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린 그림 찾기 - 차별과 편견의 경계에 갇힌 사람들
박천기 지음 / 디페랑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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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린그림찾기_박천기 #디페랑스 #차별과편견의경계에갇힌사람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됐는기? 그 말이 실제로 작동하기란 여간 어렵다. 다름은 불편함을, 불편함은 곧 거리감을 만들기도 한다. 인간은 낯선 것 앞에서 경계심을 한껏 드러내며, 자신과 같은 결의 익숙한 영역 안에서 안정을 찾는다. 저자는 차별을 개인의 인성문제로 보지 않는다. 그건 인간이 생존과정에서 몸으로 체득한 안전의 본능이 사회구조와 결합하여 만들어낸 역사적 결과라고 했다.

우리는 여전히 다른것을 틀림으로 받아들인다. 인간의 뇌는 복잡한 세상을 단순하게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자신과 다른 사람을 구분하게 되고 익숙하지 않으면 이상하다고 하거나 틀렸다고 단정짓는다. 이러한 단순화된 사고는 편경을 만들고, 편견은 곧 차별의 언어로 변한다. 저자는 차별을 보이지 않는 폭력이라고 정의한다. 다르다고 하여 아예 배제해버리는 모습을 일컫는다. 자신과 다르면 중심에서 바깥으로 밀어낸다. 장애를 '비정상'으로 보는 시선이 대표적인 예이다. 인간의 다양성을 결핍으로 해석하면 그 사람은 평가의 대상이 된다. 누구든 알겠지만 인간의 삶의 모양은 모두 다르고 그 다름이 모여서 사회의 구성원이 된다. 정상이라는 기준은 누가 만든 것일까. 누군가가 임의로 만든 사회적인 합의일 뿐,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

문제는 시대가 변해도 차별의 본질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지금은 장애를 넘어 ‘다른 생각’과 ‘다른 방식’을 가진 사람에게까지 편견이 확산되고 있다. 예전보다 장애 인식은 좋아졌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절반의 변화에 그쳤다고 봐야 한다. 인식의 절반만 바뀌었고, 나머지 절반은 여전히 벽 안에 갇혀 있다. 예컨대 자신이 사는 동네에 장애인 학교가 들어선다고 하면, 집값이 떨어질까 두려워 반대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이런 현실을 보면, 의식수준은 옛날과 다를 바가 없다. 겉으로는 다양성과 포용을 외치지만 실제 행동은 과거의 수준보다 더 못하는 게 사실이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개선이나 교통, 시설 접근성은 지하철만 되도 개선되지 않았고, 버스는 당연지사고 휠체어를 탄 이들이 지하철 한 칸 타기 위하여 싸워야 하는 현실은 수십년 째 제자리 걸음이다. 발전은 커녕 앞에서 말했듯이 퇴화된 느낌이 든다.

그 원인은 사회의 구조뿐만이 아니라 개인의 태도에도 짙게 깔려있다. 대가족에서 핵가족, 기억이 나지 않아서 나노가족이라고 하겠다. 그렇게 바뀌며 사람들은 점점 개인의 울타리를 치기 시작했다. 개인주의는 솔직히 편하다 나만 생각하면 되니까. 누구를 신경쓰지 않으니 편하다. 하지만 동시에 타인을 이해하는데는 공감능력의 약화를 초래했다. 그래서 서로의 다름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자신이 다치지 않게 방어벽을 쌓다보니 다양성을 존중하다기 보다는 관심이 없고 피해야 할 불편함으로 인식된 것이 아닐까? 여러 다양한 모습에서 내가 볼때에도 불편한 모습이 있다. 하지만 어느정도 나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인정하고 받아들이려고 한다.

우리 사회의 복지는 '생활의 편의' 중심으로 머물러 있는데 이제는 '존중의 복지'로 나가야 한다. 다름을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그런것을 가르쳐주는 학교나 기관이 있는지, 있다고 해도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학교나 단체가 있는지 묻고 싶다. 나도 나와 조금 불편하다고 하면 외면한다. 하지만 그런 외면한 시선을 거두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 나의 성숙을 위해서도 타인을 인정하면서 인간은 비로소 성숙해지기 때문이다.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은 삶의 태도라고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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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레시피 - 평범한 인생에 특별함을 더하신 은혜의 레시피 행전 간증의 재발견 10
민찬양 지음 / 세움북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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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레시피_민찬양 #세움북스

평범한 인생속에 스며든 향기로운 은혜를 담은 책이다. 민찬양목사님은 단순히 말씀만 전하는 목회자가 아니라, 삶으로 사랑을 나누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직접 많은 대화를 나눈적은 없지만, 그를 떠올리면 인상이 좋고 따뜻한 이미지로 먼저 그려진다. 이웃을 돌보고, 포용력이 있으며, 자신이 가진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그의 삶은 이미 예수님을 그려내는 신앙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릴 적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부모님을 따라 기도원에 갔던 기억은 그의 신앙 여정의 시작이 되었고, 그곳에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경험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의 삶이 하나님의 섬세한 레시피로 빚어지기 시작한 것은. 어린 나이인 스물여덟에 개척교회를 세운 그는, 믿음으로 걸어온 모든 시간이 하나님의 손길 안에 있었음을 삶으로 증명해내고 있다.

P.232 사람에 대한 연민, 그 말씀을 마음 깊이 새깁니다. 사람에 대한 눈물과 삶에 대한 헤아림을 가진 목회자가 되고 싶습니다. 가슴에 눈물을 채운 사람이고 싶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이 조금씩 채워지고, 서로의 마음이 익어가는 삶. 그것은 기다림의 시간이고, 인내로 빚어진 사랑의 과정이었다. 민찬양 목사님의 교회는 바로 그런 기다림과 사랑이 공존하는 따뜻한 공동체다. 겉으로 화려하지 않지만, 그 안에는 서로를 챙기고 세워주는 진한 정이 흐른다. 신앙이란 단지 예배당 안에서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삶의 작은 나눔 속에서도 깊어지는 것임을 보여주는 교회다. 목사님은 언제나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앙이 어떻게 하면 더 자라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말씀과 기도뿐 아니라, 따뜻한 친교의 자리에서도 신앙의 성숙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식탁에서 나누는 짧은 대화, 서로의 고단한 하루를 위로하는 웃음 한마디가 그들에게는 예배의 또 다른 형태다.

처음에는 왜 이렇게 모든 것을 쏟아가며 사역을 하실까?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온 마음을 다해 섬김을 실천하는 그분의 모습 속에는 예수님의 향한 사랑이 녹아 있었다. 그 헌신과 진심은 단순한 열심이 아니라, 예수님께 받은 사랑을 다시 세상에 흘려보내는 믿음의 실천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마음이 숙연해지고, 신앙이란 결국 사랑으로 완성된다는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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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당신의 죽음을 허락합니다 - 이토록 멋진 작별의 방식, ‘간절한 죽음이라니!’
에리카 프라이지히 지음, 박민경 옮김, 최다혜 감수 / 스마트비즈니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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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당신의죽음을허락합니다_에리카프라이지히 #박민경옮김 #최다혜감수 #스마트비지니스 #이토록멋진작별의방식 #간절한죽음이라니

죽음을 허락한다는 제목을 보자 몇 년 전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서명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원래는 부모님도 함께 싸인을 하셨으면 했지만, 괜한 오해를 살까 싶어 나 혼자 조용히 싸인했다. 그때도 ‘죽음’이라는 단어는 그저 편하게 받아들였었는데 언제부턴가 낯설고 멀게 느껴졌고 왠지 피할 수 없는 숙제처럼 마음 한켠에 남아 있었다. 죽음이라는 단어는 한동안 나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래서 외면하고 싶었다. 마음이 약해질 때면, 그래, 죽음이란 게 나에게 온다면 기꺼이 받아들여야지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막상 나이가 40 중반을 향해 가면서 그 다짐이 점점 흔들리기 시작했다.

P.86 살아갈 가치가 있는가, 병마와 고통을 견딜 수 있는가는 오롯이 환자 스스로만이 판단할 수 있으며 판단해야 한다. 다만, 나는 어떠한 대안이라도 있다면 환자에게 그 대안을 제시해 돕고 싶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병이나 사고로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을 보며, ‘죽음’이 더 이상 먼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나 자신도 죽음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된다.
나는 그저 멀끔히, 자는 것처럼 조용히 죽고 싶다. 건강하게 살다가, 어디 아픈 곳 하나 없이 평온하게 눈을 감는 것.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라는 죽음도 이와 같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나이가 들수록 크고 작은 병 하나쯤은 달고 살게 되고, 결국 그 병을 안은 채 치료에 매달리다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모습을 지켜볼 때마다 ‘죽음’이라는 주제가 남의 일이 아니라, 언젠가 나의 문제로 다가옴을 실감한다. 요즘 사회에서는 ‘웰 다잉(Well-dying)’, 즉 ‘잘 죽는 법’과 ‘품위 있는 마지막’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정말 ‘웰 다잉’을 실현할 수 있을까? 아직은 어렵고, 여전히 멀게 느껴진다.

우리나라의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제도는 죽음을 앞둔 이들이 불필요한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자연스럽게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한 장치다. 이는 조력사망과는 완전히 다르다. 조력사망은 환자 본인이 스스로 약물을 복용해 생을 마감하는 행위를 뜻한다. 나는 안락사라는 말은 들어봤지만, 조력사망이라는 개념은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그 취지가 이해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생명에 대한 존중과 인간의 고통 사이에서 복잡한 감정이 교차한다.

비록 나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만, 고통을 겪는 사람의 마음은 그 사람만이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한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도 타인의 고통을 대신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각자가 자신의 삶과 마지막을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이느냐 하는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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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 받는 사람들을 위한 쇼펜하우어 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우르줄라 미헬스 벤츠 엮음, 홍성광 옮김 / 열림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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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받는사람들을위한쇼펜하우어 #우르줄라미헬스엮음 #홍성광옮김 #열림원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크고 작은 스트레스를 안고 살아간다. 스트레스를 전혀 받지 않고 사는 삶은 사실상 어렵다. 나 또한 여러 문제와 책임 속에서 쌓이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깊이 고민한 적이 있다. 특히 내가 원인이 아닌 외부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더 다루기 힘들다. 이럴 때 우리는 흔히 주변의 도움을 기대하거나 상황이 바뀌길 기다리지만, 쇼펜하우어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외부가 아닌 자신에게 있다고 말한다. “나만의 믿음으로 스스로 위로해야 한다”는 그의 조언처럼, 내 내면을 가장 잘 이해하고, 내 고민을 가장 정확히 들을 수 있는 존재는 바로 나 자신이다. 주변 사람이 스트레스를 완전히 없애줄 수는 없지만, 방향을 잡아주고 조언을 줄 수는 있다. 그러나 결국 스스로의 내면의 소리를 듣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

삶은 본질적으로 고통과 어려움으로 가득하지만, 우리가 어떤 태도로 마주하느냐에 따라 그 무게는 달라진다. 냉철하게 현실을 바라보되, 동시에 따뜻하게 자신을 다독이는 것, 그것이 삶을 견디고 성장시키는 힘이 된다. 다른 사람을 평가하거나 바꾸려 애쓰기보다, 나 자신의 마음을 먼저 살피고 단단히 세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와 평온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결국 스트레스는 피할 수 없지만, 내 안에서 길을 찾을 때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

P.99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기쁨을 느끼는 것은 자연의 진실과 일관성 덕택이다. 자연의 모든 것우 일관성 있고, 규칙적이고, 의심의 여지 없이 옳다. 여기에는 아무런 술수가 없다.

인생을 살면서 나이가 먹어가니 유독 10년전 보아왔던 분의 검은 머리가 흰 머리로의 변화나 삶의 위치가 달라짐을 보며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내가 자연을 바라보며 경탄하고 좋아하는 이유를 여기서 찾았다. 의심여지 없이 그대로이고 옳다. 술수가 없다. 그대로 있는 것을 보면서 조화로움의 풍요로움을 보며 새로움을 느끼고 활기를 얻으며 정신이 정화되는 작용이다. 그 가운데 인간은 올바로 사유가 가능하다.

P.190 그러므로 현재를 즐기고 그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 가장 위대한 지혜라는 이론을 펼 수 있다. 다시 말해 오직 현실만이 실재하며, 다른 모든 것은 단지 사고의 유희에 불과하다.

-현재를 즐기고 그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 가장 위대한 지혜다.- 쇼펜하우어의 이 말은 내 삶의 방향을 잡아준 문장이다. 그는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이 실재한다고 했다. 과거는 이미 사라졌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건 오직 현재뿐이다. 나는 이 말을 오래 곱씹으며 나만의 삶의 태도로 삼았다. 현재를 즐기고, 지금 주어진 순간에 감사하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하면 마음속 불안이 줄고, 스트레스도 한결 가벼워진다. 결국 삶의 평온은 외부의 환경이 아니라 내가 현재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려한다. 특별함에 얽매이지 않고 평범한 하루에 대한 것도 말이다.

이제 마흔 중반의 길목에 서서 나는 내 삶의 10년 후를 그려본다. 그때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몸도 마음도 건강한 나로 남고 싶다. 그래서 새벽마다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운동으로 몸과 마음을 단련한다. 새벽의 고요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마주한다. 그 시간은 누가 대신해줄 수 없는, 나를 가꾸는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쇼펜하우어의 글은 내게 단순한 철학이 아니다. 그의 사상은 삶의 현실 속에서 길을 잃지 않게 붙잡아주는 손잡이 같다. 그의 문장을 읽을 때마다 나는 다시금 ‘지금 여기’의 삶을 돌아본다. 그리고 오늘도 다짐한다. 과거에 머물지 말고, 아직 오지 않은 내일에 불안해하지 말자. 오늘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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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반복 - 트라우마를 가로지르는 마음의 지도
권요셉 지음 / 샘솟는기쁨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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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반복_권요셉 #샘솟는기쁨 #트라우마를가로지르는마음의지도

변화의 반복은 남수단에서의 극한 경험 그러니까 전쟁을 겪고 금이 간 마음의 결을 섬세히 포착한 책이다. 트라우마가 어떻게 생겨나고 치유해가는가의 과정이었다. 저자는 자신이 겪은 고통을 피하지 않는다. 자신의 고통이 어떻게 배가 되어 커지고 그 커지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어떻게 자신을 바꾸었는지 집요하게 추적한다. 글쓰기는 버티고 살아내는 호흡, 그리고 그를 살아내게 하는 통로이다.

P. 270 반복적인 행동으로 내 몸처럼 익숙해지는 것도 일종의 필요화이다. 타자기 치기, 자동차 운전, 악기 연주를 계속 연습하면 점점 익숙해진다. 처음에는 어렵지만 반복하다 보면 자연스러워지면서 안정성을 갖는다.

보통 트라우마는 개인의 문제로 생각하기 쉽다. 상처는 나의 내면, 나의 약함, 나의 결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그러나 『변화의 반복』의 저자는 그 익숙한 생각의 틀을 단호히 벗어난다. 그는 고통을 개인의 심리적 결함으로 축소하지 않는다. 대신 ‘나’라는 울타리를 넘어 가족, 사회, 역사라는 더 큰 맥락 속에서 고통의 구조를 해부한다. 그에게 트라우마는 한 개인의 불행이 아니라, 여러의 상황들이 인간에게 새겨놓은 흔적이며, 우리가 속한 관계망 전체가 함께 만들어낸 결과다.

그 과정에서 저자의 시선은 놀라울 만큼 균형 잡혀 있다. 그는 냉철하게 분석하지만, 인간의 감정에 대한 깊은 연민을 잃지 않는다. 글을 읽다 보면, 학문적 언어와 감정의 언어가 서로 부딪히지 않고 조심스레 공존한다. 그것이 이 책의 매력이다. 저자는 트라우마의 치유는 혼자서 이뤄지는 일이 아니라고 한다. 치유는 관계 속에서, 반복되는 일상의 작은 변화 속에서 천천히, 아주 미세하게 이루어진다. 타인과의 관계가 무너졌던 자리를 다시 연결하고, 세계와의 접점을 되살리는 일. 그것이 곧 회복의 시작이다.

이 책을 읽으며 문득 떠오른 말이 있다. 사람이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그 고통의 두세 배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저자는 이렇게 되묻는 듯하다. 진짜 문제는 시간이 아니라, 그 시간 속을 어떻게 살아내느냐라고.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는 이에게 이제 그만 이야기할 때가 됐지 않느냐, 이제는 좀 잊을 때가 되지 않았느냐라고 말한다. 나도 들었던 말이다. 치유가 되려면 그 기억들을 끄집어내어 아무렇지 않기까지의 상태까지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말은 언제나 고통 밖에 있는 사람들의 것이다. 그들은 그 상처를 살아낸 적이 없기에, 고통의 밀도를 전혀 모른다.

저자는 그 지점을 정확히 짚어낸다. 치유는 타인이 정해주는 시점이 아니라, 내가 내 안에서 도달해야 하는 자리라는 것을. 그것은 어떤 선언이나 결심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치유는 느리고 불완전하다. 그리고 어쩌면 완전한 치유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시간이 지나며 조금 옅어지고, 마음의 살결이 다시 덮여가며, 이전보다 덜 아픈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다. <변화의 반복>은 바로 그 덜 아픈 상태로 살아가는 법을 탐구한다. 고통을 지우거나 잊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끌어안은 채로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법. 저자는 그것을 글쓰기라는 반복된 행위 속에서 실천한다. 글쓰기는 그에게 치료이자 기도이며, 현실과의 재접속이다. 반복되는 문장 속에서 그는 자신을 새롭게 구성하고, 세상과 다시 연결된다.

욕망이라는 단어는 늘 부정적으로만 느껴졌지만 이 책의 글에서 만난 욕망은 달랐다. 그것은 타인을 해치는 충동이 아니라 삶을 앞으로 밀어주는 근원적인 힘이었다. 상처를 딛고 다시 일어서려면, 살아가고자 하는 욕망이 필요하다. 그 욕망은 자기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자신을 세우는 에너지로 작동한다.

저자는 고통을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고통을 글쓰기를 통해 해부하고, 변화의 반복 속에서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간다. 완전한 치유란 없을지 몰라도, 그는 반복되는 글쓰기와 욕망의 힘으로 조금씩 자신이 되어간다. <변화의 반복>은 그렇게 고통을 삶의 움직임으로 바꾸어낸, 단단하고도 조용한 회복의 기록이다.

#트라우마 #변화 #글쓰기의힘 #자신을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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