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얼라이브 - 남자를 살아내다
토머스 페이지 맥비 지음, 김승욱 옮김 / 북트리거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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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5 토마스 페이지 맥비.

사람, 인류를 가리키는 man, human, mankind 같은 말을 대체할 말이 있나 궁금하다. 문득 경애의 마음(맞나)에서 피조, 하고 부르던 말도 떠오른다. Creature. 그런데 피조물, 하고 옮겨두면 또 너무 수동적인 느낌이 든다. 우리는 누군가 만들어내고 영향 받아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스스로 만들어가는 부분도 적지 않다. 그런데도 자조, 주체, 하고 사람을 부르면 또 사람이 아닌 기분이라. 에라 모르겠다. 성중립적인 말들 또는 중심을 여성으로 전환하는 신조어들을 접하지만 늘 수긍이 가는 건 아니다.
성 정체성은 그렇게나 나를 살아가는데, 세상을 바라보는 데 큰 힘을 행사한다. 지정된 성별과 스스로 느끼는, 원하는, 파악하는 성별이 다를 때 그 사람의 삶은 쉽지 않다. 사는 거 자체가 쉽지 않은데 스스로를 인정하고 선택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주변을 설득하거나 설득할 필요가 없다고 다짐하고 편견과 폭력에 맞서고 지워지는 것을 견디며 숨어 살거나 지워지는 것을 거부하거나 하게 된다. 뭔가를 끊임 없이 선택하게 만드는 세상과 싸워야 한다.
트랜스여성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 다큐멘터리, 기획 기사 같은 데서 많이 접했다. 트랜스남성에 대한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적게 드러난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기로 했다.

토마스가 남자로 살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표현은 내내 문학적이고, 주변, 신체상태, 내면 묘사가 치밀하고 섬세한 에세이였다. 인스타그램으로 저자의 페이지를 찾아보았다. 아내와 함께 있는 그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그가 자신의 뿌리를 찾아다니고 어릴 적 성학대를 가한 아버지를 직면하고 엄마에게 진짜 아버지를 묻고 강도에게 총살 당할 뻔 하다가 자신이 여자(로 태어났고 아직도 그렇게 보인다)라는 이유로 겨우 살아남는 동안 파커라는 연인, 배우자가 함께한다. 그런데 책 표지 날개에는 제시카 블룸과 살고 있다고 써 있었다. 같은 사람인가? 책의 가장 가까운 시점이 십 년 전이니 사랑은 흐르고 변하고 달라질 수 있는 거지. 그런데도 괜히 슬펐다. 책에서 파커가 남성호르몬을 맞으며 변화하는 토마스를 보고 동요하는 장면이 계속 나와서 더 그랬다.

괴물 같은 아버지처럼 살지 않기, 남을 해치지 않고 용서하는 사람이 되기, 나쁜 사람이 되지 않기, 토마스는 그렇게 살기 위해 애썼다. 가슴을 제거하고, 역기를 들고 윗몸일으키기를 하며 근육을 키우고, 남성호르몬을 맞고, 책에 쓰인 시점부터 몇 년 뒤에는 아마추어 복서가 된다. 그렇게 폭력적이거나 타인에게 위협을 가하는 존재가 아닌, 남성성을 스스로 만들어간다.
이름을 고르고, 신체적 성별을 고쳐가고, 부모를 직면하며 받아들일 사실과 그러지 않을 것을 골라내고, 그렇게 자신을 자신이 원하는 존재로 만들어나가는 토마스의 모습을 보며 생각이 많아졌다.

토마스가 10년 넘게 아버지를 안 본 것처럼 나도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지 13년이 되었다. 자라면서 20년 동안 아버지에게 맞은 적은 없었다. 20살에 술주정하며 엄마를 때리는 아빠를 노려봤다고 얼굴을 맞은 게 처음이었다. 그러고 4년 뒤 또 엄마를 때리려는 아빠를 먼저 때렸다가 얻어 맞은 날이 마지막이었다. 그날로 엄마를 데리고 집을 나왔다. 원하지 않는데 술취한 아빠에게 입맞춤을 강요당한 적이 한 번 있었지만, 성 학대라 할 만한 일을 당한 기억도 없다.그렇지만 아빠는 손가락으로 동생의 엉덩이나 성기를 찌르는 짓을 장난이랍시고 수차례 저질렀다.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며 도망다니는 모습을 나는 그저 옆에서 지켜보았다. 공부 안 하고 책상 안 치운다는 이유로 훈육이랍시고 술 취한 채 동생을 밤늦도록 무릎 꿇려 놓고 잔소리하는 모습 또한 보아야 했다. 무서워서 숨죽이고 공부하는 척하며 외면했다. 비겁하게도 내가 직접 타겟이 안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을 것이다. 조금 크고 난 뒤에야 엄마에게 주정을 하거나 동생을 괴롭히면 그만 좀 하라고 화를 낼 수 있었다. 그제서야 삼가는 척 하는 아빠였지만 술에 취하면 내가 반항했던 걸 분해하며 ‘네가 00대 나왔으면 다냐’하고 맥락 없이 화내곤 했다. 동생은 지금도 제대로 말리지 못한 엄마와 나를 향해 원망이 많다. 가장 상처 입었고 편히 살지 못한다. 가족들과 사이도 무척 나쁘다.

토마스가 아빠 로이를 만나러 가서 그와 찻집에서 이야기 나누는 장면이 가장 인상 깊었다. 토마스는 아빠의 장례식에 갈 수도 있겠다, 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빠를 다시 볼 생각도 없고 아빠가 죽어도 장례식에 상주가 될 생각도 찾아갈 생각도 없다. 이게 비겁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토마스처럼 뭔가 맺힌 걸 풀 기회도 함께 포기한 것을 안다. 사실 실질적인 위협도 있다. 이혼한 부인을 끝내 쫓아와 죽인 남자의 뉴스를 보면 남의 일 같지가 않다. 눈에 띄면 다 죽여버리겠다고 소리지르던 게 엄마가 법정에서 아빠를 대할 때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게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몇 년 전까지 끈질기게 전화와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아직도 우리의 거처를 수소문하고 다닌다는 소식에 꿈자리가 사납다.
개같은 아버지가 세상에 너무도 많지만, 그런 사람이 되지 않고 잘 자라는 아이들도 많다. 나는 아직 모르겠다. 스스로를 미워하고 내가 나쁘다고 여기면서도 그 이유를 찾지 못했었다. 그런데 결국은 그렇게 여길만한 이유를 만들고 다닌다. 나는 이제 내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 솔직하고 거짓말을 못하는 게 내 장점이라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나는 이제 그런 사람이 못된다. 확실히 좋은 사람이 되긴 틀렸고 더 나쁜 사람, 누군가를 해치고 다치게 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만 바라는데 자신이 없다. 올바르게 살겠다는 다짐은 커녕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 자체를 포기한 것 같다.
뜬금없이 씩씩한 생존자를 보면서 괜히 자괴감 느낀 날이다. 오래 아파서 그런 것 같다. 이제 거의 다 나았고 긴 병가도 오늘로 마지막. 열심히 일하고 남에게 조금이라도 도움될 만한 일을 해야겠다. 그러면 나아질지도 몰라. 나쁜 놈이 될 가능성이 조금은 줄어들 지도.

미국, 유럽 발매판은 우리나라 책 표지랑 다르다. 하나는 토막난 검은 남자의 신체, 또 하나는 종이인형 같은 사람 형상. 토마스는 열심히 그 토막들을 바로 맞추고 종이장 같이 날리는 존재를 탄탄히 만들려고 애쓰고 있다. 적어도 이 책 안에서는 그랬다. 나도 그렇게 지금보다는 강해지는 방법을 찾아야겠다. 약한 몸과 약한 마음이 악한 존재가 되기란 순식간이지 싶다. 누구도 처음부터 나쁜 사람은 없다. 잘못된 마음가짐과 잘못된 선택 같은 게 차곡차곡 쌓이다 어느 순간 훅.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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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쟁이 2020-06-07 1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구.. 병가중이셨군요.
아프지마세요.. ㅠㅠ

반유행열반인 2020-06-07 11:3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오래 갔는데 이제 거의 다 나아서 다음주 출근해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