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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하고 있잖아 ㅣ 오늘의 젊은 작가 28
정용준 지음 / 민음사 / 2020년 6월
평점 :
-20230419 정용준.
사랑하는 사람의 온기와 감촉과 굴곡을 느끼려고 손을 들어 올려 더듬는다. 사랑하는 어느 구석이든. 작고 연약한 곤충들은 우리가 갖지 못한 기관으로 세상을 파악한다. 더듬이. 그러고 보면 말을 더듬는 사람들도 아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적확한 말들을 고르는 중인지도 모르겠는데, 그게 자꾸 미끄러져 헛딛고 내가 삔 발목처럼 마음을 삔다.
사실 말을 더듬어 본 기억이 없어서 이런 내가 주절거려 봤자 소설 속 소년은 개,개소소,리 하고 나도 죽이고 싶은 목록에 올릴 지도 모르겠다. 말더듬는 거 흉내내서 두 배의 강도로 죽이고 싶은 욕구 상승.
들어줄 사람이 있다면 쉼없이 떠든다. 그래서 피시통신 채팅방을 만났을 때는 거의 혁명이라고 생각했다. 몇 시간이고 죽치고 앉아 떠들고 들어주고 또 떠드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러다 지치고 떠나간 자리에 다른 아이들이 또 나타나 또 떠들고 또 또 떠들고. 어느 주말에는 일곱 시간인가 접속하고 있다가 부모에게 뒤지게 혼나기도 했다. 우리 집 컴퓨터는 사양이 낮아서 ADSL이 안 깔렸어…전화 모뎀은 전화요금이 아주 많이 나왔다.
지금도 그렇다. 대꾸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오래오래 마냥 말할 수 있다. 다만 말하는 직업으로 사는 것은 즐겁지 않다. 하고 싶은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상하게 한 사람에게만 조잘대는 것은 크게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데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하는 것은 성대 근육을 긴장시키고 첫해는 후두염, 다음 해는 성대결절, 결국에는 성대폴립이라는 게 생겨서 목수술을 해야했다. 휴직하니 말하고 싶지 않을 때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좋다.
들어줄 사람이 없으면 길게 쓰면 된다. 요즘은 많이 쓰지 못한다. 무얼 하고 사는 건지.
아, 다들 하나씩 더듬거리는 게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나는 이년째 수학을 더듬고 있어. 떠,떠ㅓ떠떠ㅓ떠떠ㅓ떠ㅓ떠ㅓ떠ㅓ 잘하고 싶은데 계속 반타작이야. 그런 뒤에 이 소설을 읽어서 그게 아주 비슷한 마음일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소설 첫머리부터 왜 이건 내가 쓴 거 같니…했다. 요즘의 난 말이야. 힘내라고 하는 사람에게 힘내라고 하지 말라고, 힘낼 힘이 없으니 네가 내 대신 힘을 내라고 한다. 이 시간이 어떻게 끝이 나든 나중의 나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거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또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 그건 그냥 너는 망하고 말 거야, 하는 거나 같다고 그래서 그런 말들 들으면 자꾸 눈물이 난다고 한다. 잘 될 거라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또 내가 이 지경인 걸 모르면서 무책임한 희망의 말이라고도 했다. 그래서 결국 내 곁의 사람들이 말을 잃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 하고 입을 닫게 만들었다. 나는 내가 더듬는 대신 상대를 더듬게 만드는 나쁜 놈이로구나…
정용준의 소설책은 다섯 권을 갖추고도 두 권 밖에 읽지 않았었다. 하나는 너무 컴컴했고 개랑 개같은 아버지랑 피랑 뭐 그런 게 나왔다. 그런데 나중에 읽은 가장 최근 나온 소설집은 세상과 이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이어지긴 하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톤이 밝은 소설들이 많아졌다. 이 소설도 그런 느낌이었다. 그래서 아이가 이런 저런 걸 묻는데 너도 읽어도 될 것 같다고 했다. 얼마 읽지 않고서도 그렇게 말했는데 다 읽고 나니 더 그랬다. 약간 청소년 소설 느낌이 많이 났다. 청소년 소설 하면 또 뭐 그런 장르가 있냐 싶지만 하여간에 막 학교 도서관 추천목록 실리고 그런 거… 그런데 그러면 진짜 많이 팔아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데 그런 컨셉으로 마케팅을 하지는 않기로 했나 보다… 아쉽네… 내가 윤독도서로 막 몇 십 권 팔아주고 싶네…(하지만 나는 학교로 안 돌아가는게 지상 목표 아마 쉽지 않겠지만 그래서 높은 확률로 돌아가면 애들이랑 볼게…) 읽었던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 중에서는 제일 좋았다. 뒤에 좀 시트콤 같긴 한데 그게 그냥 그거대로 좋았다. 어설프게 훈훈한게 필요한가 보다. 화자가 열넷 열다섯 어린이라 좀 심하게 못 까겠다… 나는 중학생이 너무 가엾다. 쌍욕하고 눈 까뒤집거나 인터넷 밈 같은 거 주워들고 성희롱하고 교원평가에 ㅆ,ㅣ바 뭐 이런 식으로 욕을 잔뜩 깔아두면 좀 정나미가 떨어지긴 하지만 그냥 불쌍하다. 하고 싶은 거 못하고 어릴 때만큼 귀여움도 관심도 못 받고 근데 겁나 사랑 받고 싶은데 아무도 없고…그러면 그냥 컴퓨터나 하고 휴대폰이나 만지는 거지… 욕도 절로 나오는 거지… 사실 그건 어른이 되어도 마찬가지란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소설 속 소년은 생각보다 많은 아이들, 어른들에 둘러싸여 응원도 받고 격려도 받고 가장 중요한 양육자한테서는 좀 험한 꼴도 많이 보지만, 어쨌거나 둘러싼 사람들이 다들 자기 만큼 어려움 겪고 있는 사람들이라서, 그런 어려움 감추지 않고 서로 드러내는 처지라 위로가 된다. 박상영 소설에서는 온통 절망한 아이 하나가 자꾸만 유리구슬을 삼켜서 슬펐는데, 얘는 통통 튀기는 탁구공을 보며 그렇게 타격감 느껴지는 말을 상상한다. 이코에서 틱을 삼키려고 탁구공 물고 테이프 붙이고 마스크 쓰던 아이에 비하면 덜 슬퍼서 좋다. 발작이 온 연인 앞에서 떠떠더떠ㄸ떠 하던 인형탈 쓴 슬픈 연인보다도 덜 슬퍼져서 좋다. 나도 덜 슬퍼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