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겁니다 - 괄호 안의 불의와 싸우는 법
위근우 지음 / 시대의창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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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3 위근우

직장 내 성희롱. 더러운 기억은 이상하게도 기억에 오래 남는다. 그때의 상황도, 이물스럽고 불쾌하고 무기력한 기분도 장면과 함께 상세하게 떠오르곤 한다.
주로 주요 일의 무대가 아닌, 회식자리, 야유회 같은 곳에서 사달이 난다. 개저씨들은 일터만 벗어나면 마음이 헬렐레 뜨는 건지 원래 글러 처먹은 족속인지. 그렇게 점잔빼던 인간들이 왜 비슷한 분위기에 술이라도 들어가면 그렇게 찌질하고 추잡해지는가.

2008.
신임 발령지. 보스는 내 학교 선배였다. 일한지 몇 달 되지도 않은 꼬꼬마 신규에게 수시로 일 잘해 참, 하고 칭찬을 해 주었다. 다른 동료나 상사들이 보스가 너 일 잘한다더라, 칭찬하더라, 하고 전해주는 일도 많았다. 뿐만 아니라 일에 곤란이 있어 의논하면 잘 듣고 조언과 대안을 곧 잘 건네주었다. 머리가 좋고 괴롭히지 않고 일 잘하는 보스.
공식 회식은 아니었다. 부장 몇과 보스, 젊은 일꾼들 몇이 밥을 먹고 노래방에 갔다. 남자부장 하나가 여자 선배 한 명을 끌어 안고 부르스를 췄다. 선배는 난색을 표하면서도 어색하게 끌어안긴 채 끌려다녔다. 술취한 그 부장이 갑자기 선배의 콧구멍에 티슈를 뽑아 쑤셔넣기 시작했다. 선배가 뿌리치며 손을 쳐내도 거듭 그랬다. 지금 떠올려도 분노하는 장면이다. 강간을 목격하는 것만큼 충격적이었다. 다를게 뭔가. 의사에 반해 남의 신체에 뭔가를 밀어넣는 행위. 보는 나조차 치욕이었는데 말리지도 못하고 멍하게 있었다. 그때 보스가 다가와 춤을 추자고 했다. 거절 못하고 손을 잡았다. 개같은 부장처럼 몸을 끌어안고 밀착하지는 않았다. 그저 양손을 엉거주춤 붙잡힌 나의 팔을 천천히 흔들었다. 불독처럼 검고 쭈글대는 얼굴에 비해 손의 촉감이 부드러워 놀라웠다. 부드러운데 불쾌하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여 한동안 그러고 있었다.
어느 날에는 단체 건강검진이 있었다. 가운도 입지 않고 런닝만 걸친 보스에게 안구테러를 당하자 나도 모르게 눈을 돌렸다. 왜 돌려? 보면 어때서? 보스가 능글거리는 소리로 말했다. 한술 더 떠 내게 물었다. 그 가운 안에는 뭐 입나? 안 입나?
나는 태연한 척 대꾸했다. 어디가서 그런 거 묻지 마세요. 물으면 안 되나? 안 되죠. 큰일나요.
남의 일처럼 말했냐 왜. 넌 왜 큰일로 만들지 않고 왜 항의하지 못했니 어린 나야.
아니지. 어린 나야 넌 잘못 없다. 보스 개새끼야 밥은 잘 먹고 사니. 그런데 왜 난 미워 못하지. 발령지도 옮기고 보스도 퇴임한 지금 와서 그때 왜 그랬어요? 사과해요! 하면 보스는 멀뚱한 얼굴로 너 왜 그래 내가 너 예뻐했는데, 우리 잘 지냈잖아 했겠지.

2014.
새로 전입 온 남자 동료. 기기도 잘 다루고 일도 잘 도와준다. 나이는 삼촌뻘. 단체 외부 연수(라 부르는 야유회)에 갔다. 멀리 화려한 성이 보였다. 테마파크인가 하고 한참 보다보니 00모텔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 저 성 놀이공원인 줄 알았는데 모텔이에요. 내 말에 동료들이 어머, 그러네 했다. 삼촌뻘 동료가 말했다. 왜 새삼스럽게, 남자친구랑 옛날에 많이 가봤을 거 아냐? 내가 말했다. 그런 말 하시는 거 아닙니다. 동료가 난감한 표정으로 웃었다. 내가 뭐 잘못했구나 하는 표정이지만 사과는 안 했다. 하면 안 될 말씀 하셨어요. 사과하세요. 미안합니다. 동료는 곧바로 사과를 건넸다. 그러고 뭐, 나는 그 분을 썩 좋아하진 않았지만 4년 가까이 별 탈 없이 잘 지냈다. 언제나 나에게 예의바르게 대했고 내가 일하다가 클레임해도 늘 흔쾌히 받아들이고 고치는 게 좋았다. 물론 나에게만 쿨하고 꼰대 아닌 척 했지 남들에게는 늘 어렵고 꼰대에 가까운 평가를 받았다. ㅎㅎㅎ

2008년과 2014년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나이를 먹었고 경력이 쌓여 넌 어려서, 신규라 뭘 모르지, 하는 소리를 들을 일이 없어졌다. 발령지가 바뀌기도 했다. 애도 낳고 결혼도 했군. 나이로 권력으로 우격다짐으로 누르는 힘에 조목조목 근거와 규정과 이유를 대며 따지는 법을 배웠다. 열심히 기록하고 녹음하는 집요함도…또…

2009.
외부 행사에 지원해서 참여할 일이 있었다. 다양한 근무지 사람들이 모여 몇 박짜리 행사를 치렀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활동 동안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나를 자주 쳐다보고 한 번은 단체로 일 끝나고 남아 뭐 먹을 거 사주며 대학생 아들 자랑하던 아저씨 한 분이 있었다. 그냥 행사 끝나고 말면 좋은데, 밥이나 먹고 끝 했어야 하는데, 총괄하던 관리자가 사람들을 노래주점?에 데려갔다. 그런 곳은 처음 가봤다. 노래방 같은데 술집 같은 곳이었다. 사람들이 화면 앞으로 가서 노래를 불렀다. 나는 그냥 앉아 있었다. 겨우 맥주 몇 잔에 꼴은 옆에 앉은 아저씨가 나를 보고 헛소리를 뱉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이렇게 푸는 거야, 너는 그걸 알아야 해…. 또 한참 중얼대다가 난 니가 좋다…. 소름 돋았다. 분위기가 다같이 화면 앞쪽에 모이는 상황이어서 자리 피할 겸 앞으로 나아갔는데 갑자기 뒤에서 그 아저씨가 껴안았다. 너무 기분이 나쁘다 못해 무섭고 징그러웠다. 울면서 뿌리치고 뛰쳐나갔다. 뒤늦게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같이 일하던 사람 몇이 따라 나와 우는 나를 달랬다. 보셨죠? 봤어요? 00씨가 뒤에서 갑자기 껴안았다구요. 다들 보지 못했다고 했다. 어떻게 할까, 뭘 원해? 데리고 나와서 사과 시킬까? 그때 그 아저씨가 따라나와 이쪽을 흘겨보며 화장실 쪽으로 갔다. 내가 계속 울며 고개를 흔들자 남자 한 명이 그 아저씨가 이쪽으로 오지 않도록 따라붙어서 빌어먹을 룸으로 다시 데리고 들어갔다. 다시 얼굴 마주하고 싶지 않아요. 그 순간은 그랬다. 술취한 사람에게서 진정한 사과가 나올리도 없고 또 괜한 해코치를 당할까 무서웠다. 그러자 그 남자가 말했다. 이거 그럼 그냥 덮는 거다. 나중에라도 다시 이야기 꺼내면 안 돼.
어떤 위로도 대처법도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덮자는 이야기를 먼저 했고 그 뒤에 따라오는 말은 없었다.
이후 직장 회식에서 노래방에 갈 일이 있었다. 앉아 있는데 누군가 노래를 해 보라며 나를 잡아끌었다. 할머니 동료였는데도 이상하게 노래주점에서 껴안던 그 아저씨가 오버랩되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견딜 수 없어져 울면서 노래방을 뛰쳐나왔다. 밖에 쭈그리고 앉아 이유도 모르고 한참을 울었다. 그렇게 한 동안 노래방 같은 어둡고 폐쇄적인 장소를 갈 수 없게 되었다. 뭔 공황장애 같은 게 생겼던 것도 같다. (그 이후로 노래방 갈 일이 한 번도 없었고 지금은 혼자 들어가는 코인노래방 덕에 뭔가 노래방 공포증은 극복된 것 같은 기분이다.ㅋㅋ)
덮자던 남자는 내가 매해 가야하는 어떤 다른 행사의 참가자 안내 영상에서 다시 마주했다. 같은 영상이 몇 년간 반복되었고 그 때마다 그냥 덮자고 말하던 얼굴이 계속 되풀이해 떠올랐다.
다음 해 내가 참가했던 그 외부 행사는 여전히 하고 있었다. 나는 당연히 참가할 마음을 먹지 않았다. 그 아저씨는 여전히 멤버로 참여하고 있었다. 덮으라고 하던 아저씨도 마찬가지였다. 촬영이나 영상 편집에 능하다고, 계속 같이 하자고 술자리마다 다독이던 그의 동료들의 모습이 생각났다. 남들에게 보여줄 가시적인 성과물을 제시하는 그는 그들에게 중요했다. 그가 생리 때문에 수영장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참가하지 못한 여학생들에게 독일군 장교 좀비가 내장을 파먹는 영상을 틀어줘서 아이들이 이건 아동학대에요, 하고 항의했던 사실은 누구도 궁금해하지도 알지도 못했다. 그걸 지켜보던 나도 그저, 다른 영상을 찾아 틀어주자고 했을 뿐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했다. 뒤늦은 후회를 했다. 공론화할 걸. 그래서 사과도 받고 저 행사에 저 사람이 더는 이름을 못 올리게 했어야 해. 반성하고 몸사리며 일했을까? 아무래도 또다른 나쁜 짓을 나쁜지도 모르고 계속 했을 가능성이 높다. 잘못을 잘못으로 짚고 가야할 큰 이유. 그래서 앞으로 비슷한 일이 있으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기로 다짐했다.

뭐 그런 일들이 있었다. 왜 저런 일들이 일어났나. 나는 그저 어리고 작고 약한 여자였다. 비스무레한 중년의 경력있고 일하는 분위기 좀 안다 하는, 일 좀 잘 한다, 하는 아저씨들은 약간 일의 분위기를 벗어난(그렇지만 여전히 일터의 연장인) 장소와 시간에서 그런 여자에게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행동했다. 그러면 안 된다는 말을 교육을 받지 못하거나 귓등으로 듣고, 저지르고도 거듭 용인받았다. 부조리다.
지금의 내가 그런 일을 겪지 않고, 비슷한 상황에 처해도 그 자리에서 문제 제기를 하고 대처할 방법을 미리 궁리할 수 있는 건 내가 단단해진 이유도 약간은 있겠지만, 이제 어리고 어리숙함을 벗어난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곧, 구조가 바뀌지 않고 개인에게 알아서 대처하라고 맡겨 두는 한, 또 다른 사람들이 이유가 되지 못할 어리고 작고 약하고 여자라는 이유로 비슷한 상황에 취해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구조를 바꾸는데 어떤 보탬도 되지 못했다. 오히려 방관자의 위치이고, 심지어는 열심히 움직이며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냉소하는(바뀌겠어? 그게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는 거 맞아? 올바른 방법이 맞냐고?), 힘을 빼놓는 자세도 여러 번 취했던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를 여러 번 돌아보게 되었다. 모든 주장과 논조를 다 동의할 수는 없지만, 논리적으로 설득되는 부분이 여러 번 있었다. 나의 틀림에 대해, 그들의 틀림에 대해. 여성과 성소수자와 장애인에 대한 수많은 편견과 차별을 목도하고 알면서도 그걸 웃음거리 삼는 부조리에 대해.
그래서 화력을 보태지는 못하더라도, 힘빠지는 말을 보태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거기에 더해 열심히 싸우는 이들을 응원하기로 했다. 한참 부족하지만 네거티브하고 말 안 들어 처먹는 나 치고 꽤 나아진 거야 얘도라…

대중문화 비평 특성상 책의 소재 대부분이 2017-2018년 이슈가 된 방송 컨텐츠나 시사 논쟁이었다. 내가 아는 사건이 거의 없어 새삼 놀랐다. 그럼에도 잘 모르고 또 그저 웃고들 넘어가는 일들에 비판과 성찰을 요구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목소리의 중요성도 느꼈다. 비평의 존재 이유가 거기 있는 거지. 불편하고 의문에 대해 답하거나 반박할 궁리를 하고 그렇게 말이 오고가면서 알려져야 공고화된 구조도 흔들리고 무너지고 다시 세울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말하는 입을 막지 말자. 귀를 기울이자. 할 말을 미루지 말자. 하는 말이 약한 이를 다치게 하는지 먼저 살피자. 다짐이 많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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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0-01-05 0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엉망인 개저씨들 이네여...!!! 부들부들! 제가 다 화납니다. 그런데 또 그자리에선 분위기 망치기 어려우셨겠죠. 그 모든 분위기에 균열을 낼 수 있도록 더 말하고 생각하고 설치는 불편한 여자애가 되겠습니다!!( 다짐!)

반유행열반인 2020-01-05 02:36   좋아요 1 | URL
씩씩하고 다정한 쟝쟝님! 감사합니다. 저는 이제 제가 눈물 빼는 대신 나와 주변 이에게 그런 말한 행동한 이들 눈물 쏙 빼게 혼내주는 사람 되고 싶네요. 야심차다. ㅋㅋ

반유행열반인 2020-01-23 0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장내성희롱대처법
http://m.psychiatric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18377&fbclid=IwAR1nyXIgURKy-t4Fb_cO1cSyoxQ9hqMXYH5HSu1PpyYdfrHe5_3VTJrOb2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