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나날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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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7 제임스 설터

세 번째 보는 영감님 소설. 산문집 포함 네 번째 책.

책을 읽는 중에 결혼이란 뭘까 생각해 보았다.
바깥 온도가 36도를 찍은 날, 시금치가 든 냉동피자를 오븐에 돌리고 얼린 망고를 우유와 함께 믹서에 갈았다. 서른 중반이 넘어서야 에어컨을 소유하게 된 부부와 그들의 큰아이는 서늘해진 식탁에 둘러 앉아 간단한 점심 식사를 했다. 전날보다 3도 낮아 덜 더운 날, 맞창을 열어 부는 바람을 맞으며 오늘은 에어컨 안 켜도 괜찮네, 배달앱으로 만원 할인을 받아 치킨을 시키고 삼 년만에 쿠폰 열 장이 모여서 다음에 또 만원 할인이다, 종알대며 점심을 때운다. 더운 날 같이 있을 곳을 찾아 거리를 헤매지 않는 삶. 진득하니 같은 점포에 딸래미가 좋아하는 똑같은 메뉴의 치킨(뿌링클!)을 가끔 시키고 대부분은 직접 지은 쌀밥에 반찬과 국을 나눠 먹는 삶. 패턴화되어 지루하지만 안정적이고 예측가능하고 익숙한 주말을 보낸다.

네드라와 비리와 프랑카와 대니가 이루었던 가정은 여기에 더해 보다 더 사교적이고 더 아름답고 사람들이 꿈꾸는 이상에 가까웠다. 주변 사람들이 보기만해도 흐뭇하고 머무르면 편안하고 좋은 이웃 아름다운 부인 준수한 건축가 귀여운 아이들의 교외 주택. (도시의 삶이지만) 목가적이고 잔잔한 묘사들을 견디면 곧 관능적인 장면이 나올 것이다! 할배 소설은 늘 그랬다! 기대하면서도 이 잔잔한 풍경이 언제 깨어지나 조마조마했는데 백 몇 페이지쯤 가니 역시나 할배는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네드라에게는 지반, 비리에게는 카야라는 애인이 있다. 여러 번 성애 장면이 나오지만 가족끼리 그러는 게 아니라는 말을 충실히 따르듯 네드라와 비리의 신체 접촉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아이들은 자라고, 그 아이들을 위한 명절(성탄절, 부활절 같은) 이벤트를 준비하고, 친구들과 근사한 저녁 식사를 함께 하고. 나이들어가는 부부는 각자의 위대한 꿈을 꾸고 둘의 사이는 점점 멀어진다. 런던여행에서 네드라와 비리가 완벽한 부부를 만났을 때 남들이 자신들을 보듯 그들을 본 후에 둘 사이가 끝난 것이 아이러니 같았다.
이혼 후에도 각자의 삶은 이어진다. 떠나려던 네드라는 삶이 저물 무렵 다시 애머갠셋으로 돌아온다. 반대로 남겨진 비리는 로마로 떠났다가 그에게 열정적으로 사랑을 구하는 리아를 만나 새 가족을 꾸린다.
결혼생활이 무너져가는 걸 보는 건 안타깝고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래도 소설 덕에 (탓에) 네드라로 살고 비리로도 살아보았다. 카펫 위에 엎드리고 헤어진 연인의 빈 아파트에 망연자실하고 영국에도 이탈리아에도 가고.

쓰여진 것만 남았다. 영감님도 가고 부부도 사라지고 아이들은 자라고 집은 팔렸다. 이 소설이 남았다.
자주는 아니겠지만 두고 몇 번 더 읽고 싶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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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7-08 13: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정이란 무엇일까요..... 이 책 보고 더 알 수 없었다.

다시 읽을 때가 온 것 같네요. 이 책의 문장 하나 하나에 너무 반해서, 설터 영감님이 벗으라면 벗겠어요- 하는 마음까지 되고 말았더랬습니다.

물론 벗는 것은 마음의 빗장을 말하는 것으로써....

반유행열반인 2019-07-08 13:50   좋아요 0 | URL
정말, 밑줄을 골라 그을 수 없어서 형광펜 도료에 푹 담궜다 꺼내고 싶은 책이었습니다...거기에 보너스로 제가 syo님의 존재를 모를 때 쓰신 옛 가정과 미래 가정?에 관한 글을 친구가 남긴 글-로 알라딘이 띄워준 걸 읽고 이건 형광펜 정도가 아니라 3D프린터로 박제해 놓고 싶을 정도로 좋았습니다. 뜻밖의 소득.

syo 2019-07-08 13:51   좋아요 1 | URL
뭐죠.... 무슨 글을 보신거죠? ㅋㅋㅋㅋㅋ 어서 얘기해봐요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19-07-08 13:54   좋아요 0 | URL
그...어머님이 정말정말 예쁘시네! 할 사진 붙은 거랑 아...여친이 교사인데 진짜 눈치없이 TMI 복지포인트 관료제 어쩌구 잘난 체 했네...그리고 야하다고 뭐라한 글 쪽이 더 좋구만...그 두 개랑 하여튼 연결된 글 나머지 다 봤습니다. ㅋㅋㅋ이게 좋네요. 뭐 하나 새로 읽으면 응, 난 예엣 날에 읽었지롱-하고 흔적 남겨 두신 걸 따라가는...뒤쳐진 자의 즐거움

syo 2019-07-08 13:57   좋아요 1 | URL
제가 저에 대해서 정말 오만 정보를 다 흘리고 다녔군요 ㅋㅋㅋㅋㅋㅋㅋ 왘ㅋㅋㅋ 나도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