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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법
오한기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8월
평점 :
-20191103 오한기
한참 전에 친구에게 물었다. 여자 말고, 퀴어 말고, 젊은 남자가 쓴 걸로. 좀 제대로 미친 놈으로. 오한기 읽어보라고 했다. 젊은작가상이랑 또 무슨 단편집 같은 데서 맛보기로 한 편씩 보았다. 약간 이상한 놈 같긴 했다. 그러다가 신간이 나와서 사 보았다.
표지부터 이상하다. 살색-연주황-살구색이 된 그 색 표지에다, 내가 며칠 전에 산 유아용 실리콘 식기의 촉감이다. 만져본 적 없지만 리얼돌이 이런 느낌일 것 같다. 책을 읽으려면 남의 가죽데기 벗겨 감싼 듯한 표지를 붙들고 있어야 한다. 나쁘지는 않았다.
뒷표지에 김봉곤의 추천사가 있다. 작가들이 남의 책 추천해주는 말 속표지나 겉표지에 쓰는 게 왠지 싫었다. 조남주가 구병모 장편에 뭘 끄적여놨을 때 특히 분노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나는 그냥 조남주를 싫어할 뿐이었다. 김봉곤은 오한기가 천재라고 하는데, 천재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오래 틀어박혀서 많은 생각을 하고 썼을 것 같긴 하다. 이걸 보고 나니 작가가 추천하는 소설, 괜찮은 것 같다. 구병모가 윤이형 신간 소설집에 추천을 써주고, 기왕이면 김봉곤이 박상영 새 책에 진정한 퀴어문학의 아버지, 라고 치켜 세우면 박상영이 김봉곤 새책에 아니 무슨 소리, 너야말로 퀴어문학의 어머니, 그러면 아무나 평론가가 툭 튀어나와서 니들이 새 시대의 쌍두마차, 이러고 하하호호 하는 거다. 비뚤어진 팬심이다.
소설 자체는 재미있게 읽었다. 수많은 전생이 되어 보고 사물이 되고 잭을 노예로 부리고 병든 소와 나무와 나로 분열되고 기숙시설의 관리자가 되었다가 다시 시설의 수용자가 되었다가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재미있었다. 자화상? 그림도 완전 웃기고. 아 그러는 와중에 내가 썼거나 쓰고 싶은 단어들을 또 이미 열심히 늘어 놓아서 살짝 주눅이 들지만 그래도 뭐 세상에 어휘라는 건 정말 한정된 거잖아? 어떻게 새로울 수 있어? 배열만 살짝 바꿔야지 하는 비양심적인 생각도 들었다.
구색은 다 갖췄기 때문에 성범죄도 자주 나오고 폭력은 당연히 나오고 자살, 자해, 고문, 비리, 학대, 사기, 약물, 신체절단, 살인, 방화, 사랑 고백도 나온다.
나는 너를 사랑해.
나무가 진진에게 고백한다.
왜 네 마음대로 나를 사랑하는 건데? 기분 나쁘게.
내 마음대로 사랑하지도 못해?
당연하지.
그런 건가.
응.
내가 주제넘은 건가?
응.
미안하다.
어쨌거나 나무는 그루를 낳고 진진은 하얀사과가 되고 소원대로 토끼머리는 토끼머리가 절단된 채 불타 죽었다. 꺄르륵. 병든 소는 뭔가 어디 무서운 영화에서 본 것 같은 느낌이다. 아, 그건 돼지였다.
오한기의 소설책은 처음 보기 때문에 재미있었는데 아직까지는 마음에 드는데 내 취향인데 나중에 예전 소설들을 봐도 비슷하다면 이 새끼 똑같은 걸 계속 무한반복하고 있군 하고 욕할지도 모른다. 김사과는 뭔말인지 몰라서 재미없다고 뭐라고 했는데 오한기는 그나마 뭔말인지는 알겠어서 재미있다고 칭찬중이다. 여혐이네. 나새끼 죽어라. 이제는 어디가서 미친놈인 척 하지 말고 착하게 살아야겠다. 세상에는 상상력 창의력 깡패인 제대로 미친 예술혼들이 넘쳐난다. 저는 아주 평범하고 소박한 소시민입니다. 가끔 이런 거나 읽으며 착하게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