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허벅지 다나베 세이코 에세이 선집 1
다나베 세이코 지음, 조찬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20230727 다나베 세이코.

부상과 질환으로 몇 달 운동 부족이다가, 상태가 좀 나아졌다 싶을 즈음 실내자전거 운동을 시작했다. 페달만 뱅뱅 돌리면 심심하니까, 평소에는 잘 안 보는 텔레비전 틀어보니 오, 섹스앤시티 리부트 시리즈가 나와서 신나게 봤다. 더 찾아보니 OTT서비스에 섹스앤더시티 시즌1부터 6까지 전부 실려있었다. 20년 쯤 전에 신나게 봤던 거라, 그래 올해는 수학이고 수능이고 다 망했으니 이거나 보면서 운동하면 한 해 잘 가겠다- 하고서 신나게 시즌2 후반부까지 보고 있었다. 많이씩 보면 금방 닳는다고 한 편 두 편 아껴보던-어느 날,(은 7월 첫날, 기억할 수 밖에 없음…) 헤헤 운동해야지 하고 리모콘을 잡았는데, 없다. 내 드라마 다 어디 감? 리부트 시즌 말고는 말끔히 사라지고 없었다… 내 드라마 어디 갔어!!!! 곁의 사람에게 하소연하니 공지사항에 6월 말일자로 HBO드라마들이랑 일부 컨텐츠 종료 예고가 있었다고 했다… 아아…
나보다도 어리던, 30대 중반의 뉴요커 언니들 연애 망하는 거 보는 재미가 사라져 버렸다. 앤저슽라잌땟- 미인와이일- 하는 캐리의 내레이션이 막 환청처럼 머무는데 그 친근한 소리가 다 사라졌어… 알라딘을 뒤져보니 뭐 3만 얼마면 전시즌 풀패키지 디브이디를 구할 수 있다. 구매를 진지하게 고려하다 집어치웠다. 내가 즐겁게 볼 수 있던 거도 운동하면서 리모컨만 샥 켜면 되니까 그랬지… 사실 20년 전에도 섹스앤시티 전시즌을 시디에 다 구워놨었다. 그런데 어린이들이 아기 때 막 시디로 원반던지기 하고 부러뜨려서 반달돌칼 만들고 너무 위험하길래 그렇게 애지중지 모아둔 불법 저장물들을 다 버린지가 2년 밖에 안 됐다. 뭘 사...그냥 책 봐…

뉴요커들이 신나게 섹스칼럼니스트의 성생활 드라마를 보던 1998년 경, 한국에서는 이영애, 손창민 주연의 ‘내가 사는 이유’라는 드라마가 방영되었다. 나는 중학생이던 이무렵 한 번 보고, 고등학생 때 짝사랑하던 남자애가 이 드라마 죽이지-해가지고 2001년엔가 유선방송에서 여름방학 때 낮에 틀어주는 걸 또 신나게 보았었다. OTT놈들은 내게서 뉴요커 언니들을 앗아가고, 1975년 마포 도화동 가난한 마을 이야기를 디지털로 떠놓고(싱크 좀 안 맞음) 보라고 하네… 그래서 요즘엔 이걸 보며 운동한다.

20대 후반의 이영애는 정말 예쁘다. 전에도 보면서 너무 마음이 아팠는데, 애숙이(이영애 역)가 진구(손창민)를 혼자 너무 좋아해서 맨날 깡패짓 하고 쳐맞고 다니는 걸 슬퍼하는데, 진구는 동생을 의료사고로 죽인데다 본인을 방화범으로 3년 간 징역 살게 만든 원수인 의사의 딸, 대학생 정희(이민영)를 좋아하고 마음 아파 한다. 가난한 동네 이야기라 희망도 잘 될 가능성도 없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여기 나오는 남자들은 진짜 답이 없다. 포장마차 대상으로 사채업 하면서 도박에 빠져 돈과 상권을 다 날리고 자신을 좋아하는 술집 여자 명화(강성연)에게 돈을 왕창 뜯어내고도 윽박지르는 광팔이(김호진), 자녀 죽고 받은 보상금을 들고 날랐다 다 탕진하고 몇 년만에 기어들어오면서 어린 애인까지 데리고 온 무책임한 아버지 박성달, 포장마차 하는 부인 돈 뜯어다 도박하고 돈 날리고 도망간 덕배, 애숙을 술집에 팔아먹은 아버지… 여자들은 살겠다고 술집에서 일하고, 애들 데리고 마늘 까서 팔고, 포장마차를 운영하며 힘겹게 사는데, 남자들은 사고치고 싸우고 망하고 그와중에도 여자한테 윽박지르고 돈 뺏어가고 난리다.

내가 태어나지도 않은 1970년대 드라마를 보면서, 참 망할 놈의 세상이었군… 여자 팔자 남자 팔자 사내는 어쩌고 운운(주로 진구 엄마 역의 고두심이나 마담 역의 윤여정이 많이 하는) 당시 성역할에 대한 통념을 계속 반복하고 한탄하는 걸 보다가… 나란 새끼는 세상의 균형을 중시하다보니 이제 여성주의 책 하나 읽었다고 또 개 빻은 책을 어디서 골라다 읽고 있었다. 이 드라마 배경 무렵의 1970년대에 일본 잡지에 연재되던 음담패설 에세이를 모은 책이었다.

‘조제, 호랑이, 물고기들’ 영화는 안 봤는데 소설집은 어쩌다 읽고 그 무렵 다나베 세이코의 에세이를 두 권이나 갖춰놨다. 사자마자 펼쳤다가 아...왜 샀지...하고 덮고 몇 년이 지났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아무 책이나 마구 읽고 인생을 탕진하는 문란한 여름을 보내고 있기 때문에! 그 사이 항마력이 생겼는지 욕하면서도 저 시절은 한 일 불문 빻았구나...하면서 읽었다.

다나베 세이코는 소설은 나름 감수성 울리는 문장으로 잔잔하게 써 놨던 것 같은데(기억 잘 안 남), 에세이는 뭔가 새초롬하고 점잔 빼면서도 할 말 다한다는 느낌이었다. 뉴욕의 섹스칼럼니스트 캐리가 90년대 후반에 등장했다면 일본 오사카엔 70년대에 진작에 그런 작가가 있었다… 뭐 요즘 유튜버들이나 온라인 매체에 비하면 그때의 노골적인 표현이래 봤자 댈 것도 아니지만… 피씨주의란 게 태어나지도 않았던 시절에 비하면 경직되고 함부로 농담 던지는 일도 삼가야 하는 시대가 왔다. 라블레를 함께 읽고 있는데, 밀란 쿤데라와 함께 나도 라블레의 후예인 것 같긴한데… 다나베 세이코도 옛날 사람에 옛날 감수성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쪽에 가깝긴 한데… 이제는 이런 책 못 써요… 못 내요… 욕 먹을 걸… 나는 말장난과 농담과 (아이 이름에도 한자 해-해학, 웃음, 조화 등등-를 넣었지…) 패드립과 섹드립을 현란하게 구사하는 젊은이였지만, 그래서 이십대 어린이가 중년 아저씨 급의 희롱을 구사하여 주변을 당황하며 웃게 만드는 게 특기였지만(원조 미러링), 이제는 진짜 중년 아저씨가 되고 말았다… 40대의 세이코는 이런 글을 써서 나한테 까지 닿는 책을 남겼지만, 중년 문턱 밟은 이 시대의 나는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아서 어떻게 하면 빻지 않고도 웃길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그건 너무 어렵다…(야 그냥 웃길 생각을 하지 마…) 인간 웃음 지분의 많은 부분은 말장난과 샤덴 프로이데와 혐오와 괴롭힘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거기서 더러운 것들을 걷어내고 곱게 써 내면 시가 되었겠지… 별 수 없다. 곱고 엄숙하고 근엄하고 진지하고 착하게 살아야겠다. (퍽이나)

+밑줄 긋기
-엄마는 수화기 너머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이 무슨 품위 없는 짓이니. 이렇게 천박한 글 네가 쓴 거 맞아? 섹스가 어떻고, 변태가 어떻고? 다 큰 여자가 변태라니, 이걸 어쩌면 좋니. 세상 사람들 이거 읽고 얼마나 기가 막히겠어. 다 비웃을 거다. 이제 집 밖에 어떻게 다니라는 거야. 창피, 창피, 이런 창피가 없다. 조상님 볼 낯도 제자들 볼 낯도 없어.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본다 한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90, 야한 에세이 연재한다고 엄마한테 욕 먹는 전화 받는 가엾은 세이코… 나이 40 넘어서도 저러면 옛날 사람들은 부모가 죽어야지나 아이 취급에서 자유로워졌는가...지금도 뭐 다를 건 없을지도...다들 엄마 아빠 앞에서만 얼음)

-중년이란 무엇인가. 가모카 아저씨와 이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음, 한마디로 말해서 ‘출구 없음’ 이 아닐까요?“
일, 가정, 성생활, 취미, 돈벌이, 아이, 건강, 술. 이 모든 것의 앞날이 불 보듯 뻔하다는 것. 통로라는 통로는 모두 막히고 사방팔방 어디를 봐도 막힐 대로 다 막힌 상태. 장폐색에 걸리지 않는다면 다행인 정도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 이상 좋아질 것 같지가 않아요. 내 전성 시대도 지금 정점을 찍은 게 아닌가 생각하면, 이제는 더 나갈 출구도 없고 뭘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상황도 아닌 것 같습니다.“
(192, 와 이거 왜...그런데 이런 소리 젊은 시인도 했거든요. ‘우리라고 부를 이 없음/우주선 없음/ 다른 세계 없음/ 희망의 내용 없음 -육호수, ’희망의 내용 없음‘ 중)

-나는 ‘옛날 러일전쟁 때…...’라며 말문을 트는 노인이 가장 못마땅하다. (240, 우리 세대는 금칙어 뭐 있을까… 옛날 IMF때, 옛날 한일월드컵 때, 옛날 코로나19 때 등등…...)

-“인생은 길고 예술은 짧다는 것을 이제 슬슬 깨달아야 합니다. 범인의 몸으로 뭐하러 그렇게 종이 쓰레기를 만드십니까. 갱년기도 다가오는데 적당히 일도 줄이시고 쉬엄쉬엄하세요.” (270, 이 책의 팔할 정도는 오세이상(다나베 세이코의 애칭)의 말친구겸 술친구라는 가모카 아저씨의 활약이다. 그런데 도깨비 같이 무섭게 생긴 40대남이라는 이 사람이야 말로 구시대의 썩은 유물, 핵폐기물급으로 개빻았다. 열심히 글쓰고 있는 오세이네 집에 와서 한다는 소리가 저따위임… 웃기고 실없고 야한 농담 따먹기나 하는 저런 아저씨랑 왜 놈… 문득 궁금하기도 하다. 맨날 집에 찾아와 술 마시고 야한 말 주고 받고 무슨 사이냐 둘이… 왠지 온갖 빻은 아저씨의 집합의식 같은 캐릭터를 가상으로 만들어서 상상 속 친구처럼 등장시켰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다 읽고 나서 역자 후기를 보니 반전은...가모카 아저씨가 남편...동료 작가 죽은 후 장례식에서 만난 그의 남편과 동료 아이들 키우며 오래도록 살았다고 한다. 끝까지 시치미 떼는 솜씨 참 ㅋㅋㅋ)

-작년에 있었던 포르노 비판 때도 그러더니, 이번에는 성적 퇴폐와 방종을 유감이라고 했다. 혼전관계, 동거, 난교, 프리섹스, 스와핑, 동성애, 변태성욕 등을 용인하지 않겠다고 말했으며, 청소년에게는 순결을 권장하고 있다(청소년에게 권장할 정도면 당연히 중년에게도 권장해야 되는 것 아닌가. 순결하지 않기로 따지면 중년들이 훨씬 심하다).
하지만 성의 해방과 인간의 자유, 특히 여성의 자유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여자가 홀로 자립해 살아가고자 한다면, 성의 자유는 제 손에 꽉 쥐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 살기가 만만치 않다.
그랬을 때, 어디까지가 방종이고 어디까지가 착실한 삶인지 법률과 도덕 따위로 판단할 수 있다고 보는가?
(277, 1976년 경의 글이고, 뭔가 탈탈 까고 있는 대상은 공산당, 그 보수성 ㅋㅋㅋ 나는 공산당에 의지하거나 친근감을 가지는데, 니들이 이럴 때 짜게 식어-하는 글 ㅋㅋㅋ맥락이 왠지 모르게 웃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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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7-28 15: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재밌게 읽었어요 ㅋㅋㅋㅋㅋ 20대 유열님도 궁금하고 지금의 유열님도 궁금하다.... 유열님의 빻음과 올바름을 왕래하는 균형적인 독서일기 재밌습니다. ㅋㅋㅋ 앤드류 포터 소설 아까 땡투했어요! 😍

반유행열반인 2023-07-28 15:28   좋아요 1 | URL
으아니 ㅋㅋㅋ은오님 각잡고 땡투 누르고 주문하고 소설!소설을 읽자! 하는 경건함이 여기까지 전해 옵니다...
저의 이십대는 아마도 은오님보다도 훨 덜 지혜롭고 남과 무던히 지내지 못하고 그런데 또 웃기는데 강박적이고 훨씬 꼰대스럽게 깝치는 찌그래기 아니었나 싶습니다(이십대 때 직장에선 넌 오십대 같애!소리 들음ㅋㅋ)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별로 달라진 건 없네요 부끄러움 ㅋㅋㅋ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격려의 피드백 주셔서 늘 감사합니다.

반유행열반인 2023-07-28 15:29   좋아요 1 | URL
그리고 은오님이 청혼남발자라는 소문을 익히 들어왔는데 나한테는 한 번도 안 그런 걸 보니 생각보다 제정신 박힌 사람이구나 ㅋㅋㅋ남발은 아니고 확고한 취향에 기반한 신중한 처사구나 (좋은 일이야 자신을 지키는 선긋기) 싶었습니다 ㅋㅋㅋㅋㅋㅋ

은오 2023-07-28 20:41   좋아요 1 | URL
아니 유열님 귀신인가?! 각 좀 잡았습니다 ㅋㅋㅋㅋㅋ 유열님 리뷰 찾고 땡투버튼 찾느라 좀 헤맸어요!! 😢
미쳐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가 결혼신청한 분들과 유열님이 결이 좀 다르긴 해요. ㅋㅋㅋㅋ 근데 유열님은 비교적 최근에 저랑 인연을 맺은 분이라 아직 안심하시기엔 이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일단 지금은 제가 매번 유열님의 표현력과 재치에 감탄하는 열혈독자1이라는 사실만 밝혀두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