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이코 테이크아웃 18
정용준 지음, 무나씨 그림 / 미메시스 / 2019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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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9 정용준.

한 달에 소설 다섯 권은 무거웠니. 월말이 다가오자 치트키 치듯 단편 하나 분량 책을 빌렸다. 사실 전자책이라 빌리고 나서야 얼마만한 책인지 알았다. 정용준 종이책 세 권 사 놓고 아직도 두 권 못 봤는데. 언제 볼 거야.

미이와 주우는 우연히 다시 만난다. 미이가 갑자기 떠났고, 주우는 미이를 찾아 세상을 헤맸다. 주우는 틱 장애가 있어 자기 의지와 상관 없이 욕을 한다. 그런 주우를 괴물 취급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미이 만이 주우를 이해하고 입 속 무언가에게 치즈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두 번이나 머리털을 잘라준다. 미이의 치즈 같은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는 나오지 않는다. 사랑하면 안 될 것들을 사랑하는 일, 이라는데, 그렇게 들어도 잘 모르겠더라.

말을 더듬고, 말을 하지 못하고, 이상한 말을 하는 사람에 대한 소설이 제법 있었다. 나는 아무 말이나 막힘 없이 쏟아서 문제인데. 그럼 내 입에도 치즈 비슷한 게 있는지도 모르겠다. 입이 아니라 머릿속에 있을 수도 있겠다.
정용준 소설 속 자폐에 가까운 인물들이 구원을 갈구하는 대상은 비슷한 상처를 가진 다른 하나의 사람이다. 대개 이성이고,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고, 상처를 핥고, 그러다 울고, 스스로의 최악을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은 사람 앞에서 처참하게 부서지고, 난장판이다. 이번에는 그렇게 마음 저미는 난장판은 없었다. 마스크도 벗고 공도 뱉었다. 머리카락도 말끔하게 잘랐다. 이제 소설 속 인물들을 조금 덜 괴롭힐 만큼 작가 마음이 유해졌나 싶은데, 못된 독자는 그래서 재미가 좀 덜 한 거 같네요...인물의 불행이 내 슬픔이자 즐거움...하고 있다.(변태새끼야…)
책 속 일러스트에는 온통 비슷하게 생긴 시꺼먼 부처님들이 입을 막고 입에 문 공을 꺼내고 머리도 잘라줬다. 정용준 책은 읽다 보면 어떤 소설은 엄청 좋은 거 같다가, 이건 또 모르겠다가 했다. 이번 건 모르겠다 에 가까웠다.

+밑줄 긋기

-둘은 걸었다. 지하철역으로 들어가지도 않고 버스 정류장에 멈추지도 않았다. 근린공원을 돌고 8차선 도로를 가로지르는 횡단보도를 건넜다. 인적이 드문 골목길을 지나 불 꺼진 초등학교 운동장을 두 바퀴 걷고 파란 육교를 건넜다. 그동안 둘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기이했다. 둘 중 누구도 그것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았다. 초조하지도 답답하지도 않은 침묵. 편하게 주고받는 대화를 능가하는 자연스러움이 녹아 있었다. 미이는 길 한가운데서 걸음을 멈췄다. 주우도 멈췄다. 가로등 불빛이 둘을 비췄고 그림자 두 개가 바닥에 길게 서 있었다. 미이가 말했다.
넌 날 좋아하면 안 돼.
주우가 왜? 라고 묻는 눈으로 미이를 바라봤다.
난 널 좋아하지 않을 거거든.

상관 없어.

미이는 주우가 쓴 글씨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아냐. 서로 안 좋아하면 반드시 한쪽은 슬퍼져.
주우는 볼펜을 들고 한참 뜸을 들이다 뭔가를 썼다. 그리고 노트를 찢어 미이의 손에 쥐어 주고 앞서 걸었다.

안 좋아하는 것은 더 슬퍼.

-주우가 마스크를 벗는 동안 미이는 한 번도 숨을 쉬지 않았다. 아니, 쉴 수 없었다. 20초도 안 된 그 장면은 미이에게 정지 화면처럼 느껴졌다. 마스크를 벗고 입술 위에 까만 색 전기 테이프를 듣고 그 밑에 두꺼운 장판 테이프를 뜯어 냈다. 그리고 주우는 뭔가를 뱉어 냈다. 골프공 크기의 까만 플라스틱 공이었다. 주우는 입을 크게 벌려 뻐근한 턱을 움직였다. 미이는 건네받은 재갈을 손에 들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뭐야?
공 재갈이라고 하는 거야.
뭐야. 말 잘하잖아.
내가 언제 말 못한다고 했어?
그런데 왜?
다른 말도 잘하니까 그렇지.
지금은?
주우는 눈을 꾹 감고 10초쯤 뭔가에 집중했다. 이내 눈을 뜨고 어깨를 살짝 들었다 내렸다.
괜찮을 것 같아. 자고 있는 것 같아.
자? 누가?
치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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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9 19: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29 19: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20-09-01 15: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 특히 장편 말고 단편집을 읽고 나면 작가가 뭐를 말하고 싶은 건지 모를 때가 있어서 생각하기 복잡해
요즘은 비교적 명쾌한 내용의 에세이를 읽게 되는 것 같아요.
장르마다 다 매력이 있는 건데 언제부터인가 제가 주로 에세이 분야를 사서 읽고 있더라고요.
말로는 소설을 좋아한다고 하고선. ㅋ

반유행열반인 2020-09-01 16:42   좋아요 1 | URL
저는 소설 읽기가 제일 재미있고 진도도 잘 나가는데, 소설도 많이 사는데 자꾸 엉뚱한 다른 책으로 도망가곤 합니다. 참을 수 없는 소설의 무거움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