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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페미니즘을 퀴어링! -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페미니즘 이론, 실천, 행동
미미 마리누치 지음, 권유경.김은주 옮김 / 봄알람 / 2019년 5월
평점 :
-20200822 미미 마리누치.
원제 『Feminism is Queer』.
트랜스젠더 여성의 여군 복무 희망과 여대 합격에 관해 혐오와 배제의 발언과 반응을 보이는 다른 여성들을 보며 충격을 받았었다. 트랜스여성을 배제하는 급진적 페미니즘 옹호자들TERF이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혐오와 편견과 폭력에 희생되고 상처 받던 사람들이 왜 다른 소수자에게 당한 일을 그대로 행하는지 이해되지 않고 진절머리가 났다.
이 책은 철학적, 역사적, 언어적, 실천적 사례 등을 들어 페미니즘과 퀴어의 접점을 찾으려는 시도가 담겨 있다고 했다. 최대한 단정하거나 배제하는 용어를 피하려는 서술이 조심스럽고 신기했다. 막말하는 나새끼가 좀 보고 배워야 할 부분이었다.
성정체성에 대한 기본 개념으로 섹슈얼리티, 섹스, 젠더에 관해 먼저 다룬다. 이전에 읽은 LGBT+관련 책이랑 비슷했다. 그렇지만 같은 개념을 다루는데도 이 책의 서술이 조금 더 이론적이라 그런가 어려웠다. 섹스나 젠더에 관한 편견의 문제점을 지적할 때 여러 비유나 유추할 만한 사례를 드는 건 흥미로웠다.
제3물결, 포스트페미니즘에서 퀴어 페미니즘으로 이어지는 최신 경향을 말하기 위해 페미니즘의 역사와 다양한 갈래에 관해 한 장을 할애해 아주 간략하게 소개한다. 이 책에서 언급한 로즈마리 통의 페미니즘 사상을 보면 다양한 관점에 관해 조금 더 자세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아 전자책 도서관에 줄서는 중인데 기회가 올지는 모르겠다.
퀴어와 페미니즘에 대해 열심히 이론적 바탕을 깔고 달려온 것, 그리고 제목에 비해 퀴어 페미니즘에 대한 내용은 생각보다 자세하지 않았다. 퀴어와 페미니즘이 각자의 이론과 실천에 기여할 수 있는 바를 상세히 다루며 싸우지 말고 연대해- 이성애자 중심, 이분법적 구분은 니들도 손해야- 이런 주장을 하는데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었다. 수긍은 가는데 충분한 설득력이 있을지, 강경한 배제와 혐오를 멈추는 데 효과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ㅠㅠ 온건해. 니들 왜 이렇게 착해 빠졌어ㅠㅠ
챕터 표지마다 이상한 나라의 오즈 시리즈에 나온 퀴어라는 말이 나온 부분을 발췌해놨다. 오즈 되게 좋아하나 보다. 우리 모두는 다 다르고 다 이상해. 이 세상은 참 이상해. 거기에서 스스로를 확고하게 규정하고 거기 속하지 않는 사람을 타자화하고 이상한 놈년 취급하는 건 안정감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꼭 그래야 해? 이상한 우리가 세상을 말아먹으면 얼마나 말아 먹겠어? 힘을 가진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을 낙인찍고 배척하고 묻어버리고 가둬버리는 건 쉽겠지. 그렇게 다 비스무레하고 동질하고 정의롭고 틀에 맞춰 각잡힌 세상에서 숨막히고 재미없게 변함 없이 살아가겠지. 자기 안에 숨은 독특함 특별함 이런 걸 부정하면서. 나는 지극히 정상이고 올바르게 잘 살고 있다 하면서. 더 나은 삶은 보기 싫은 누군가를 지워내고 없애버린다고 이루어지지 않는다. 역동성과 가능성과 다양성의 여지를 남겨 놓은 종이 절멸 확률이 좀 더 줄어들지 않겠나. 아니 절멸 좀 하면 어떠나. 개체로 행복하게 살다 지구야 미안 이제 인류는 떠나줄게 하고 퇴장하는 건 왜 나쁜가. 갑자기 오즈 타령하다가 아무말잔치로 마무리.
+밑줄 긋기-많이 그었는데 대개 못 알아 먹는 말이 많아서 나중에 또 읽으려고 왕창 퍼 놓기만 했다.
-언어가 광범위하게 해석되고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한계가 있기에, 언어는 중요하다. 언어에 없는 것을 표현할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거나 새로운 것을 표현하기 위해 기존의 언어에 맞추려고 노력하고 이에 성공할 때까지, 기존의 언어에 없는 것은 표현될 수 없다. 언어는 알려진 것,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제한하며 동시에 반대로 그러한 앎이 언어를 제한한다.
-그러므로 퀴어링이란 무언가를 복잡하게 만드는 과정을 의미하며, 반드시 성적인 맥락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논증을 하지 않고 철학을 하는 것은 퀴어한 일이다. 또한 젠더, 섹스, 섹슈얼리티에 대한 뿌리 깊은 전제들에 도전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로 퀴어한 일이다. 그러므로 퀴어는 동성애자(또는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혹은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젠더, 섹스, 섹슈얼리티에 관한 우리의 문화적 규정이 할당한 좁은 공간을 차지하는 것의 불가능성을 깨달은 이들을 포함한다.
-임금노동 체계로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성은 20세기까지 남성에게 재정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여성들은 여전히 가정과 가족이라는 사적 세계에 귀속된 채, 남성 동성애자 역할의 범위가 협상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주점과 여관이라는 사회적 세계에 접근할 수 없었다.
-이런 점에서 여성 동성애가 상당히 최근까지도 남성 동성애만큼 많이 주목받지 못한 것은 놀랍지 않다. 애너매리 야고스에 따르면, “여성 동성애는 법이나 의학 담론에서 남성 동성애와 같은 위치를 점하지 않는다”. 남성 동성애가 공적으로 비난받을 때, 여성 동성애는 흔히 그 가능성이 무시되었다.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정체성은 모두 널리 퍼진 기대에 대해서, 즉 생물학적 여성과 생물학적 남성은 반드시 각 섹스 범주에 지정된 특정한 태도와 행동을 나타내야 하며 또한 반드시 생물학적으로 반대의 섹스에 속하면서 젠더 범주들에 부합하는 사람들과 성적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는 기대에 도전한다.
-무성애자asexual로 정체화하는 사람들을 포함시키는 것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무성애자인 사람들은 성적 욕망이 없거나 거의 없다. 범성애자pansexual로 정체화하는 사람들을 포함시키는 것도 마찬가지다. 범성애자인 사람들은 두 가지보다 많은 젠더 범주의 존재를 인정하며, 그들의 성적 욕망은 그 어떤 젠더 범주의 혹은 모든 젠더 범주의 사람들에게 향할 수 있다. 확립된 패러다임을 구해내려는 이런 가장 최근의 시도를 수용하는 사람들은 때로, 다른 이들이 더 이상 다른 문자를 추가할 필요가 없을 만큼 충분히 모호하기를 바라며 LGBTO나 LGBT+를 사용할 때에 LGBTQI, LGBTQIA, LGBTQIAP와 같은 축약형들이나 이와 비슷한 것들을 사용한다.
-이성애 규범이 생물학적으로 복잡하지 않은 여성과 생물학적으로 복잡하지 않은 남성 간의 구별을 상정하는 반면, 트랜스젠더인 사람들은 생물학이 지정한 것과는 다른 범주에 속하는 일원으로 자신을 정체화함으로써 그러한 구별을 문제 있는 것으로 만든다. 또한 인터섹스인 사람들은 생물학이 그들을 어느 하나의 성별 범주로 명확하게 지정하지 못하므로 역시 그 구별을 문제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대안적인 성 정체성의 확장된 목록에 인터섹스를 포함시키는 것은 트랜스젠더를 포함시키는 것만큼 타당해 보인다.
-이러한 인식은 대안적 범주의 구성을 요청하는 기능을 한다. 그 목적은 경험적으로 불충분하게 결정된 범주들의 집합을 또 하나의 경험적으로 불충분하게 결정된 범주들의 집합으로 교체하는 것이 아니다. 목적은, 범주들을 급격히 증가시키고 다중화하는 것이다. 이분법적 대립에 도전하는 하나의 방법은 이분법적 대립이 식별하는 차이를, 가령 여성적인 것과 남성적인 것의 차이를 부인하거나 무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러한 접근은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하는 이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에게 이러한 차이가 중요하다는 점을 무시한다. 이분법적 대립에 도전하는 또 다른 방법은 이원성을 다중성과 맞바꾸면서 대안의 범위를 확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분법적인 것에 도전함으로써 퀴어 이론은 확립된 범주들로 인해 문제를 겪지 않는 사람들뿐 아니라 그 범주들로 인해 문제를 겪는 사람들의 경험을 긍정하면서, 동시에 본질주의를 거부할 수 있다.
-퀴어 이론은 누군가가 자신을 이해하고 타인들과 관계 맺는 데 범주가 유용하거나 심지어는 필수적일 수 있다 해도, 그 어떤 특정한 범주나 범주들의 집합도 그 자체로 필연적이지 않으며 심지어는 가장 깊게 자리 잡은 범주도 수정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할 지속적인 필요성에 대한 것이다.
-섹스가 생물학적이라는 사실만으로 섹스가 출생 시 고정되거나 일생에 걸쳐 안정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저 머리 색이 개인의 일생에 걸쳐 때때로 자발적이고 비자발적인 변화들을 겪게 되듯이, 섹스 또한 전적으로 그럴 수 있다. 개인이 속하는 섹스 범주와 개인이 참여할 섹스 행위들은 그의 일생 동안 변화할 수 있다. 아주 어린 아이들조차 성적인 존재라는 것은 명백해 보이지만, 그들이 어떻게 섹슈얼리티를 실현하는지는 그들이 더 나이 들었을 때와는 아마도 꽤 다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섹스가 생물학적이라는 사실은 섹스가 항상 개인적인 선택의 영역 너머에 있음을 확립하기에는 불충분하다. 그저 머리 색이 일생에 걸쳐 선택적인 변화를 겪을 수 있듯이, 섹스 범주에 속하는 것과 관련된 다양한 특성도 그럴 수 있다. 나는 이 유추를 통해 사람들이 흔히 변덕스럽게 머리 색을 바꾸는 만큼 섹스 범주도 그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인간이 사는 동안 생물학적 특성이 변화할 수 있으며, 흔히 변화한다는 것을 단순히 인정하자는 것이다.
-당신도 알다시피, 미시간 여성 음악 축제는 여성으로 태어난 여성이 아닌 모든 이의 입장을 거부하는 정책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정의는 트랜스젠더인 사람들을 배제한다. 이런 정책은 가장 은밀한 형태의 트랜스포비아6다. 이는 여성 공동체를 ‘진짜 여성’과 ‘일종의 여성’으로 나누며, 모든 여성을 이롭게 하기 위한 투쟁에 사용될 수도 있을 귀중한 자원들을 낭비한다. BethX, 1999.
-여성으로 태어난 여성이라는 요건은 트랜스 여성들을 배제했으며, 이런 배제에 대한 격분은 캠프 트랜스Camp Trans의 창설로 이어졌다.7 처음에 캠프 트랜스는 1991년 버크홀더가 캠프장에서 쫓겨난 데 항의하는 장소로 여겨졌고 몇 년 만에 약화되었다. 그러나 1999년, 트랜스를 포함하자는 의제를 다룬 워크숍이 지지를 받으면서 MWMF와 나란히 존재하는 대안적인 축제의 장소로 다시 부상했다.
-트랜스 여성을 배제하는 것보다 덜 분명한 다른 문제는, 여성으로 태어난 여성으로 정체화하기를 꺼리거나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을 동시에 배제하거나 적어도 소외시키는 것이었다.
-또한 젠더퀴어인 사람들과 남성 또는 여성으로 정체화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이 여자아이로 길러졌다고 하더라도 이런 정책 아래 배제되었다. 2000년, 트랜스섹슈얼 여성이 아니었던 몇몇의 “트래니trannie 소년들, 보이다이크boydykes, 에프티엠FTMs, 레즈비언 어벤저스 그리고 젠더베리언트인 젊은 여성들”은 그들이 더 이상 여성으로 정체화하지 않기 때문에 혹은 동지들과의 연대를 위해 ‘여성으로 태어난 여성’으로 정체화하기를 거부했기에 축제로부터 축출되었다. Koyama, FAQ, 시기 미상.
-우리 중 많은 이가 우리의 젠더 표현 때문에 차별과 괴롭힘에 직면해야 했다. 그리고 우리는 동일한 폭력의 일환으로서 트랜스 여성들이 희생양이 되는 것을 본다. 우리가 “여성처럼 보이지 않아서” 괴롭힘을 당하든 아니면 “우리가 그럴 것을 추구하는 듯 보여서” 당하든, 이는 모두 우리가 저항하고자 하는 성차별적이고 젠더적으로 편협하며 가부장적인 체계의 일부다. Lamm et al., 2001.
-젠더 정체성, 성적 대상의 선택, 젠더 불쾌감, 트랜스젠더리즘, 트랜스섹슈얼리즘을 연속체상에 놓는 것도 문제적이다.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분리하여 둘 간의 복잡한 중첩 구조와 배열을 드러내려는 노력이 있듯이, 위에 나열된 경험의 범주들도 별개라고 보는 것이 생산적이다. 범주들 간 괴리를 숨기는 것은 일관성이나 정치적 연대를 만들어내려는 우리의 충동이다. Martin, 1994: 117.
-비디 마틴이 언급하듯이, “젠더를 안정된 핵심이라고 보는 관습적인 이해, 그리고 정체성을 담론적 실천의 효과라고 보는 포스트모던 관념 간에 세워진 대립은 한 방향이나 다른 방향에서 결정되지 않고, 전치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그들 자신에게 가장 진짜이거나 자연스럽다고 느끼는 정체성 범주를 결정하며, 이를 신뢰하는 것은 단순히 그들의 인간 존엄성과 정당한 자율성을 존중하는 일로서 인정되어야 한다. 이는 때때로 시스젠더 정체성이라 불리는 것, 즉 별다른 복잡함 없이 여성이나 남성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의 젠더 규범적인 정체성에 대해서도 어떤 방식으로든 축하를 배제하지 않는다.12 이는 또한 젠더퀴어 정체성, 즉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에 대해 확립된 기존의 기대가 스스로를 이분법적 모델의 용어로 정의하기를 꺼리거나 그럴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부적절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다양한 정체화 및 표현의 방식을 동시에 축하하는 것도 배제하지 않는다.
-이분법에 도전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것이 만들어내는 구별을 부인하거나 무시하는 것으로, 가령 여성과 남성 간의 구별을 부인하거나 무시할 수 있다. 제프리스는 이를 유일하게 가능한 접근법이라 여기는 듯 보이는데, 이런 방법은 여성과 남성 간의 구별이 많은 트랜스를 비롯한 많은 사람에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기존의 이분법에 도전하는 방법으로 좀 더 마음에 드는 것은 단 두 개의 범주가 아닌 많은 범주가 존재하도록 추가적인 대안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퀴어 이론은 이런 방식으로 이분법에 도전함으로써, 확립된 범주들에서 상대적으로 문제를 겪지 않는 사람들뿐 아니라 문제를 겪는 사람들의 경험 또한 긍정하는 동시에 본질주의에 저항할 수 있다.
-젠더가 수행적이라는 생각은 헤게모니적 이분법을 유지하는 것이 능동적 과정임을 상기시킨다. 헤게모니적 이분법을 유지하는 것은 적극적인 과정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개인으로서도 집단으로서도 헤게모니적 이분법을 의도적으로 방해하는 표현의 형식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 이것은 기존 언어를 ‘퀴어링’하는 방법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동사로 사용되는 ‘퀴어’는 헤게모니적 이분법과 관련된 생각, 기대 및 태도의 불일치에서 벗어나기보다는 그러한 불일치에 주의를 집중시키는 과정을 의미한다. 헤게모니적 이분법을 붕괴시키는 것은 비록 아주 조금일지라도, 패러다임을 ‘퀴어화’하는 데 기여한다.
-섹스와 젠더의 구분은 여성학 관련 분야에서 여전히 핵심 개념으로 여겨지며,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질문을 제기한다. 첫 번째 질문은 여성과 남성이 생물학적 현상인지 사회적 현상인지를 묻고, 두 번째 질문은 여성과 남성이 근본적으로 동일한지 아니면 다른지를 묻는다. 이 둘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질문이다. 여성과 남성이 근본적으로 동일하다고 한다면, 존재하는 차이는 우연적이거나 후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 또는 남성이 된다는 것이 학습의 결과라면, 여성과 남성은 생물학적 측면에서는 근본적으로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제2물결 페미니즘이 기여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다”라는 슬로건에 대한 한 가지 해석은 가정 폭력에 대한 사회적 수용은 오직 그러한 문제들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만 바꾸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닫힌 문 뒤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저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남녀 간 사회적 불평등의 연장이다. 반대로 레즈비언과 게이 권리운동가들은 대체로 문을 닫은 뒤에 일어나는 일들은 엄격히 사적인 문제라고 주장한다.
-섹스는 시간에 걸쳐 강제로 물질화되는 이상적인 구성물이다. 섹스는 신체의 단순한 사실이나 정태적 조건이 아니라, 규제적인 규범이 ‘섹스’를 물질화하는 과정이자 그러한 규범의 강제적 반복을 통해서 이러한 물질화를 실현하는 과정이다. Butler, 1993: 1-2.
-퀴어와 페미니즘 이론의 결합이 매력적인 지점은, 이들에게 이미 공통점이 많다는 것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이 둘은 젠더, 섹스, 섹슈얼리티가 교차하는 문제를 다룬다. 그러나 퀴어 이론은 섹스와 섹슈얼리티에 중점을 둔다. 페미니즘 이론은 섹스와 젠더에 중점을 둔다. 퀴어 이론과 페미니즘 이론의 결합의 분명한 결과는 페미니즘 이론의 맥락에서는 퀴어적 관점으로 인해 섹슈얼리티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고, 퀴어 이론의 맥락에서는 페미니즘적 관점으로 인해 젠더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는 뱡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점이다.
-한편 페미니즘 이론처럼 퀴어 이론 또한 인종차별주의와 계급주의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런 사실은, 편견은 만연하며 편견의 특정 형태를 다루려는 목표와 약속의 이론적 방향이 편견의 영속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말해준다. 억압에 관심을 기울이는 모든 비판이 똑같이 성공적일 수는 없다. 특히 초반에는, 이러한 자각이 편견을 없애고 편견에서 벗어날 가능성에 대한 절망감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다양한 규율 및 개인적 차단을 통해 생각을 걸러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기시키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이 과정은 의도치 않게 갖고 있는 편견의 여러 잔해를 포착하고 제거하는 가장 좋은 기회일 수 있다. 사실상 퀴어와 페미니즘의 관점을 연결함으로써, 이러한 여과 장치에 또 다른 거름망을 겹쳐지게 할 수 있다. 퀴어 이론, 따라서 퀴어 페미니즘은 다양성을 포용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조합을 통해 이 차단을 겹겹으로 만드는 데 제한이 없다.
-이분법적 사고에 대한 퀴어 이론의 급진적 비판에 따른 결과 중 하나는, 여성성 같은 젠더 범주뿐 아니라 여성 같은 섹스 범주를 포함하여 모든 범주의 실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실제로 여성이 없다면, 여성성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여성이 없고 실제로는 남성도 없다면, 젠더와 섹스 정체성을 중심으로 조직된 이론적 관점은 거의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페미니즘’이라는 용어가 기존의 젠더 및 젠더 이분법을 참조하는 한, 이분법적 형태의 범주화를 거부하는 것은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이 명백한 모순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표현이 지닌 모순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진 채 의도적으로 문제적 이름표인 ‘퀴어 페미니즘’을 선택했다. 예를 들어 나는 의미를 영구적으로 고정할 수 없지만 실제로는 특정 문맥에서 그것을 지시하기 위해 끊임없이 협상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포스트구조주의와 특히 데리다로부터 충분히 배웠다.9 이는 성차별주의, 인종차별 및 기타 여러 형태의 억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기대와 이상은 끊임없이 재검토되고 수정된다. 이는 기대와 이상이 달성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대와 이상은 우리가 받게 되는 판단들에 저항할 수 있는 기준을 형성한다. 성차별주의와 인종차별에 대응하기에 앞서, 관련된 의미들이 배치된 억압의 맥락과 관련하여 어떻게 고정되었는지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는 1985년 가야트리 스피박이 “전략적 본질주의”라고 부른 것을 연상케 한다. 전략적 본질주의는 공동의 목표와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들이 편의와 연합전선을 위해 공개적으로는 그들 자신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일시적으로 나타내면서, 이와 동시에 진행 중이며 덜 대중적인 의견 불일치와의 논쟁에 참여하는 전략이다.
-이성애자와 LGBT+라는 범주 둘 다에 적합한 사람들이 있고 그래서 LGBT+ 공동체의 구성원인 동시에 이성애자로 정체화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정체성이 이러한 범주에 특히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양성애자 여성과 남성이 있고, 이들이 오랜 기간 동성 파트너와의 만남을 갖지 않은 채 모노가미의 관계(일대일 관계)를 맺고 이성애자들과 실질적으로는 구별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섹슈얼리티를 표현한다고 가정해보자. 모노가미 파트너가 된 일부 사람들은 일상적인 대화에서 양성애자 정체성을 주장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일지라도, 다른 사람들은 그들과 상호작용을 맺는 데 이 사실이 대체로 무관하다고 여길 수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양성애자로 정체화하기를 주저할 수도 있는데, 이는 그들이 거주하는 주류 공동체에 정체성을 숨기기를 원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지금 새로운 파트너를 찾고 있거나 미래에 그렇게 할 것으로 기대되지 않는 한, 여성과 남성 모두에 성적 지향을 갖는다고 그들 자신을 설명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은 이성애자이거나 LGBT+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간단히 정체화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사이의 이분법, 또는 LGBT+ 공동체의 구성원인 사람들과 실질적 또는 잠재적 연대자로서 그 공동체의 외부에 존재하는 사람들이라는 이분법에 포함된 범주들은 적어도 어떤 이들에게는 똑같이 적합하지 않다.
-이성애자이고 결혼했거나 이성애자이고 독신이라는 단 두 가지 가능성을 전제하는 것은 이성애
특권의 아주 명백한 표현이다. 그러나 이보다는 덜 명백하다 해도 이성애자이거나 동성애자라는 단 두 가지 가능성을 전제하는 것 역시도 이성애 특권을 표현한다.
-루빈의 원은 무한히 나눌 수 있는 파이로 생각할 수 있다. 충분히 많은 조각이 되었을 때, 적어도 이 중 몇 조각에서라도 바깥쪽의 딱딱한 껍질 부위에 위치하지 않는 섹슈얼리티를 가진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껍질은 일탈적이다. 가장자리는 퀴어하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은 적어도 어떤 면에서는 성적으로 일탈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은 적어도 약간은 퀴어하다. 심지어 이성애와 동성애라는 한 쌍의 대조를 나타내는 섹스 파이의 한 조각에서 끈적끈적한 중심에 가깝고 껍질의 가장자리에서 멀리 있는 사람들조차도 그러하다. 껍질의 가장자리에 있거나 그곳에 근접한 성적 표현에 대한 공격으로서 레즈비언과 게이, 또는 LGBT+ 공동체가 받는 억압을 재구성하는 것은 곧 그러한 억압의 대상인 성적 일탈의 양식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단순한 연대자들은 그들 자신의 권리에 대한 이해 관계자들로 변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