 오겠군요! 하여간에 20년 간 조카 키우느라 참아둔 사랑을 티타는 진짜 활활 태워버리고 만다. 누가 진짜 불장난 하랬어… 엄마 쟤 성냥 먹어…
그냥저냥 재밌게 읽을 정도는 되었다. 그런데 마지막 약력에서 작가가 ’백년의 고독‘ 영화화 준비 중인 소식 보고는 개봉 하긴 했냐? 언감생심이네… 중남미라고 적당히 묻어가면 되겠나… 그 정도는 아니예요… 리얼적 마술리즘 노리는 할배가 저기 중국에 옌롄커라고 있는데… 할매도 할배도 적당히 빻은 건 닮았지만 더 이상은 좀 오바에요… 하고서 나는 백년의 고독이 다시 읽고 싶어졌다. 그리고 음식이 잔뜩 나오는데 하나도 모르는 음식이라 전혀 자극되지 않는 식욕… 이렇게 저렇게 허풍치며 섹스들 하는데 그냥 적당히 흐뭇한 광경일 뿐 딱히 야하지는 않았고요… 너무 매운맛만 좋아하는 어른이라 송구합니다….
+밑줄 긋기
-“아시다시피 우리 몸 안에도 인을 생산할 수 있는 물질이 있어요. 그보다 더한 것도 있죠.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걸 알려드릴까요? 우리 할머니는 아주 재미있는 이론을 가지고 계셨어요. 우리 모두 몸 안에 성냥갑 하나씩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혼자서는 그 성냥에 불을 당길 수 없다고 하셨죠. 방금 한 실험에서처럼 산소와 촛불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산소는 사랑하는 사람의 입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촛불은 펑 하고 성냥불을 일으켜줄 수 있는 음식이나 음악, 애무, 언어, 소리가 되겠지요. 잠시 동안 우리는 그 강렬한 느낌에 현혹됩니다. 우리 몸 안에서는 따듯한 열기가 피어오르지요. 이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사라지지만 나중에 다시 그 불길을 되살릴 수 있는 또 다른 폭발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각자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불곷을 일으켜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야만 합니다. 그 불꽃이 일면서 생기는 연소 작용이 영혼을 살찌우지요. 다시 말해 불꽃은 영혼의 양식인 것입니다. 자신의 불씨를 지펴줄 뭔가를 제때 찾아내지 못하면 성냥갑이 축축해져서 한 개비의 불도 지필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영혼은 육체에서 달아나 자신을 살찌워 줄 양식을 찾아 홀로 칠흑같이 어두운 곳을 헤매게 됩니다. 남겨두고 온 차갑고 힘없는 육체만이 그 양식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말입니다.”
아! 얼마나 맞는 말인가! 티타는 그 누구보다도 그 말에 공감했다.
티타는 불행히도 자신의 성냥이 이미 축축해져서 곰팡이가 가득 슬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이제 다시는 그 누구도 불을 지필 수 없었다.
더 안타까운 것은 무엇이 자신의 불씨를 일으켜줄 수 있는지 알고 있는데도 성냥에 불이 붙으려고 할 때마다 불이 가차 없이 꺼져버린다는 거였다.
존이 티타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차가운 입김을 가진 사람들에게서는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가장 강렬한 불길이 꺼질 수 있으니까요. 그 결과는 우리도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런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그 입김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가 훨씬 더 수월하답니다.”
존은 양손으로 티타의 한쪽 손을 감싸며 간단히 덧붙였다.
“축축해진 성냥갑을 말릴 수 있는 방법은 아주 많이 있어요. 그러니 안심하세요.” (124-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