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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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요즘 푹 빠져있는 <알쓸신잡>에 출연하는 김영하 작가의 작품이 읽고 싶어졌다. 이분의 책은 <살인자의 기억법>, <작별인사> 이렇게 두 권 읽은 게 전부이다. 분명 글도 잘 쓰고 재미도 있지만 이상하게 손이 가지는 않았더랬다. 이런저런 선입견을 배제하고 좀 더 알아가 볼까 하는 생각에 몇 권을 대출했다. 로맨스물인 줄 알았던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어떤 장르라고 딱 규정짓기가 애매하다. 현대판 영적 지도자의 방랑기랄까. 천명관의 <고래>​가 지닌 날것의 감성이 김영하 작가에게도 있다는 게 그저 놀라운.


함구증을 앓던 동규의 단짝인 제이는, 친구의 마음을 읽고 대변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제이는 어린 동규가 보더라도 묘한 기운이 느껴지는 아이였다. 제이는 동물과 사물의 감정이 느껴진다고 했다. 반면에 사람의 마음은 읽어내질 못했는데, 그런 모순이 오히려 주변인들을 끌어당기는 효과를 발휘했다. 아무튼 이른 나이에 거리로 내쫓긴 제이는 비행하는 떠중이들과 지내면서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 가끔 필요에 의해서 폭력을 휘두르긴 했지만 그의 본바탕은 선해서 절대 군림하거나 착취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수많은 똥파리들이 꼬였지만 하나같이 제이는 뭔가 다르다고 입을 모았다.


흔히 개과천선하는 이야기가 아니어서 더 매력 있는 작품이다. 제이는 음지의 영역에서 단지 살아남기 위한 삶만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추종자가 점점 늘어나도 명령은커녕 간섭조차 하지 않았다. 중후반부에서는 제이가 오토바이에 빠지고, 그와 세력들의 폭주문화를 근절하려는 경찰들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왜 이런 방향으로 트는지를 모르겠다가, 제이와 함께 하던 동규가 친구의 추락을 계속 암시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러나 결과는 모든 추종자들이 추락하고, 제이 혼자만이 세상을 이기었다.


요즘에는 오토바이 폭주족이 사라진 것 같은데, 내가 중학생일 때만 해도 학교 관두고 중국집 배달하다가 폭주족이 된 친구들이 더러 있었다. 아무튼 옛날 생각도 나고 해서 괜히 반가웠달까. 리뷰를 쓰면서도 여전히 의도 파악이 안되는 작품이다. 적어도 폭주족이 되기 전까지의 제이는 최소한의 선, 윤리, 정의 같은 인간다움이 있기는 했다. 애초에 인간을 이해하는 게 불가했고, 그 자신도 인간이길 포기했다 싶은 삶이었으면서도 이건 아니다 싶은 정도는 있었다. 그러다가 제이를 따르는 사람이 생기면서, 쓸데없는 마찰이 사라지면서부터 그는 서서히 ‘신‘이 되었다. 창조도 파괴도 평화도 자유도 아닌 그저 범접할 수 없는 존재의 신. 사실은 잘 모르겠다. 카프카의 소설처럼 해석을 거부하는 작품 같기도 하고.


난해하긴 해도 읽는 맛이 있었다. <알쓸신잡>에서도 느꼈지만 이 작가는 글도 참 영리하게 쓴다. ‘이렇게 쓰면 특정 독자들이 욕할 텐데‘ 싶은 대목이 꽤 있다. 그러면 보란 듯이 그 우려를 상쇄시키는 재치를 발휘한다. 시대를 관통했던 옛 거장들의 작가정신이 느껴져서 좋았달까. 아무튼 잘나가다가 갑자기 폭주족 이야기로 바뀌지만 않았어도 별 다섯은 주었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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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O 모중석 스릴러 클럽 43
제프리 디버 지음, 이나경 옮김 / 비채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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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고른 책들이 죄다 꽝이었다. 연달아 중도 하차를 하다 보니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기분전환할 겸 제프리 디버를 읽어주었다. 역시 언제 읽어도 꿀잼을 보장하는 애정 작가이다. 좋아하는 작가의 전작을 섭렵하는 독자들도 있는 반면 나님은 아껴두었다가 위기일 때 꺼내 먹는 편이다. 아무튼 덕분에 이번 위기도 무사히 넘긴 기념으로 짧고 굵게 평을 남겨본다.


캘리포니아 CBI 요원 캐트린은, 대상의 보디랭귀지를 읽고 프로파일링하는 동작 전문가이다. 용의자 및 범인의 자잘한 동작에서 속내를 캐치하여 수사를 돕는 포지션인데, 이번 편에서는 동작학이 전혀 무용지물인 대상을 만난다. 대충 아이유 정도의 파급력을 지닌 가수의 스토커를 상대한다는 내용인데, 망상에 아주 단단히 빠져있어서 동작학이 전혀 먹혀들질 않는다. 가수가 팬들에게 돌린 전체 메일을 마치 본인에게만 쓴 연애편지처럼 생각하고 또 애인관계처럼 여기며 그녀에게 접근하는 스토커 센세.


범인의 살인 계획이 매우 참신하다.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범인은 항상 신호를 알려왔다. 그것은 가수의 타이틀곡 1절만 틀고, 1절의 가사와 연관된 장소에서 범행을 저지르는 식이었다. 4절까지 있는 그 노래 가사를 통해서 가수의 측근이 죽어나가는, 러시안룰렛의 뉴타입이랄까. 콘서트 일은 점점 다가오는데 사건은 계속 발생하고, 용의자마저 파악이 안되는 답답한 상황이다. 초반부터 접근해온 스토커가 유일한 용의자인데, 심증만 있다 보니 막 건들지도 못한다. 독자 입장에서는 스토커가 미끼 역할이라는 걸 알지만 그냥 넘어가지도 못하는 게 광팬의 수준을 넘어선 정보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스토커는 가수의 개인 정보들과 음악적인 것들과 주변인들의 사적인 비밀들까지도 줄줄이 꿰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가수와 팬 관계의 선을 자꾸 넘었지만 딱히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었으니 그저 지켜보는 일 외에 뭐가 없었다. 진짜 심각함.


평소 휘몰아치기를 즐겨 하는 디버 치고는 좀 평범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일단 캐트린의 활약이 너무 약소한데다 이번 편의 주인공인 가수 케일리도 내내 울고 무기력한 모습밖에 보여주지 못했다. 슬슬 실망하려던 차에 가수의 열혈 팬인 선거 후보자가 등장한다. 여기서 독자들은 가수를 선거운동에 이용해먹는구나 할 텐데, 흐름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진행된다. 이어서 캐트린은 링컨 라임을 현장으로 초대해 법과학으로 범인을 검거한다(등장만으로도 든든한 빛링컨). 그렇게 종결된 줄 알았더니 또 어디선가 4절이 반복 재생되어, 아직도 끝난 게 아니었다는 공포가 솟구친다. 그리고 미끼가 미끼를 낳았음을 알게 된 캐트린은 마침내 몸짓의 동작학에서 언어의 동작학으로 각성한다. 그래, 내가 알던 디버는 바로 이런 맛이었지.


비상시에만 꺼내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덧 저자의 전작을 다 읽어간다. 그나저나 내 스타일의 작가를 발견하기가 왜 이리도 어렵냐. 솔직히 나도 아무 책에나 재미를 느끼고, 남들처럼 열광할 만한 작가가 많다면 좋겠는데 말이다. 전 세계가 주목하는 이 한반도에 비주류로 태어나 마이너 취향을 가진 자의 설움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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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랭 레몽 지음, 김화영 옮김 / 비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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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히 제목에 끌려서 읽은 작품이다. 프랑스 문학이라 별 기대는 안 했다만 역시나였다. 개인적으로 작별이란 말을 들으면 다신 만나지 못할 것만 같은 슬픔이 몰려든다. 그래서 이별과 작별의 차이가 무언지 검색해 봤다. 이별은 알다시피 갈라서 헤어짐을 말한다. 그런데 작별은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는 거란다. 둘 다 같은 용도로 쓰이지만 작별은 뭐랄까, 재회의 가능성을 지녔다는 느낌이 강하다. 혹여 현생에서 불가하다면 천국에 가서라도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겨자씨만 한 희망을 품게 한달까. 헤어진 마당에 무슨 희망을 바라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쩝.


두 편의 중편을 묶어놓은 작품이다. 표제작인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만 리뷰하겠다. 두 편 모두 저자의 자전소설인데, <한 젊은이가 지나갔다>는 영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차라리 표제작만 있는 단행본이었다면 더 좋았을 듯. 소년 레몽의 가족들은 전쟁을 피해 시골마을 트랑으로 피난 온다. 10명의 형제자매는 서로 잘 놀았고, 마을에서도 금방 적응하고 잘 지냈다. 어느덧 형들처럼 레몽도 기숙 학교에 들어가면서 점점 가족 전체가 모이는 게 어려워졌다. 언젠가부터 부모님은 싸우기 시작했고, 그래서 트랑의 집은 더 이상 사랑과 평화의 공간이 아니게 되었다. 아버지가 죽고, 성인이 된 형제들은 흩어지고, 레몽 또한 프랑스를 떠난다. 이후 어머니의 질병 소식으로 다시 트랑에 돌아온 주인공은, 옛 향수를 절대 느낄 수 없는 현실에 좌절한다.


냉정하게 말하면 흔하디흔한 일반 가정집의 역사이다. 한 집안의 자식들이 성장하여 각자의 삶을 찾아가고, 부모는 곧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것. 특별히 더 슬플 것도 없고 이상할 것도 없는 매우 자연스러운 순리이다. 물론 가족 중에 누군가가 다쳤거나 병에 걸렸거나 하는 내용들은 별일이 맞지만, 그것도 삶의 한 조각일 뿐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덤덤하고 무미건조하게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여전히 부모와 형제, 고향 땅과 집을 사랑하고 추억하지만 어릴 때만큼의 에너지는 아니어서 자신에게 실망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게 너무 이해가 된다. 정들었던 사람과 공간, 사물들에 더는 정을 느낄 수 없을 때. 또는 정이 가지 않는 자신을 느꼈을 때. 그 모든 날들에 우리는 손을 내밀며 작별을 나누곤 했다. 순리대로 살아갈 것을 소망하며.


저자가 어떤 생각을 하며 이 책을 써냈는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슬퍼하지 않기로 했다. 붙잡으려 할수록 달아난다는 인생 법칙에 의거하여 순리대로 살자는 생각이다. 이것은 내 나름 2025년의 교훈이었다. 나의 글쓰기도, 이 공간도 언젠가 작별하게 된다면 그동안 고마웠다고 말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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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 (리커버) - 제19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문미순 지음 / 나무옆의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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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롱패딩의 계절이 돌아왔다. 바깥은 찬바람이 쌩쌩 불지만 카페 안에서는 여전히 아이스커피를 마신다. 길가에는 낙엽이 다 져서 앙상해진 나무도 있고, 사시사철 녹음을 자랑하는 나무들도 있다. 어떤 이는 춥다며 히터를 틀고, 누군가는 건조해서 가습기를 켠다. 이렇듯 겨울은 다양한 생활양식을 제공하는 신기한 계절이다. 문득 사람마다 겨울을 인지하는 기준이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입동이 시작돼야 겨울의 시작이라거나, 기온이 영하권으로 되어야 한다거나, 수능일을 기준으로 겨울이라거나, 패딩을 입기 시작할 때부터라거나. 각자의 기준에는 계절변화를 인식시켜준 어떤 추억이 들어있을 것이다. 그게 또 무엇이냐에 따라서 겨울은 추운 계절이기도 하고 따뜻한 계절이 되기도 한다. 예외도 있는데, 내 마음은 1년 내내 겨울이라서 추운 줄도 모르겠다고나 할까.


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이번 작품은 일부러 겨울이 올 때까지 참았다가 읽었다. 올해 읽은 책 중에 베스트 5 안에 들 만큼 좋았지만 너무 애처로워서 두 번은 못 읽을 작품이었다. 진짜 울컥하고 숨이 막혀서 읽다가 멈추기를 여러 번 반복했단 말이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리뷰를 남기고 싶지 않은데 그랬다간 이 감정들이 길게 갈 것 같아서 빨리 털어내는 게 나을 듯하다. 말하자면 양 옆집에 사는 이들의 불행 잔치인데, 이거야말로 하이퍼리얼리즘이라며 박수 친 나와는 달리 요즘은 너도나도 불행하므로 이런 이야기에 별 감흥이 없을 수도 있겠다. 도파민에 절여진 현대인들에게 주어진 계절은 겨울뿐이다.


701호 사는 50대 여성 공명주. 모친의 시신을 집안에 보관해두고, 모친의 연금으로 겨우 생활하는 중이다. 이혼한 데다 화상을 입어 일할 몸도 아니었고 재산도 없었던 그녀는, 불행한 삶을 안겨준 세상에 그렇게라도 복수하기로 했다. 문제는 여기저기서 모친의 안부를 묻거나, 모친의 휴대폰으로 연락이 오는 등 아주 난처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 연출된다는 거였다. 여기에 곧 대학을 졸업하는 딸이 갑자기 찾아와 돈을 요구한다. 또 얼마 뒤에는 익명의 전화가 와서 당신이 한 일을 알고 있다며 계속 협박해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발생하는 불행들이 그녀를 대체 어디까지 데려가려는 걸까.


702호 사는 20대 남성 박준성. 뇌졸중 환자인 부친을 고등학생 때부터 홀로 모시고 있다. 도망 친 형이 남긴 대출금의 빚과 부친의 치료비 때문에 그는 밤마다 대리운전을 뛴다. 간병하느라 학교도 못 다니고 직장도 구하지 못했지만 그는 결코 부친과 집안을 원망 않고 건실하게 살아간다. 그러다 가스레인지 사고로 부친이 입원하게 되자 이제는 부친의 건강보다도 돈 걱정이 앞서기 시작한다. 다급한 마음에 외제차를 대리 뛰다가 기어이 사고가 났고, 그 피해 보상을 메꾸려면 장기라도 적출해야 할 판이었다.


적어도 내겐 이들의 불행이 허구의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았다. 대체 누가 신은 공평하다고 했는가? 노력이 재능을 이길 수 있다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다 꺼지라 그래. 이제는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도 안 하는 세상이올시다. 한때는 불우이웃을 보면서 위안을 삼아야 했던 시기도 있었다. 근데 그렇게 정신승리해 봤자 내 삶이 더 안락해지는 것도 아니다. 어떨 때는 내가 불우이웃하고 어디가 다른지도 모르겠거든.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을 이해할 나이가 되고 보니 불행이 불행을 불러온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두 주인공의 연쇄적인 불행을 보며 온통 극단적인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안개가 걷히고 빛이 들 거라는 확신이 들어야 희망을 갖는 거지, 안 그래?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된다더니, 불행 또한 그러했다. 각자의 불행을 공유한 두 사람의 걱정은 더 커지기만 했다. 상대방에게 의지하고 말 것도 없었지만 동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된다. 아마도 이것이 저자의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한다. 지금 현대인들의 삶은 여러 가지의 이유로 고립되어 있다. 그렇게 모든 희로애락이 개인의 몫이 되다 보니 타인의 호의를 무슨 빚진 것처럼 여긴다. 이 꼬여있는 사회문화를 어디까지 이해해 줘야 할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잡다한 이유로 우리는 단절되었고, 그래서 타인의 불행과 아픔에도 무관심해져버렸다. 하지만 어두울수록 작은 불빛도 잘 보인다지?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은 도무지 희망을 찾아볼 수가 없는 작품이다. 저자는 삶의 터전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박살 내버린다. 그런데도 나는 두 사람의 공유된 불행에서 어떤 빛을 발견했다. 차마 그것을 희망이나 용기라고 부를 순 없겠지만 불행에 삼켜짐을 막아줄 무언가가 분명하다. 이 겨울이 영원토록 지속될지 스쳐가는 계절이 될지는 그 무언가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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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남극 탐험기
김근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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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양각색의 인간승리를 보고 들을 때마다 역시 인간은 위대하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구상에서 인간은 사라져야 할 1순위라고 생각하는 나조차도 그 불굴의 의지에 반할 때가 많다. 지금 얘기하는 승리가 곧 성공을 가리키는 게 아니란 걸 그대들도 알 것이다. 빤히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나아가기를 희망하는 인생들이 모여서 미래에 대한 불안을 조금씩 지워나간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요, 문학이다. 따라서 모든 문학은 실패자들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결국 인간의 위대함은 실패에서 만들어진다고 하겠으며, 그중에 성공한 사람은 지난날의 실패를 자랑해야 할 것이다. 토끼를 이긴 거북이는 자신의 느림을 전혀 탓하지 않았으니까.


오랜만에 김근우 작가의 소설을 읽었다. 주로 판타지물을 써오던 분인데, 2015년에 쓴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로 문학상을 받고부터는 장르가 완전히 바뀌었다. 말하자면 차분한 B급 정서의 대중문학인데, 정세랑의 명랑함과 한차현의 괴랄함 경계선에 있는 느낌? 어쩐지 표현하기가 어렵다. 안 내키면 그냥 보지 마시라. <우리의 남극 탐험기>는 마치 기안84가 책을 쓰면 이렇겠구나 싶었던 작품이다. 뇌절도 끝까지 가면 예술이 된다는데, 그 정도는 아니지만 꽤 그럴싸한 병맛이 줄줄 나온다. 딱 봐도 욕먹을 작정하고 썼던데 오히려 그래서 봐준다는 마음으로 읽어나가게 되는 묘한 작품이었다.


프로 야구의 벽에 부딪혀 탈선한 ‘나‘는 재수까지 해서 지방의 삼류 대학에 들어간다. 학생도 교수도 수업도 다 개판이던 그곳에서 만난 강 교수와의 질긴 인연으로 ‘나‘는 혜진의 연인이 된다. 머리도 집안도 좋았던 그녀를 반년 만에 차버린 데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야구도 전공학도 인간관계도 재능이 없었던 ‘나‘는 ‘지금 여기서 뭐 하냐‘는 마음의 소리를 계속 듣는다. 이후 의경이 된 그는 시위대와 싸우다가 ‘정답이 없는 인생의 죄‘와 마주한다. 하여 전역하고 학교를 자퇴한 후 느닷없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문학이 뭔지도 몰랐던 ‘나‘는 오직 날것의 감성으로 부딪혔고, 그것이 두 번이나 문학상을 가져다주었다. 상금 때문에 시작한 일이었고 또 잘 풀려서 다행이었지만 그는 전업작가의 뜻이 없었다. 좋아하지 않는 일도 잘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도 못할 수 있다던 과거 자신이 내뱉은 말이 이뤄질 때마다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지금 왜 여기에 있느냐고. 정답을 말해야 하는 세상에서 오답을 꺼낸 ‘나‘는 곧 죄인이었다. 죄를 인식함과 동시에 무명작가가 되어 서서히 잊혀져가는 ‘나‘라는 존재.


‘나‘와 평행선을 밟은 듯한 섀클턴 박사의 내용이 번갈아 나온다. 태어나길 맹인이었던 박사는 다 예상되듯이 험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영국의 귀족 가문에서 났기에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는 건데, 이 배경 때문에서라도 박사는 또래들에게 먹잇감이 되곤 했다. 장애인이면서도 일반 학교를 고집한 이유로 학생과 선생들에게 비난받았던 박사 또한 ‘지금 여기‘의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 하여 비상한 머리를 풀가동해서 명문 대학까지 조기졸업해버리고 23세에는 최연소 대학교수가 된다. 인간관계에 기대할 수가 없었던 그는 본업에 충실하기로 한다. 이후 박사의 경제 논문들은 정치인들의 오해를 샀고, 좌우 진영에게 맹공격을 받는다. 박사가 느낀 ‘정답이 없는 인생의 죄‘는, 그 가문이 만든 장애인 재단에서도 볼 수 있었다. 어릴 때 박사를 괴롭혔던 가해자의 아이가 선천성 녹내장을 앓고 있었고, 지금은 재단의 후원을 받고 있단다. 안절부절못하는 가해자와는 달리 아이는, 다 이해한다는 듯이 말하는 박사에게 비아냥 거린다. 당신 같은 귀족과 자신의 고통이 절대 같을 수가 없다면서. 재단의 이사장 직을 달고 있는 박사는, 어쩌면 여기도 자기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다시피 ‘나‘와 박사는 전혀 다른 삶이었음에도 완벽한 대칭의 고뇌와 위기를 겪는다. 하여간 김근우는 진짜 하이브리드형 작가가 틀림없다. 아무튼 박사는 한국 경제 연구소의 초청장을 받아 한국을 방문하고, 나중에는 아예 한국에 눌러앉아버린다. 그러다 어느 지하철에서 ‘나‘를 만나 인연을 맺고 ‘지금 여기‘의 정답을 찾아 남극 횡단을 하러 떠난다. 여기서부터는 설명도 많이 생략되고 비현실적인 설정이 등장하지만, 이미 여기까지 달려온 독자라면 그런갑다 하고 읽게 될 것이다. 왜 뜬금없이 남극이었냐 하면, 박사에게 들려왔던 목소리의 주인이 바로 옛 남극 탐험가였기 때문이다. 박사와 동명이인의 그 탐험가는 무모한 탐사를 나섰다가 대 실패를 했지만 동료들과 살아 돌아온 기적의 인물이었고, 그의 행적을 따라서 박사와 ‘나‘는 ‘지금 여기‘의 해답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죄인‘이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이며, 이유가 없었던 수많은 실패의 이유를 알아내야만 했다. 이렇게만 보면 루저들의 훌륭한 도전기 같은데, 앞서 말했듯이 병맛 가득한 작품인지라 퍽 진지하지도 않다. 괜히 과몰입하지 마시길.


작품 내내 반복해서 강조하는 메시지가 있다. ‘끝나지 않는다면 시작할 필요가 없지만, 언젠가 모든 것이 끝난다면 시작해야 한다고(287p). 그 말은 곧 불확실성에 뛰어들어야 의미를 가진다는 것으로 와닿았다. 토끼에게 뻔히 질 것을 알고도 시합을 했던 거북이처럼. 다 정해진 결과만을 위한 삶에는 한계를 돌파한다는 개념이 없다. 그래서 인간은 질 것을 알고도 싸워야만 하는 때가 있는 법이고, 설령 실패하더라도 포기하지 않았음에 박수갈채를 받는 것이다. 꼭 기록을 경신하고 훌륭한 퍼포먼스를 선보일 필요는 없다. ‘지금 여기‘를 찾아 계속 방황하는 것이야말로 불굴의 의지 아니겠나. 헤밍웨이도 <노인과 바다>에서 다 보여주었다. 패배했지만 굴복하지 않은 인간의 위대함에 대하여. 가파른 절벽 아래 핀 들꽃에도 벌과 나비는 날아드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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