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19 제10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박상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평점 :
-20190704
브로콜리너마저-잊어버리고 싶어요
https://youtu.be/S_ttre1GtZc
마지막 소설을 읽다 갑자기 이미상 작가가 너무 궁금해져 검색했다. 등단작 겸 수상작인 이 소설 말고는 별다른 정보가 없었다. 유튜브에 시상식 소감 썸네일이 떠서 눌러 보고 아 이렇게 생긴 사람이구나 그거 말곤 얻은게 없다. 다음 작품이 궁금해졌다.
내친 김에 다른 작가들 영상도 봤다. 한심하게 작가 얼평을 한다. 음 주란이 살 빠지니 예뻐졌군. 공평하게 살찌고 나니 외모는 상영이보단 봉곤이 손을 들어주고 싶다. 특히 상영이는 술살 같고 탱탱 부었는데 저렇게 살다간 금방 죽지 싶다. 단명한 천재하지 말고 좀더 건강히 오래 살아남아 많이 써다오. 음. 반말해서 미안해요.
두 작가 빼고는 다 한번씩 읽어봐서 기대치가 높았던 것 같다. 항상 걸작일 순 없으니 괜찮다. 걸작이 아니래도 남들보단 나은 거니 또 괜찮고 계속 쓰고 있으니 또 괜찮고. 잘 읽었습니다.
-박상영 우럭 한 점 우주의 맛
지나간 사랑타령과 투병하는 엄마와의 꼬인 관계를 교차하는데 이야기를 여전히 잘 풀어내는 것 같다. 사랑에 빠지는 과정, 특히 사랑의 대상이 되는 상대에 대한 인물묘사는 늘 상세해서 옆에 후줄근한 운동권 출신 꼰대 게이아저씨가 앉아 있는 걸 보는 기분이었다.
- 김희선 공의 기원
이런 식의 서술이 손보미 전유물이 아닌 걸 이제야 알았다. 누가 먼저냐고 따져볼 필요도 없고 축구공의 역사니 공박물관이니 찾아볼 의욕도 못 느끼고. 내가 축구도 공도 큰 관심이 없어서 별 흥미를 못 느끼고 읽었으려니 하고 싶다.
- 백수린 시간의 궤적
프랑스어학원이 배경인 작가의 소설이 무척 많은 것 같다. 몇 개 보지도 않았는데 그런 기분이다. 만나고 가까워지고 빈정상해서 멀어짐 다시 돌아봄. 이런 것 많이 쓴 작가를 읽은 것 같은데 까 먹음. 어쨌든 백수린은 의외로 나한테 잘 맞고 잘 읽혔다. 의외다 항상.
-이주란 넌 쉽게 말했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이게 뭐야 왜 이렇게 울어. 왜 이렇게 힘들어. 공감하지 못하고 그냥 안쓰럽기만 했는데 방금 제목을 다시 보며 뒤통수를 팍팍팍 맞은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 싶었다. 부디 내가 뱉은 모든 말과 글과 행동과 눈빛의 죄악이 그대들에게는 하찮고 하찮은 것이기를 아무런 영향도 불행도 몰고 오지 못할 부스러기도 남기지 않는 완전한 망각이 되기를.
-정영수 우리들
두 편인가 보는데도 나랑 안 맞는다. 나도 모르게 오그라들어. (방금까지 이렇게 안 산다 해놓고 죽어라 그냥) 정은 현수 커플과 화자의 관계는 흥미로웠다. 사실 셋 다 짜증났다. 출판 편집인을 관찰자로 끄집어 들이는 순간 뭔가 완전치 못하구나, 조만간 쫑내겠구나, 했는데 또 이렇게 한국식 막장 관계일 준 짐작을 못해서 또 새롭긴 했다. 딱 거기까지 좋았고. 그 둘 사이에 양아들마냥 끼어 완벽한 듯(척) 한 그들 관계의 목격자이자 보증인 마냥 굴고 즐거워하는 화자의 유아적인 모습도 진저리쳐졌다. 뭐 이런 짜증과 진저리를 유도한 거라면 성공적.
- 김봉곤 데이 포 나이프
제목이 영화 필터링 기법인 걸 처음 알았다. 항상 우리 봉곤님한테는 이것저것 많이 배워. (카멜토라든가...또 욕할 뻔)
자기 뿐 아니라 타인까지 파괴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닌 걸 알았으니, 지금은 더 나아졌으니 다행이야. 뭐 그런 낙관은 좋았다.
손편지든 메일이든 서간문은 이 시대에는 소설 속에만 남아 있는게 아닐까, 생각했다. 소설 속 등장하는 편지의 일부든, 편지 형식을 빈 칼럼이든, 처음부터 끝까지 화자가 아예 편지를 보내는 식(이인칭?)으로 서술을 진행하든. 편지 보낼 일 없고 받을 일 없는 세상을 살고 있다. 그런데 문득 편지가 엄청 쓰고 싶었다. 이 소설 읽기 전부터 그랬다. 그래서 마구 써서 벌써 몇 천자를 넘어가고 있는데, 부치지는 못할 것 같아. 이렇게 긴 걸 읽으라는 거 자체가 민폐야.
이번 소설 읽으면서 불만이 많아졌다. 이 소설 자체에 대한 불만은 아니고.. 게이들의 성애만 남고 다른 건 다 어디로 가 버린 소설 세상이 불만. 이성애자 섹스 내놔. 왜 이젠 숨만 쉬어도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기분인거지. 날뛰는 미친놈들 다 사라지거나 몸을 사리고 나는 많이 재미없어졌다.
이 책의 두 퀴어 화자를 잠시 여성으로 착각하거나 가정하고 읽어봤는데 그랬다면 이 상을 받았을까 싶었다. (욕 먹고 매장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지) 여성 화자 또는 남성 화자가 이성을 대상으로 사랑을 갈구하는 감정을 이렇게 날 것으로 그렸으면 그때도 좋게 봐줬을 거야? 또 궁금해. 소설이든 미술이든 대상화 없이 예술이 존재할 수 있는거야? 결국 무얼 표현하든 표현의 소재가 되는 한 우리는 남들을 수단이나 대상으로 삼고 마는 거 아냐?어느 정도까지 허용할지 누가 정하는거야?아니, 한계를 두긴 둬야 하는거야? 진심 궁금해서 그래. 내 개똥 같은 이야기는 이제 다 잊어버리세요. 레드썬.
여튼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아지게 하니...잠깐 동안 흠 이제 봉곤제 소설은 그만봐도 되지 않을까? 했지만 아마 새 소설집이 나오면 또 읽을 것 같다.
주석이 생뚱맞았다. 약자를 풀거나 일본어 단어 뜻 소개나(아시바-비계-해 놓으면 또 사람들 사전 찾아볼 걸. 비고츠키 공부나 공사장이라도 뛰어보지 않으면 자꾸 돼지고기에 붙은 그게 생각난다.) 그냥 옆에 바로 괄호쳐주지. 주석으로 다니 겉멋처럼 보여. 이것도 잊어버려, 레드썬!
- 이미상 하긴
두 가지 점에서 놀랐는데, 연령대로 봐선 나랑 비슷한 시기 대학 다녔을 작가가 조금 더 윗세대 운동권의 후일담?이랄까 그런 걸 이런 식으로 그린 게 놀라웠고, 아이를 키워봤대도 대입을 준비할 나이가 되려면 한참 멀었을 텐데 그런 부모의 욕망과 기대치와 어그러짐을 생생하게 그려 놔서 또 놀라웠다.
엄청나게 슬프고 역겨운 소설이고, 부모된 자로서 거울을 보고 환멸을 느낄지 끝내 정당화할지 생각이 많이 들게 하는 소설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보미나래가 내 자식은 아니지만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 전에 내 자식들을 덜 불행하게 할 방법 먼저 궁리하라고. 아니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마라 좀.
앞에서도 말했지만 다음 소설이 기대되는 작가다. 요시, 한 명 건졌어.
언어의 오염에 대해 잠시 생각했는데, 신랑감 신부감 사위감 며느리감 다 안 이상한데 딸감에서 잠시 움찔했다. 작가는 분명 그런 나쁜 말 모를거야. 나는 대체 이런 말을 왜 알고 있는 걸까. 잊어 버리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