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소립자 열린책들 세계문학 34
미셸 우엘벡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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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9 미셸 우엘벡.

습도가 100퍼센트인 날, 5천 걸음 밖에 있는 공원에 갔다. 비바람이 지난 뒤의 흙바닥은 진창과 떨어진 잎들로 뒤죽박죽이 되었지만 물기 많은 끈적한 바람은 생각보다 산뜻했다. 건강을 바라는 성실한 사람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와 너른 잔디밭 둘레를 끝없이 끝없이 돌고 있었다. 
꽃이 다 진 때임을 알면서도 연못에 갔다. 푸른 연잎만 한가득, 물방울 고인 손바닥을 하늘 향해 펼치고 하늘하늘거렸다. 꽃이 거기 있었다는 늦은 연락처럼 연밥만 두세 개 보았다. 연화정이라 이름 붙은 정자 위에는 연꽃 같은 할머니 하나만 피어있었다. 
축축 젖은 나무 의자에 앉아 책을 보았다. 다 그친 게 아니었는지 자잘한 빗방울이 다시 쏟아졌다. 다시 그쳤다. 작고 부지런한 참새들이 주위를 폴짝폴짝 맴돌며 바닥을 열심히 쪼아댔다. 적어도 스무 마리는 되는 참새들은 겁이 없는가, 나 하나쯤은 만만한가, 연신 콕콕 오물오물 퉷퉷 콕콕 오물오물 잘도 먹는다. 대가리도 주둥이도 눈깔도 자그만게 되게 귀엽다. 무심한 참새목장 새치기처럼 참새를 풀어놓고 내 할 일-독서-했다. 
참새만 맴도나 했는데, 나는 노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앉은 자리 삼십 센티도 안 되는 옆에 왠 할머니가 다가와 내 가방과 우산을 치우고 앉으려 했다. 의자에 붙은 경고문을 가리키며 ‘이 미터 안으로 바짝 붙으면 안 된대요!’ 해도 막무가내였다. 아무 말 없던 할머니는 십 분 쯤 자리를 지키다 떠났다. 또 다른 할머니는 옆에 우물쭈물 다가와서 공부하시나, 하다가 전화기를 불쑥 내 얼굴 쪽으로 붙이더니 이게 자꾸 이상한 소리가 나 젊은 사람이 좀 고쳐 보시게...그런데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절룩대고 검버섯 잔뜩 핀 가는 다리로 부지런히 걷던 할아버지, 맞은 편 벤치에서 푸시업을 하고 제자리 뛰기를 하고 생난리를 치다 한숨을 쉬며 자리에 주저 앉던 또 다른 할아버지. 거참 이런 노화 선배님들 사이에서 늙어가고 죽어가는 공포를 (발기 안 되고 늘어진 성기 때문에 아무도 다가오지도 끌려하지도 않아 외로이 서성이며) 느끼는 사람이 잔뜩 나오는 소설을 읽고 있자니, 가 본 적 없는 VR체험관에 온 기분이었다. 

*
눈빛. 말이 아닌 눈빛으로 사실은 말야, 솔직히 그렇잖아, 우리는 죽은 뭔가에 인공호흡을 하고 있잖아, 했다. 심정지 상태에서 다시 생명 신호가 잡히게 하려면 상당히 과격하게, 격렬하게, 갈비뼈가 부서질 정도의 응급구호조치를 해야 한다. 나는 집요했고, 집요했고, 언제나 집요했기 때문에 죽여버린 마음을 혼수상태까지나마 되돌려 놓았다.고 믿었다. 착각일 거야.
등 뒤에서 벽치기 하던 심장이 다시 심장 께에서 드리블을 했다. 내 심장은 제대로 드리블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 알려주지 못할 만큼 먼 세상에 가 있었다.

왜 내가 읽었거나 읽고 싶거나 샀거나 빌렸거나 한 책이 책장이든 목록이든 꽂혀 있는 걸 보면 흥분하는지 모르겠다. 세상에 같은 책 읽은 읽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애처럼 왜 이래.
미셸 우엘벡 소설을 읽게 된 건, 이번에 신작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러면 예전에 낸 거 먼저 봐야지 하고 전자책 장바구니에 소립자를 꽂아놨다가, 서울도서관이 어이어이 살 필요 없어 내가 다 마련해 놨다구- 하길래 욕하던 건 이제 다 잊고 오랜 로딩 쯤이야 직전에 읽은 페이지를 되새기는 꼭 필요한 시간이지, 암암 하고 빌렸다.
읽다보니 너무 재밌어서 아 난 이런 취향이었군, 친구들아 너희는 이 책을 읽었니 하고 물었더니 두 명이나 응 오래 전에, 기억도 안 나네, 해서 아 나쁜 놈들 이렇게 재미있는 걸 벌써 봐 놓고 왜 권해주지도 않았대, 그런데 10년 전 새파란 이십 대에 읽었으면 지금 같이 재미있었을 것 같지는 않았겠다 싶었다.

*
십대 후반에 나보다 겨우 14개월 먼저 태어난 이십대 문학청년의 개인 카페에 푸념이나 상념 같은 걸 주절주절 풀어 두면 우매한 물음에 답하는 현자마냥 카페 주인인 친구가 위로하는 댓글을 달아주곤 했다. 나는 굉장히 고립되고 관계 맺음을 어려워하는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게다가 그나마 가까운 사회적 관계인 가정은 붕괴 직전에 폭력과 주사와 질환으로 점철되어 나도 곧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거기에 그저 말과 글뿐인 반응이 꽤나 힘이 되었다. 예를 들면 잠못 이루고 징징대고 있다는 글을 쓰면 이런 답글을 달아주었다.
“예전에 그냥 '씨팔 이게 무슨 소리야' 
하고 넘어간 글귀들이 
어느날 커다랗게 커가지고 머릿속을 팍!하고 칠때가 있지 
그럼 그냥 그렇게 받아들이면 된다 
눈물도 웃음도 
모두 그냥 그렇게 받아들이면 된다고 
우리는 아직 어리잖아 하하 
딸아 이 말만은 기억해라 
우리는 아직 어리고 
언제나 어릴수 있단 말이다. 
그러니까 걱정마라 부끄러워 할 필요도 없다.”

아 ㅋㅋ스무살 짜리가 열아홉살 짜리한테 저런 위로를 하고 있어.
어쨌거나 저 청년은 훗날 (무명의) 소설가가 되었다. 그러고나서 소설을 쓰라고 꼬셔 놓고는 내가 언제 그랬어, 하고 있다…

*
사람이 지금 어떤 존재가 되기 까지 그 사람의 부모와 조부모, 양육 태도, 학창 시절의 경험, 연애사, 직업 세계에서의 성취, 신체적 성적 욕망과 시도와 좌절, 읽은 책과 썼던 글, 그런 걸 훑어보는 게 현재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소설 속 주 인물 미셸과 브뤼노, 그리고 작가 새끼가 현실에서는 여자의 평균수명이 남자들보다 긴 걸 무시하고 너무 빨리 죽여버리는 두 남자와 관계된 여자들 크리스티안, 자닌, 아나벨의 캐릭터를 그리는 데 저런 배경들이 제법 많이 동원되었다. 인물을 그려내는 방식이 번잡스러우면서도 흥미로웠다. 거기에다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양자역학이니 분자생물학이니 사회학 종교학 역사 문화 정치 등등 나무위키 같은 사전식 표현, 서간문, 카탈로그처럼 던지는 상품 브랜드와 가격, 표현 형식이 재미있었다.
야한 상황, 성애 장면 꽤나 많이 나오는 편인데, 이상하게 관능적이지는 않았다. 그냥 존나 무덤덤하게 읽히고, 다 읽고 나면 그야 말로 현자의 시간이 다가오고 아 부질 없고 뜬구름 같은 무념무상의 인간사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드글드글 끓던 욕망도 얘들이 원껏 실컷 하고 다니다 사랑하는 여자들이 갑자기 죽어버리니 구운몽 속 성진이 꿈에서 깨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런데 왜 여자들 다 죽여...미셸 친할머니, 브뤼노 외할머니, 미셸과 브뤼노의 엄마 자닌, 브뤼노 애인 크리스티안, 미셸 애인 아나벨 그냥 막 다 죽는다. 차라리 먼저 죽는 게 나은 것도 같다. 다 죽고 나니 브뤼노는 정신병원에서 약이 효과를 발휘해 욕망이 소멸되고, 미셸은 열심히 생명과 유전자와 진화의 원리에 관해 연구하고 통찰해서 인류 꺼져 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버린다. 솔직히 마지막 에필로그는 군더더기 같다. 야 이게 핵심인데 멍청한 독자야 하면 멍청해서 할 말 없지만…
이 책의 핵심 주제는 문과 멍청이 욕망만 가득하고 쓸모 없는 존재야 이과 만세 세상은 이과가 바꾸고 지탱해 간다...아닐까...그냥 (문과생) 혼자 피해망상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
오랜만에 아는 길을 걸었다. 예전에는 해가 쨍한 낮이었고, 봄의 한가운데였고, 개나리와 철쭉 같은 봄꽃들이 피어나는 중이었다. 이제는 완전한 어둠이 내린 밤이었고, 차 전조등, 도로 가로등, 창 안 조명 같은 먼 불빛이 내려다보였고, 높고 좁은 틈에 할머니가 키우는 고추 모종이 뾰족한 열매를 익히고, 할아버지 한 명이 잔뜩 핀 분홍 노랑 분꽃 사이를 뒤지고 있었다. 꽃을 따나? 씨앗은 아직일텐데. 노인은 도처에서 부지런 떨고 있다.
달이 잠시 나왔다가 구름에 감춰지며 순식간에 모양을 바꿔서 반달인지, 초승달인지, 사실은 보름달인지 알 수 없었다. 빛이 흘러내린 구름 자국만 용 모양을 하다가 완전 어둠이 되었다. 
마스크가 잠시 내려갔다 다시 올라왔다. 물음표가 함께 올라왔다 사라졌다.
나도 언젠가는 사라질 건데 뭐 어때. 장래희망은 먼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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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08-29 10: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딱 일 년 전에 제목에 먼지 들어가는 독후감 쓴 거 알고 놀랐다고 한다...그때도 장래희망은 먼지였다는 게 더 충격...

syo 2020-08-29 12:11   좋아요 1 | URL
요며칠 반님의 글이 제 취향에 턱턱 맞아들어가서 심장을 턱턱 얻어맞고 있습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08-29 12:20   좋아요 0 | URL
나쌔끼 syo님 취향 노리고 썼나 보네요....좋아요 하나 받을라고 처절.... ㅋㅋㅋㅋㅋ

2020-08-29 1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29 1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