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과 기분
김봉곤 지음 / 창비 / 2020년 5월
평점 :
품절


-20200516 김봉곤.
사랑이 멸종, 증발, 은둔한 것 같은 세상 한가운데에 부지런히 사랑을 외쳐대는 사람(들)이 흔하지 않지만 아직 있다.
그런 것도 사랑, 이라고 말해주고 보여주는 사람.
2호선을 타고 서울을 한 바퀴 돌 일이 있었다. 한강을 두 번 건너고, 지상 구간을 지날 때 햇볕이 눈부시게 객차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 책을 읽었다. 마스크를 써서 좋은 점이 딱 하나 있다.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얼마든지 웃을 수 있다. 나는 정말 웃을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마스크 뒤에서 나는 정말 많이 웃게 되었다. 다정한 미소도 있고, 조소도 하고, 부조리한 상황에서 졸라 웃겨! 소리지르며 미친 놈처럼 웃은 적도 있고, 책을 읽는 동안에는 선도 끝도 없는 감정 과잉과 사랑의 단맛과 쓴맛과 애잔한데 또 귀여워서 웃었다. 아니 이거 주인공이 다 똑같은 얼굴인데, 김봉곤 얼굴이다. 도저히 다른 인물이 안 그려지고 그래서 매주 같은 인물 나오는 미드 보는 거 마냥 정들 뻔했다. 

-시절과 기분
십 년 전 부산대 앞에 간 적이 있다. 옛 연인이자 여자사람친구를 만나는 기분. 지금의 나는, 사실 나는 이런 나야, 하고 말하지 못하고 돌아서며 그때 그게 사랑일까 아닐까 아리까리하는 마음이 생생해서 소설의 제목도 소설집의 제목도 딱이다 싶었다.
-데이 포 나이트
작년에 젊은작가상 수상집에서 먼저 읽고 두번째 읽었다.  처음 사랑이 될 뻔, 했지만 그런 게 아니었던 만남. 첫번째와 두번째 소설은 뭔가 시행착오, 실패담 모음집 같은데 그래도 처량맞지 않아 좋았다. 데이 포 나이트는 낮에 찍은 화면을 밤처럼 바꿔주는 필터라고 했지. 낮의 장면에 풀벌레 소리를 입히고. 그렇게 뭔가를 입히고 치장하며 가장해야 하는 삶. 도 생각났다. 
-나의 여름 사람에게
몇 편 읽으면 알지만 자꾸 다시 여름이다. 여름에 미친놈 수준이다. 아직 여름을 지나보지 않아 모르겠다. 
새로운 사랑의 시작을 앞두고 지난 사랑을 돌아보며 자꾸 망설이고 되새기는 이야기인데, 사랑하는 사람 따라 교실에 빨아온 커튼 핀을 꽂아주고 다리를 붙잡아주고 그러는게 재미있어서 일하는 곳에 그 장면을 묘사했다. 거기에 한술 더 떠 펜싱 선수 박상영 이야기를 하길래 한국 게이문학의 어머니 김봉곤과 아버지 박상영에 대해 설파했다. 다들 어이없으면서도 신기해했다. 누구라고요? 하고 묻고 적는 사람도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는 주고받는 것에 상관 없이 그냥 내맘대로 정했다. 미안.
-엔드 게임
이 소설이랑 다음 소설 둘다 형섭이라는, 오래 사귀고 처음 사랑했지만 계속 사랑일 수 없던 관계에 대해 나온다. 친밀감과 열정의 반비례 관계에 대한 책을 읽은 후라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피할 수 없는 사랑의 변질? 바램? 휘발? 그런 걸 읽는 일은 서글프다.
-마이 리틀 러버
게이도 게이랑 연인 아닌 친구할 수 있다, 뭐 그런 걸 보여주는 학영이라는 친구가 나온다. 헤어진 연인 H의 세컨드 마냥 계속 만나다 다시 만나지 않게 되기까지, 그리고 또다시 새 남자, 새 사랑 찾아가는 결말. 하여간에 희망차고 미래가 있고 언제나 사랑을 꿈꾸는 게이라네.
너랑은 이제 정말 친구해야겠다, 였나. 아니네.
“이제는, 진짜 너랑 친구해야겠다.“ 으아아아아아아. 
말 자체가 나쁜 게 아닌데 그런 사이와 저런 맥락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건 정말 최악일 것 같다 . 
-그런 생활
올해 젊은작가상수상집에 실린 소설이다. 첫 소설집과 앞의 이야기들을 주욱-그런 생활, 로 뭉뚱그리는 일, 그런 뭉뚱그리는 말로 되묻는 가족의 목소리를 듣는 일은 또 얼마나 아픈 일일까, 그렇게 묻는 마음은 또 어땠을까 싶었다. 가장 친한 사람의 인정을 갈구하면서도 너무 다른 마음에 선을 긋고 외면하는 일, 결국 다정함을 되찾고 알기 전과 마찬가지로 서로를 대하는 일. 엄마와의 관계에서는 받아들여지는 입장이고, 새 애인과의 관계에서는 받아들이는 입장이 대조되는데, 그와중에도 자기 긍정, 난 이런 사람이야, 나를 이대로 받아들이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 하는 높은 자존감이 부러울 지경이었다. 

그래서 재미있게 잘 읽었다. 여름이 오면 여름, 스피드도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처음 읽는 마음과 지금 마음이 달라졌을지 그대로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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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쟁이 2020-06-07 1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봉곤 아직 못만나봤는데. 궁금하긴 해요.

반유행열반인 2020-06-07 12:30   좋아요 0 | URL
봉곤이는 큐피드의 현신이죠. 첫 소설집보다 저는 이게 나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