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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많은 여름이
김연수 지음 / 레제 / 2023년 6월
평점 :
-20231027 김연수.
올해 벚꽃은 전보다 빠르게 피고 졌다. 마을버스가 골목을 벗어나 대로를 달리던 3월 30일, 차도를 따라 하얀 꽃송이와 꽃망울을 달고 늘어선 벚나무를 보며 내가 이 길을 보라고 돌부리가 발을 꺾었나 보다 싶었다.
내가 본 마지막 벚꽃이다. 아픈 발목을 끌고 마을버스 경로에서 가장 가까운 병원에 가는 길이었고, 벚꽃 다 지도록 나는 바깥에 나가지 못했다.
발목 부상과 인대 파열, 다리 부종, 심부정맥혈전증, 폐색전증, 응급실과 입원, 올해 수능 포기, 골반불균형과 허리 통증. 키워드처럼 그 봄 이후 겪은 사실들을 나열해 보면 객관적으로는 ‘망했네’ 싶은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실제로 망했네의 시간은 딱 일 년 전 이맘쯤인 작년 수능 전부터 이어졌고…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공부를 아예 놓은 건 여름 두 달 남짓이었고, 책을 원껏 읽었다. 아마 그 기간에 읽은 책이 작년 한 해 읽은 책보다 많을 것이다. 두 달은 아직도 기본 못 갖춘 수험생이 올해 볼 수능에는 치명적인 시간이었지만 쫄보라서 7월을 넘기기도 전에 최소량이나마 조금씩 문제를 풀고 강의도 들었다. 유예된 시간은 차라리 조금 더 마음 편하게 (그지 같고 지독한 수능이라는) 취미생활을 견디게 해 준 것 같다. 올해 수능 쉽다는데 이거 조졌으면 더 마음 아팠을 거 아냐…
6월부터는 실내 자전거 싱싱 달리며 운동도 꾸준히 하고, 그렇게 석달 타다 중간에 잘못 탄 결과 허리를 조졌다. 물리 치료 받으러 다니면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다쳤던 바로 그 지점(공포의 사자암)은 안 가 보았지만 인근 산책로를 따라 다시 산에도 오르고 어제는 아주 오랜만에 국사봉 꼭대기에도 갔다. 정상은 정비 공사 한다고 접근금지 테이프로 다 막아 놨음… 뭐 어때 어쨌거나 등산로 입구부터 정상까지 10분 컷 할 만큼 발목은 이제 다 나았고 숨 많이 안 찬 거보니 (아직 약은 한 달치 남았지만) 폐동맥도 아마 다 나았고 허리도 아프지만 그 정도는 견딜 수준인 것이다.
9월부터 조금 오래 김연수 짧은소설집을 읽었다. 재독이 드문데 수능 직후 늦가을에 읽고 웃기지 마!!! 힘내라고 하지 마!!! 했던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늦겨울에 또 읽었었다. 짧은소설집도 그 소설집의 연장처럼 느껴졌다. ‘두번째 밤’이란 소설 보면서 김연수는 우는 노인이 되기로 작정한 모양이구나, 했다. 너무 짧은 이야기가 이어지니까 한 번에 통으로 읽기는 그래서, 디저트, 입가심, 브레스민트처럼 다른 책들 보는 틈틈이 한 편에서 몇 편씩 읽고 잤다.
희망을 버리지 말란 말보다는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내. 가 나은 것 같고 그보다는 힘내지 마. 그게 더 나은 것도 같고. 청개구리는 진짜 큰일났다.
바로 앞 문장들은 책 읽던 초반에 내가 써 놓은 건데… 엘리베이터 탔는데 18층의 어린이들이 자기 엄마한테 ‘나 청개구리 키우고 싶은데’ 했다. 나는 우리집엔 있는데 청개구리...얘, 하고 같이 타고 있던 작은어린이를 가리켰고 작은어린이는 아니라고 펄펄 뛰었다. 사실 우리집 대마왕 청개구리는 나야 나.
웃으면서 힘들어하는 이에게 “희망을 버려.(생글생글)” “힘내지 마.(싱긋)” 누가 나한테 해 준 적이 없어서 어떤 기분일지 모르겠다. 천하의망할사이코패스 같으려나 오히려 나으려나…
마지막 소설이자 표제작 ’너무나 많은 여름이‘에서 수련이 피었는지 궁금해서 물가로 가는 이야기를 보고 조금 놀랐다. 8월에 칠조어론 4권 보던 내가 갑자기 연꽃이 보고 싶어서, 연꽃, 있을까? 하고 보라매공원에 나갔던 날이 생각났다. 읽지는 않았지만 이 책이 먼저 나와 있었으니까. 항상 뒤늦게 읽고 쓸 때마다 내 삶은 이미 서가의 온 책들에 수만 조각으로 흩어진 채 쓰여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나는 여기저기서 훔쳐낸 복제품, 조각보, 인용 겁나 달린 네 논문, 이미 그렇게 살다 죽은 자들의 남은 망령, 파편, 토막꿈. 그럼 뭐 어쩔 거야…
소설집 말미에는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영문 모를 전쟁 속에서도 살아 남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가 아니고, 독일가문비나무를 바라보는 노인이 된 자신을 그려 놓았다. 화자도 소설가니까 그냥 소설가 자신의 오랜 뒤의 어떤 한 미래라고 봐도 무방하겠다.작년 이맘 때쯤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 남짓 사이에서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마킹하던 나는 이미 잘 지나온 과거로 다시 돌아와 망한 과거를 다시 시뮬레이션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내가 올해는 봄과 가을의 등산로에서, 입원실에서, 물리치료실에서 노인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평범하고 흔한 노년을 또 미리, 아니면 너무 일찍 체험했던 것도 같다. 젊은이들에게 다 살게 되어 있다, 하는 마음이라면 오랜 뒤의 다 내려놓은 노인 보여주는 게 그닥 큰 도움은 안 될 것 같다. 챙길 아이도 겪을 노화도 없는 세계에서 친구들과 해맑게 이거저거 먹고 노는 젊은이들 사진을 블로그에서 가끔 보는데, 후...니들은 이런 거 피우지 마라…(가을산에 모닥불 말이다…) 미래도 과거도 돌아보지 말고 현재 즐거우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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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까지는 모르겠고 아직 여러 번의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남은 건 알겠다. 가장 가까이에 가을이 있고 또 겨울이 오고 있다. 그럭저럭 잘 지낼 계절들이다.
+밑줄 긋기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흐른 지금, 나는 이십대 초반의 나에게 괜찮다고, 그렇게 바뀌어가고, 마음이 무너져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34)
-별 노력 없이, 수월하게. 그럴 때 걷기는 사랑과 닮아 있다. 애쓰거나 노력하지 않아도 술술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 (254, 나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아서 옮겨 왔다. 사랑을 술술해왔다면 당신은 날로 처먹는 인생을 살아왔을지도 모르겠다고. 아니면 다들 술술 쉬운데 나만 어려웠을까? 애쓰거나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사랑은 없다. 걷기도 다치지 않고 바르게 계속 나아가려면 술술은 아니지...)
-수련은 피었을까? 질문이 나를 거기까지 데려갔고, 그 풍경을 보는 순간 질문은 사라졌다. (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