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eBook] 쇼샤 ㅣ 페이지터너스 3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지음, 정영문 옮김 / 빛소굴 / 2022년 12월
평점 :
-20230127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바르샤바가 배경인 이야기를 읽다 보니 단치히도 몇 번 나왔다. 양철북 영화와 소설을 통해 알게된 지명이지만 독일어로 번역된 그 도시의 이름을 보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김애란 산문집에서 그단스크라는 폴란드어 발음을 알게 된 후로 그렇다. 이디시어와 폴란드어를 섞어 쓰던 이야기 속 유대인들은 단치히, 했을까, 아마도 그단스크, 했겠지, 번역할 때 병기라도 하든가 신경써 주면 좋겠다.
그러니까 서울이 등장하는 소설에 자꾸 케이세이, 하면 빡치지 않을까… 경성 경성해도 이상할 것 같다.
글쓰는 삶, 글로 먹고 사는 삶은 성공 이전에는 언제 어디서나 구차하고, 갑자기 세월을 뛰어넘어 13년 후,로 후일담 전하듯 다 죽었어, 하는 이야기는 살아남은 자가 그 사이를 넋두리로 풀어내든,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든, 할많하않, 하든 뭐 남은 사람이 전하는 이야기 밖에는 들을 길이 없다.
싱어는 그냥 궁금하다가, 아이에게 바보들이 사는 나라 켈름을 먼저 사주었다가, 전자 도서관에 올라왔길래 빌려 보았다. 문득 소설가는, 아주 어릴 적 친하던 친구가 그렇게 어릴 때 이미 죽었더라도 다시 살려내서 사랑도 하고 결혼도 하고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전쟁 때 죽어버렸더라도 살아남은 걸로 해서 뒤 이야기를 끌고 나갈 수 있고. 살아남았더라도 죽은 걸로 해서 어떤 감정이든 이끌어낼 수 있을 거고.
내일 세상이 망할 거라는데 여전한 일상을 바라보는 눈길, 마음 같은 건 조금 엿볼 수 있었다. 내가 사는 시대의 대부분의 종말론들은 가짜 예언이었는데, 세계 대전을 겪던 시절 사람들에게는, 일본의 지배를 받고 한국 전쟁을 겪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는 그 종말이 진짜였겠다 싶었다. 그걸 안다고 해도 여지껏 살던 대로 사는 것 말고는 또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겠지 싶기도 했다. 그러니 모조리 조상이 같은 사람들이라는 이유 만으로 지구상에서 말살되어 버릴 위기였던 사람들이 땅을 얻고 나라를 세운 감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는 없는 것이겠지만…이제는 그 사람들이 장벽을 세우고 미사일을 쏘고 있다네. 인간이란 종은 참 답이 없다.
+밑줄 긋기
-그녀는 나를 만날 때마다 결혼을 종교적인 광신주의의 흔적이라고 얘기했다. 어떻게 평생 가는 사랑에 대한 계약에 서명을 할 수 있지? 자본가와 성직자만이 그런 위선적인 제도를 영속화하는 데 몰두할 수 있지. 나는 결코 좌익이었던 적이 없지만 그 점에 있어서만큼은 그녀에게 동의했다. 나는 경험을 통해 현대의 남자들이 가족에 대한 의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하느님을, 목적도 모른 채 만든 자신의 은하계와 무수한 법칙 때문에 오히려 당황하고 있는, 심하게 병든 존재로 생각하지. 이따금 나 자신이 휘갈겨 쓴 글들을 들여다보면 내가 쓰기 시작한 글이 의도와는 전혀 반대가 되고 말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기도 해. 우리가 하느님의 이미지에 따라 만들어 졌다면 그분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어.”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나요?”
“누군가가 뭔가에 대해 믿음을 갖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요?”
“자신에 대해 믿음을 가져야 해요. 나 자신에 대해 믿음을 갖지 못하는 것, 그것이 내 비극이에요. 뭔가 좋은 일이 생기기 시작하자마자 나는 어려움과 불운만을 예견해 모든 것을 망쳐버리죠. 사랑에서나 일에서나 모두 그랬어요.
-언젠가는 모든 사람이 진리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단 하나의 관념이라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거야. 모든 것은 게임이야. 국가주의도, 국제주의도, 종교도, 무신론도, 정신주의도, 물질주의도. 심지어는 자살마저도.
-추악한 진실은 사람들 다수가–특히 젊은이들이–사람을 죽이고자 하는 열정을 갖고 있다는 거야. 그들에게는 핑계나 대의가 필요할 뿐이지. 어떤 때는 종교적인 명분으로, 다른 때는 파시즘을 위해, 또는 민주주의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그런 일이 저질러지지. 살인을 하고자 하는 그들의 욕구가 너무 커서 살해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능가하는 거야. 이건 발설해서는 안 되는 진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이야. 히틀러를 위해 살인을 하고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자들은 상황이 바뀌면 스탈린을 위해서도 똑같은 짓을 할 거야. 사람들이 어떤 멍청한 야망과 광기를 위해서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때는 없었어.
-그의 이름은 콩,
국수는 그녀의 이름,
그들은 금요일에 결혼을 했네
그런데 아무도 오지 않았네
그녀는 내 품으로 파고들며 말했다. “오, 아렐레. 우리가 죽게 된다 하더라도 네 옆에 눕는 건 좋아.”
-그의 말의 핵심은 하느님이 영원히 침묵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그분께 빚진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거였네. 자네에게서도 언젠가 비슷한 말을 들은 것 같네. 아니면 자네가 모리스의 말을 인용했을 수도 있겠지. 모리스는 진정한 종교는 하느님에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 원한을 품는 것이라고 주장했어.
-“고통에 대한 답은 어디에도 없죠. 특히 고통을 당하는 자들에게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