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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몫
장성욱 지음 / 득수 / 2024년 10월
평점 :
-20241118 장성욱.
많은 일을 오래도록 잘 담아두고 잘 떠올린다고 자부해왔지만, 사실 더 많은 것들이 흐릿하고 아득하다 못해 새까맣게 없어진 듯하다. 예를 들면 이런 것:
오래도록 왕래가 없던 친구가 있었다. 거의 십여년을. 왜 멀어졌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그무렵 미안하다는 말을 잔뜩 적어 그 친구에게 보낸 마지막 메일이 보낸메일함에 남아있었다. 미안할 일이 무엇인지는 함께 적혀 있지 않아 무슨 무례를 혹은 잘못을 저지른 건지는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어디가서 기억력 좋다고 하지 말아야겠다.
나는 미련이 많고 이미 지나가 더 이상 내 인생에 없는 사람들에 관해 자주 검색해 보는 사람이기 때문에, (섬뜩해하진 마시라...해치진 않아요…) 몇 년 전에 한 것처럼 또 우연히 떠오른 친구 이름을 검색창에 적었다.
10대 후반부터 몇 시간이고 채팅방에서 수다를 떨고, 20대 초반에는 샛노랗게 머리 염색을 하고 소설가가 되겠다고 열심히 자기가 끄적인 걸 동호회 게시판이나 자기가 운영하는 카페에 올리던 친구는, 한두해 전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정말로 소설가가 되어 있었다. 메신저에 적어넣은 옛아이디는 그대로였고, 축하의 말을 건네고, 근데 그때 우리가 무슨 일로 연락을 안 하게 되었더라? 나도 모르지. 그렇게 엊그제 떠들다 만 애들처럼 또 이런저런 수다를 떨고, 남의 흉도 보고, 그런 세월이 또 한 칠년 지난 것 같다.
사람이 어떻게 그리 쉽게 잊는가, 예전엔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잘 잊는다. ‘우리는 왜 잊어야 할까’라는 책에서 그래야 우리는 더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조금이라도 덜 불행하려면 그래야 한다는 걸 알았다. 당장 3년 수능 공부해보니 방금 문제풀이 들은 강의인데, 내가 바로 따라 풀어보려고 하면 하나도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ㅋㅋㅋ 너무 많은 경험과 지식이 들어와도 머리는 과부하가 일어나니까 알아서 이전의 것들이 정리되기도 한다.
쉽게 잊고 쉽게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더 행복해 보이긴 한다. 반대로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무언가를 안고서 오래도록 고통받고 마침내 붕괴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 이야기를 하나 더 보게 되었다. ’올드보이‘가 그랬고 ’구타유발자들’이 그랬는데, 이번에는 학교폭력에 관한 이야기였다.
학교폭력이라면 나에게도 남은 상흔이 많다. 학생 입장 보다는 교사의 관점이지만, 초임부터 그랬다. 발령 삼일째, 반의 아이가 다른 반 폭력적인 아이에게 배를 심하게 두들겨 맞았다고 했다. 나는 너무 무섭고 속상해서 참지 못하고 이야기를 마친 아이 앞에서 펑펑 울었고, 생활지도부에 신고를 하고, 아이가 집에 돌아가는 길에 때린 아이를 마주칠까 봐 걱정이 되어 집앞까지 그 아이를 바래다 주었다. 몇 달 후 그 맞았던 아이는 같은 반 아이를 오래도록 괴롭히고, 게임 셔틀을 시키고, 돈과 게임 아이템을 빼앗고, 상처가 눈에 띄지 않도록 얼굴 팔다리를 제외한 배와 몸통 부분을 집중적으로 주먹질해 멍투성이를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강제전학을 가게 되었다. 아이들의 학습능력인지, 본성인지, 맞던 아이는 쉽게 때리는 아이가 되어 더 잔혹하고 무감각하게 파괴를 전염시키는 걸 일찌감치 보고 말았다. 이게 마지막이라면 좋았겠지만, 이후에도 여기 적기조차 끔찍한 수많은 폭력 사건을 담임으로, 생활지도부 사안 담당으로, 학년부 생활지도 담당으로 맡으면서, 나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어린 존재들도, 부모도, 동료 선생들도, 관리자들도, 인간은 그저 비겁하고 조그만 힘이라도 가지면 남을 지배하고 억압하려 들고 또 쉽게 부서지고 만다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작은 조직이 낫지 싶어 전직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또 돌아가면 이미 아는 걸 또 반복해서 확인하고 무너져야 겠지. 시발 거리고 주먹을 쥐고 나에게 다가오는 무서운 눈빛의 아이들. 킬킬대고 웃으며 할카스가 뭐에요? 000아세요? 빙 둘러싼 욕망 덩어리들의 성희롱. 비자발적으로 모아둔 집단에서는 그렇게 쉽게 맛이 간 짓거리들이 벌어진다...
이 이야기는 현실이라면 어쩌면 비극이 아닐 수도 있었다. 학교 폭력 피해자이면서도 학교를 떠나야 했던 박선용은 리본500으로 거듭나 세계 최고의 프로게이머가 되었다. 어려운 환경을 딛고 잘 자란 듯 보이는 사람을 다른 사람들은 대견해하고 그 성취를 더 높이 사며 칭찬하고 호감을 갖는다. (나는 그게 뭔지 잘 알아…) 그렇지만 그런 성취와 별개로 이미 허물어지고 망가진 어딘가는 쉽게 복구되지 않는다. 하물며, 그렇게 나를 무너뜨린 누군가가 나에게 저지른 일과, 나라는 존재 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 평온한 삶을 누리고 있는 걸 알게 된다면 지금의 내가 아무리 잘 되었던들 그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그럴 수 없었던 사람의 고통스러운 이야기가 생생하게 다가왔다. 읽는 내내 온통 슬펐다. 장편이지만 페이지가 금세 넘어갔다. 참담한 결말이지만 몰랐다고 죄가 죄 아닐 수 없는 비극은 오이디푸스 이후로 진리 아니냐…
우리는 저마다 소소한 잘못을 저지르고 남에게 알게 모르게 상처주며 살아간다. 몇몇은 곱씹고 이불을 차며 후회하고 반성하지만 몇몇은 그냥 잊어버린다. 그냥. 거대한 역사적 폭력과 그로 인한 아픔과 고통을 생생하게 재현하는 사람조차 자신이 일상의 폭력이 되어 새로 배우는 미래 창작자의 작품을 함께 다뤄볼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 거부하고 무엇이 문제인지 알 기회도 가르침도 져버리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다. 아마 본인은 그런 일을 기억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세상은 그냥 그렇다. 거기에 똑같이 주먹질, 발길질과 담뱃불을 들이대는 것을 빼면, 뭘 할 수 있나? 그냥 계속 쓰는 것? 그들과 똑같이 되지 않기 위해 묻어두고 잊어주는 것? 사필귀정, 하면서 여기저기 알려서 내 대신 남들이 알아서 놀이처럼 마녀사냥하고 린치하게 만드는 것? 나는 답을 찾지 못했다. 무너진 사람들 스스로 찾을 수 밖에 없다는 생각조차 나는 그저 가혹하게 여겨졌다.
+밑줄 긋기
-“당신이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불쾌한 사실을 굳이 사람들에게 상기시켜서 그렇습니다. 그걸 괘씸죄라고 하죠. 우리는 발밑에 하수구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그걸 굳이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하지는 않잖아요.“(…)
”사람들은 당신이 형을 괴롭혀서 그렇게 화가 난 게 아니에요. 그건 그저 계기일 뿐이죠. 당신은 잘생긴 외모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고, 탤런트인 어머니의 재력을 이용해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지도 않았죠. 더해서 지금도 이상적인 삶을 살고 있고. 쉽게 말해 그런 잘못을 하고도 당신의 인생에는 단 한 번의 페널티도 없었다는 사실에 화가 난 겁니다.“
그런 이유에서라면 도저히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였다. 어쩌면 엄마의 말대로 그저 잊히기를 기다리는 편이 나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남들이 보는 저일 뿐이잖아요.“
”지금 그런 게 중요합니까?“
매니저가 되물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진짜 어떤 사람이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나니 영빈은 그동안 믿어왔던 스스로의 어떤 부분이 허물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186-187)
-그럼에도 너의 얼굴에서는 잠든 사람에게 쉽게 볼 수 있는 방심을 찾을 수 없다. 입을 벌린 채 침을 흘리거나, 눈이 반쯤 뜨여 있거나 혹은 그 흔한 잠꼬대나 코골이조차. 공들여 깎은 조각상처럼 무척이나 평온하고, 아름답다. 보고 있기만 해도 어디선가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들려올 듯한 모습이다. 나는 그게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토록 아름다운 네가 무엇이 부족해서 나한테 그런 짓을 했을까. (20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