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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클리너 - 특수 현장을 청소하는 트라우마 생존자의 이야기
세라 크래스너스타인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3월
평점 :
-20230507 세라 크래스너스타인.
늦은 아침, 아직 첫 끼도 제대로 안 먹은 가족들과 어지러진 거실을 치웠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다. 한 주 전쯤 포켓몬 유나이트라는, 닌텐도 스위치 버전 롤이라는 게임을 하다 아쉽게 진데다 마침 그날 허락된 스크린타임이 종료되는 알람을 들은 딸은 순간 빡침을 못 이기고 텔레비전 화면을 쳤고, 액정은 깨진 유리 모양으로 터지고, 주변으로 가로세로 좌표 또는 모기장 모양의 검은 줄? 망?이 생겼다. 나는 드디어 사춘기 자녀의 부모가 되었다!!!
한 가을쯤까지 내버려 뒀다가 새 텔레비전을 사든가 하자, 그게 내 의견이었지만 텔레비전 회사 노동자인 곁의 사람 의견으로는 저 텔레비전을 사던 비용으로는 그것보다 더 낮은 급의 같은 크기 제품 밖에 살 수 없다고, 물가가 올랐다고 했다. 수리비 45만원 견적을 받고는 화요일에 출장 수리 신청을 했다고도 했다. 다친 마누라 병원은 6주가 다 되도록 안 데려가면서 텔레비전 수리는 순식간에 결정하는 게 조금 빡쳤다. 나는 발목염좌 부종이 더 악화되고 그거 뺀다고 책상 앉을 때 거상한다고, 걸을 때 발목에 부하 안 준다고, 나도 모르게 과신전, 무릎을 원래 꺾이는 방향과 반대로 지나치게 펴다가 무릎 후방 인대도 매우 안 좋은 상태가 되어 버렸다. 이건 무릎통증과 좌골신경통을 얻고 나서 야, 난 발목 다쳤는데 왜 다리 전체가 작살 났어? 하고 고민하다 뒤늦게 원인을 찾아내고 조심하게 되었다… 내일 혼자라도 드디어 반경 500미터 근방에 있는 마취통증의학과에 가기로 결심했다. 최악의 통증과 함께 어린이날을 보낸 저녁에 곁의 사람이 함께 가준다고 해서 다음날인 토요일에 곧바로 병원에 가려고 했는데 비가 많이 내렸다. 빗길엔 이 산비탈 안 미끄러지고 못 걸음…우산들고 부축해줘도 아마 못 걸음… 하여간에 갈 거야 내일 병원 갈 거야…
거실은, 만들기의 세계에 심취해버린 여섯 살 짜리의 아뜰리에가 된 지 오래였다. 온갖 크기의 종이들, 휴지심, 다쓴 플라스틱 용기, 뚜껑, 약껍질, 구슬, 과자상자, 블록 조각, 빨대, 종류를 가리지 않고 다쓴 물건이다 싶으면 작은 아이는 이제는 묻지도 않고 자기 작업 재료로 사용한다. 가위 두 개가 부서질 정도로 가위질을 해대고 나에게 이런 저런 구멍을 뚫어달라고 부탁하고 테이프와 풀과 포스트잇을 동원해 평균 길이 오십센티미터가 넘는 기괴한 현대미술품을 과장하면 수십개 거실 바닥에 늘어 놓고 사이사이 젠가 나무도막과 레고 조형물을 쌓아 자기만의 전시회를 몇 달 째 진행중이었다… 진짜 다른 식구들은 발디딜 틈이 없지만 조금만 자기가 구성한 게 무너져도 난리를 쳐서 체념했다. 유일하게 여섯살을 이길 수 있는 어미는 아픈 다리 질질 끌고 너무 심해질 때마다 보관해줄게 안전하게! 하고 거짓말치며 커다란 마트제 종이봉투에 작품 몇 개씩을 걷어다가 쑤셔박기를 반복해도 작품은 무한증식했다… 그걸 오늘 다 치웠다. 구실은 아빠가 사준 경찰차 짭레고를 하려면 블럭이 네 작품이랑 다 섞이면 곤란하기 때문에, 그리고 마침 텔레비전 수리도 해야하기 때문에, 이제는 치울 시간이야,
각자 종류별로 장난감을 분류하고 도구들을 정리하고 작품들을 차곡차곡 접어서 정리하는 척 버릴 것으로 분류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놀이매트에 눌러붙은 풀자국을 매직블록으로 문질러 닦았다. 텔레비전 파괴자도 열심히 제 몫을 하길래, 내가 말을 걸었다. 요즘 보는 책에 이런 비슷한 청소 장면이 많이 나와. 버리지 못한 쓰레기와 물건들에 둘러 싸여 엉망이 된 사람들이 청소하러 온 사람들에게 이건 안 되요! 건드리지 마세요! 부수면 안 돼! 그래. 쟤처럼 말야. 나는 아이의 창의성을 존중해 온 것인지 저장강박증을 키운 것인지 헷갈렸다. 여섯 살 짜리는 앞서 말한 것과 비슷한 비명을 지르다 어느새 체념하고 청소하는 다른 가족들과 뒤집어진 매트 사이를 돌아다니며 뭐가 신날 일인지 헤헤 거리고 있었다. 청소가 다 끝나가니 이제 다 치웠으니 당장 티비수리공을 부르라고 조르기도 했다.
내가 읽는 책 속 사람들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지도, 스스로 청소를 해내지도 못했다. 몸과 마음의 병을 앓거나, 사건 사고로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집은 쓰레기, 곰팡이, 체액, 구토물, 과량의 피, 썩은 시신에서 나온 오염물, 권총 자살로 튄 온갖 유기물들과 그걸 먹고 증식한 또다른 유기체들로 오염되어 있었다. 그곳을 청소하는 업체를 샌드라 팽거스트가 이끌었다.
샌드라를 우연히 알게 된 세라가 샌드라의 작업 장소들을 따라다니고, 샌드라의 인생역정을 따라가며 듣고 찾아낸 이야기들로 만든 책이었다. 462쪽짜리인데, 책을 펼치고 아…이런 이야기인 줄 생각도 못했어…하고 글썽이다가 충격받다가 며칠 안 되서 다 읽어버렸다. 발이 아픈 연휴 동안 공부를 거의 놓아버렸는데, 책 뒤표지에 ‘당신의 고통을 존중합니다’ 빨간 글씨가 그냥 책이나 읽어…그럼 네가 겪는 건 그냥 아무 것도 아닐 거야…자꾸 꼬셨는데 꼬신 그대로였다.
미국도 그렇고, 한국이 싫어서 떠나고 싶은 사람들이 많이 선택하는 오스트레일리아도 그랬다. 나라 밖 다른 이들이 살기 꿈꾸는 잘 사는 나라, 자원 많고 인구 대비 영토 넓고 일자리 많아 백인들 틈에 일하러 몰려온 다민족다종족다인종 국가 이루고 그럭저럭 사는 나라 같지만, 번화하지 않은 시골 마을의 암담함, 나아지기 힘든 구질구질함은 어디나 똑같다.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드라마와 광고에나 존재하는 것.
맨 뒤 책날개의 중년?노년? 여성의 이야기를 맨 앞 책날개 여성 작가가 쓴 것인가 보네, 그 정도만 알고 읽었는데 초반부터 어, 했다. 나도 한 때는 피터라는 이름을 쓰고 싶었어. 알라딘 프로필 사진도 로메인 브룩스가 그린 피터야. 갑자기 피터가 등장해서 반갑기도 하고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피터는 아이를 유산한, 그래서 더는 아이를 못 가질까 걱정하던 부부에게 입양되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또 또 태어났다. 피터의 아빠는 엄마를 때렸고, 그걸 말리는 피터도 때렸다. 엄마는 자기를 걱정해주는 데도 피터에게 냉담했다. 결국 피터는 집밖 마당의 엉성한 공간으로 홀로 쫓겨나 잘 먹지도 못하고 유기와 폭력을 겪다가 십대 후반에 완전히 쫓겨났다. 가정폭력과 아동학대의 장면을 목격하는 건 언제나 슬프다. 글일 뿐인데도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눈가가 젖는다. 부모에게 거부당하는 장면은 더욱 고통이다. 폭력에 무력해져 아이를 거부하는 엄마, 우울한 엄마. 자기 삶은 물론 아이의 삶도 그늘지게 하는 부모들…
피터의 남다름을 부모는 알았던 것 같고 그 이유로 아이를 괴물 취급 했던 것 같다. 그래도 평범하게 살아보겠다고, 피터는 이런저런 일자리를 거쳐 식품 회사와 타이어 회사에 비교적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고, 린다를 만나 부모의 냉소를 견뎌가며 혼인을 하고 아들 둘을 얻는다. 그렇지만 피터는 새로 이룬 가정 안에서 자리 잡지 못했다. 이곳이 자기 자리가 아니라는 기분을 떨치지 못하고, 밤마다 어느 호텔 등 게이들이 모이는 클럽을 드나들며 남자들을 만난다. 화장과 치장을 하고 여성호르몬을 처방받아 복용한다. 그러다가 모두 내버려두고 다른 여자가 생겼다고 린다에게 거짓말하고 자동차를 몰고 집을 나와 버린다.
풍자라는 유튜버가 트렌스젠더 바에서 일하면서 마주친 진상손님들 썰을 풀어준 영상을 본 적이 있다. 피터, 지금의 샌드라도 여러가지 여성 이름을 바꿔가며 화려하게 치장하고 쇼를 하는 풍자가 일하던 곳과 비스무레해 보이는 클럽에서 일을 한다. 돈을 차곡차곡 모아서 외모를 여성스럽게 하는 수술을 하고, 성 확정 수술을 해서 마침내 자신이 원하는 자신을 만든다. 이후의 삶은 순탄치 않다.
성 확정 수술 직전 마리아와 사랑에 빠져 함께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로 여기고 임신에 성공하지만, 임신 3개월이던 마리아는 클럽에 샌드라의 공연을 보러 왔다가 클럽문지기와 시비가 붙어 맞아 죽는다.
1980년대 초에 트렌스젠더에게 허락된 사회 생활이나 직업 생활은 많지 않았다. 샌드라는 돈을 모으려고 성매매 업소들을 전전했고, 거구의 남성에게 동료와 함께 끔찍한 성폭력을 당한다. 샌드라가 겪은 일들, 샌드라가 치우는 집의 사람들이 겪은 많은 부분이 괴롭고 끔찍했지만 특히 이 사건이 읽기 괴로웠다. 그때 상황과 고통이 생생하게 전해지도록 상술되어 그런 것 같다. 샌드라는 범죄 피해자임에도 신고를 했을 때 오히려 트랜스여성이 겪을 수많은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가해자 처벌을 위해 반복해서 증언하고 증거를 제시해서 한참 부족한 형량이나마 나쁜놈이 감옥에서 보낼 수 있게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 인생에 관해 전하는 많은 부분이 확언하지 않고 추정이나 짐작으로 마무리되곤 하는데, 작가의 말에 따르면 샌드라는 자기 인생에서 거쳐온 너무 많은 것을 잊어버렸고 이야기 해주는 것들도 파편적이었다. 그래서 취재와 자료 조사를 통해 드문드문 빠진 것들을 채워 넣어 세라 나름대로 이야기들을 이어가고 거기에 대해 논평도 해 놓았다.
세라 또한 어린 시절 엄마가 떠난 것으로 인한 상처가 있고 그래서 살아가는 동안 심한 우울에 빠져 아무것도 못한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샌드라를 대부분 강하고 대단한 사람으로 그려놓았지만, 나중에 재회하게 된 샌드라의 아들들에게 유산을 물려주지 않을 것이라는 샌드라의 말에 세라는 크게 분노하기도 한다. 버리고 떠난 사람이 끝내 제대로 돌아오지 않고 남은 사람을 자기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 감정이입을 했던 것 같다. 나도 가끔가끔 그랬다. 더 나아지기 위해 분투하는 샌드라를 볼 때, 평온한 가정 생활 속에서도 방황할 때, 어린시절의 결핍으로 고통스러워 할 때, 사람들과 온전히 관계 맺지 못하고 어느 순간 아프기 전에 끊어내면서 떠나 버릴 때, 다리 뼈가 부러지고 발가락이 잘라지는 부상을 당할 때 그랬다. 다만 샌드라는 수많은 고통을 겪으면서 남들을 단정하지 않고 평가하지 않고 공감하고 또 계속해서 소통하면서 남들도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했다. 단순 이타심 때문 만은 아니지만 어쨌든 자기 사업을 그런 방향으로 이끌어나가고 있었다. 폐가 다 망가져서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도 예쁘게 차려 입고 더러운 현장을 휘젓고 다녔다. 아픈 집주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공감해주고, 삶을 더 피폐하게 만드는 오염들을 함께 없애 나가자고 설득하고 있었다.
배설물이 넘쳐 벽 전체가 곰팡이로 썩어버린 집, 40년치 쓰레기가 가득 찬 집, 홀로 죽은 자가 흘린 피가 바닥에 밴 집, 대부분의 집들이 비슷하게도 버리지 못한 뭔가와 거기에서 증식하는 온갖 벌레, 쥐, 곰팡이, 냄새, 그리고 우울과 질병, 고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새삼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그림 같은 집에 깔끔한 인테리어를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정말 극소수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 세계로까지 확장하면 그야말로 동굴벽화 그리고 살던 시절 같던 주거환경, 혹은 그보다 못하게 오히려 자꾸만 집으로 밀려드는 자본주의의 쓰레기들에 빠져 죽을 것 같은 사람들이 아주 많을 것이다. 벽지에 물이 줄줄 흐르고 검은 곰팡이 포자가 자꾸 퐁퐁 날려서 아토피성 피부염으로 얼굴에 진물을 질질 흘리는 아기를 옆방에 옮겨 두고 민소매티에 고무장갑끼고 곰팡이 세제 락스세제를 안방 벽지에 뿌려가며 긁어내던, 스물여덟 초보엄마였던 나를 생각한다. 내가 살던 집 대부분은 그랬다. 곰팡이 파티… 지금은 그동안 살던 곳 중 가장 큰 집에 살게 되었지만 여기도 곰팡이가 팡팡 핀다. 그나마 방은 아니고 베란다인게 다행 ㅋㅋㅋ식구들이 겨울마다 결로랑 얼음이랑 뒤섞인 곰팡이 긁어내다 이사 전에 새로 바른 수성페인트 다 벗겨짐… 단열재 제대로 안 쓰는 건설사들 다 죽어버려라…
특수 현장이나 남들이 기피하는 청소 현장만 돌며 해결하는 샌드라의 사업, 직업이 흥미로웠다. 이 일을 하기 까지 샌드라가 얻고 잃었던 직업도, 만났다 헤어진 연인과 배우자들도 많고 많았다. 삶은 지금 이대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고, 끝없이 바뀌고 움직이고 달라진다. 원서는 2017년에 나왔는데, 번역판인 이 책은 2022년에 한국에서 나와서, 마지막에 주석으로 2021년에 샌드라가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줘서 마음이 쾅 내려앉았다. 책 가장 뒤에 샌드라와 샌드라의 가족과 연인들 사진이 실려 있어서 한 번 더 쾅쾅 했다. 글로만 읽다가 이 이야기의 실존인물들은 이런 모습입니다 하고 보여주니까 그냥 그게 그거대로 괜히 충격이었다. 소설이나 영화가 아무리 끔찍해도 나는 그저 덤덤히 읽고 볼 수 있는데, 현실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감내해내는 삶의 무게는 그거보다 더 엄청난 게 많다는 걸 짐작도 하고 이렇게 직접 확인도 하기 때문이다.
그니까 내 삶도 그렇게 큰일은 아니다. 가끔 풀어 놓아야겠다. 그렇게 조그맣게라도 이어질 수 있다면. 그리고 당장의 몸의 고통도 별일은 아니다. 샌드라가 숨도 잘 못 쉬면서 뛰어다니면서 치우고 다닌 일들을 생각하면 그렇더라… 그래도 아프지 말고 오래오래 살자… 혼자 고독사 하게 안 두는 곁의 사람들에게 감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