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여행의 이유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6월
평점 :
판매중지


-20190626 김영하
책꽂이를 하나 더 들였다. 120센티 폭에 4단짜리. 겨우 비운 벽에 딱 맞는 크기를 찾는게 쉽지 않았지만 찾았다. 처음 보는 중소기업 브랜드에 상품평도 없어 불안했고 배송도 열흘 걸렸다.
막상 받으니 혹시는 역시, 들뜬 필름지, 선반과 칸막이 사이의 넓은 틈, 맨 아랫단 레일 없이 나무조각으로 대충 끼워 맞춘 서랍과 도어의 날카롭고 위험한 마감까지 대실망이었다. 14개월짜리는 왜 이렇게 위험한 것만 골라 쉬이 서랍을 빼 내던지고 도어를 열었다 닫았다 하며 상처날 확률을 높이는지. 반품을 고민하다 물티슈를 열 장쯤 뽑아 톱밥 먼지를 닦고 그냥 쓰기로 했다.
이제 집 안을 차지한 책꽂이의 가로폭이 10미터를 돌파했다. 이렇게 말하면 엄청 넓거나 다층의 집에 사는 것 같지만 그냥 평범하고 크지 않은 아파트다. 책꽂이 종류와 높이가 2단부터 5단까지 다양하고 소파 뒤에 대충 포개진 부분이나 베란다에 놓인 책장도 있다.
내가 7살 때 산 어린이 그리스신화나 97년 밍크 같은 건 좀 버려야 하는데. 책도 아닌 상장이니 일기니 플레이어도 없는 기스난 LP판 뭉치니 초딩 때 낙서한 연습장은 왜 꽂아두는 건데. 구성원의 집단적 저장 강박증의 결과 결국 이중으로 꽂히고 가로로 눕힌 채 쌓인 책들의 해결책은 책꽂이를 더 사는 쪽으로….
새 책꽂이는 일종의 판테온?처럼 내가 내 돈 주고 산 2권 이상의 저자들로 채우기 시작했다. 센터는 마땅히 토지 빼고 단일 작가 최다 보유-열다섯 권을 십 수년 간 차곡차곡 모은 밀란 쿤데라 영감님께 바쳐야 마땅했지만 이미 영감님의 고정석이 있는 마당에 노구를 함부로 옮길 수는 없었다. (더구나 새 책꽂이가 더 싸구려에 구리다고…)
그래서 판테온의 영광은...작년 출산 이후 충동적으로 쓸어모은 소설책 작가들에게 우선으로 돌아갔다.
4월에 꼬맹이 낳고 5월쯤 정신을 차리니 애기 낳기 전 다 읽으려다 못 본 책에 눈이 갔다. ‘시체를 부위별로 팝니다’ 이게 태교용으로 적합하긴 한거냐...어쨌든 새벽 수유 때 노란 전구불 켜고 멍 때리거나 스마트폰 붙잡고 있는 것보다는 뭐라도 읽자 싶어 읽기 시작했다. 수유 의자 앞에 간이책상과 독서대 올리고, 읽고, 중고책 쇼핑하고, 반복했다. 하루에 열 번 가까이, 총 서너시간 젖을 먹이니 강제 독서, 거기에 애기가 푹 자주면 추가 자유시간까지. 최고였다. 읽다 말다 하다보니 주로 가벼운 소설이 잘 읽혔다.
그래서 잔뜩 모인 김영하의 소설책 열 한 권을 고이 책장 꼭대기에 모신다. 그래도 첫 칸 자리가 남으니...읽지 않고 모아둔 필립 로스 할배 책 다섯 권을 채우니 얼추 맞군.
맨 아래 두 칸에는 역시 열 몇 권씩 읽은 장강명과 구병모의 소설책들을 나란히 꽂는다. 구병모 소설이 어정쩡하게 두 권 남아서 그 옆에 박경리, 도리스 레싱, 어슐러 르귄, 아직 읽지 않은 할머니 여류 작가들을 모셔 본다.
자리가 너무 많이 남아서, 김애란, 정유정 책들도 멀쩡이 있던 자리에서 이주하고, 결국 작년 재작년에 산 젊은 한국소설가들 책도 다 꽂고, 이런저런 과학책들도, 만화책도, 센터에는 인류 존재의 기원을 짚어간 아직 안 읽은게 대부분인 두꺼운 명저들도 모셔온다.
첫인상은 마음에 안 들었지만 한참 만에 책 정리를 하고 가지런해진 거실 풍경을 보니 기분이 흡족해졌다. 기존 책장들도 나름 읽은 책, 안 읽은 책, 내 맘대로 세운 분류 기준대로 정리를 하니 책 찾기가 쉬워졌다. 하나 더 깨달은 점은 앞으로 십 년간 책을 한 권도 안 사도 집에 있는 안 읽은 책들을 아마 다 못 읽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만 사고 좀 읽자.

일기가 기네. 꽂아둔 책들을 보니 읽고 싶은게 너무 많았지만 결국 종이책 대신 전자책으로 김영하 신간을 봤다.(뭐야 쓸데 없는 빌드업…) 이 두께를 이 값주고 너무하다는 평을 들은 책일수록 빌려보면 더 이득인 기분이다. 더구나 짧은 책을 읽고 싶었다. 내가 소설 열 권이나 읽은 작가면 못할 소리도 많이 했지만 나름 (나혼자)친한 기분이라 펼치기 편하잖아.
제목은 여행의 이유-지만 여행기는 거의 없다. 여행 그 자체에 대한 단상과, 여행과 유사한 인생과 소설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주로 쓰여 있다. 여행기를 기대하지 않고 작가 노트다 생각하고 보면 배신감이 덜 들 것이다. 읽었던, 혹은 아직 읽지 않은 작가나 다른 작가들의 작품이야기를 여기서 접하니 생각보다 좋았다. 여행에서의 신뢰-환대에 대한 이야기가 마음이 들었다. 여행의 이유는 저마다 다를테지만 작가는 이래서 여행을 하는구나, 낯선 곳 호텔의 정돈된 느낌, 거부되지 않고 받아들여지는 것, 어린 시절 잦은 이주의 경험 등이 어우러져 있구나 싶었다. 그런 이야기 와중에 소설이 구성되고 만들어지는 이야기를 함께 하는 것도 좋았다.
일주일에 한 번이나 밖에 나갈까 말까 하며 살고 있다. 그래도 내가 했던 여행들, 내가 갔던 곳들을 가끔 떠올린다. 책장 정리하다 온갖 여행지에서 모은 팜플렛이며 티켓이며 하는 뭉치들을 뽑아내 다른 곳으로 몰아 놓았다. 항상 같이 하는 사람이 있는 여행이었다. 내 계획대로 따라주고 내 대신 외국어를 해주고 오만 성질 투정 변덕 다 받아준 사람. 한 사람만 있다면 어디라도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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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123q34 2020-10-08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꾸 알림울려서 죄송해요.. 답댓이 없어도 실망하지 않아요!(진지..) 조용히 읽고만 가려고 했는데 도저히 참기 힘든 것들도 있어서..ㅋㅋ 리뷰를 가장한 일기를 가장한 에세이를 가장한 애정고백이었다니.. 대충격.. 혹시는 역시라는 말이 너무 좋아서 머릿속에 잘 저장해두고.. 처음엔 못난이였지만 역시 좋은 걸로 채우고 예뻐졌다니 다행이야~ 역시 인생이란 그런거지~ 싶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그런 뜻이 아니라서 또 충격.. 어쨌거나 지금쯤 또 자리가 부족해지셨겠죠... 힘내자구요ㅋ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0-10-08 15:02   좋아요 0 | URL
아 ㅋㅋㅋ글로 제 인생을 재구성하고 계신가요? 저는 빈곳 부족한 곳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link123q34 2020-10-08 17: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리뷰가 많아서 신나서 오늘 제가 읽어본 책들 이야기를 엄청 구경했어요 슬프게도 몇권 안됐지만..ㅋㅋ 사실 읽으면서 제인생을 생각해보고 있었어요.. 못난이 책장도 역시 좋은 걸로 채워보면 그래도 좀 괜찮아지는구나.. 좋은 걸 몸과 머리에 더 담아보아야겠다.. 하고 있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책장보다는 그냥 책장은 최소한의 역할을 수행하고 어수선했던게 정리가 되어 전체적으로 말끔해진 분위기인거 같아서 역시 못난이는 다른 걸 담아봐도 못난이인것인가.. 싶어서 나는 왜 이걸 저렇게 입력했나 싶더라고요.. 일상이야기인데 혼자 저렇게 읽었구나~ 싶고..ㅋㅋ 자리부족은 책장에 대해서... 저도 늘 만성부족에 시달리고 있어서요.. 충만한 일상중에 글도 많이 써주세요!

반유행열반인 2020-10-08 18:37   좋아요 1 | URL
고생 많으셨습니다. 링크님의 글도 기대합니다 ㅎㅎㅎ제가 쓴 것보다 더 많은 생각을 펼쳐가시니 잘 읽고 잘쓰시는 분이겠구나 먼저 짐작합니다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