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 (리커버) - 제19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문미순 지음 / 나무옆의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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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롱패딩의 계절이 돌아왔다. 바깥은 찬바람이 쌩쌩 불지만 카페 안에서는 여전히 아이스커피를 마신다. 길가에는 낙엽이 다 져서 앙상해진 나무도 있고, 사시사철 녹음을 자랑하는 나무들도 있다. 어떤 이는 춥다며 히터를 틀고, 누군가는 건조해서 가습기를 켠다. 이렇듯 겨울은 다양한 생활양식을 제공하는 신기한 계절이다. 문득 사람마다 겨울을 인지하는 기준이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입동이 시작돼야 겨울의 시작이라거나, 기온이 영하권으로 되어야 한다거나, 수능일을 기준으로 겨울이라거나, 패딩을 입기 시작할 때부터라거나. 각자의 기준에는 계절변화를 인식시켜준 어떤 추억이 들어있을 것이다. 그게 또 무엇이냐에 따라서 겨울은 추운 계절이기도 하고 따뜻한 계절이 되기도 한다. 예외도 있는데, 내 마음은 1년 내내 겨울이라서 추운 줄도 모르겠다고나 할까.


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이번 작품은 일부러 겨울이 올 때까지 참았다가 읽었다. 올해 읽은 책 중에 베스트 5 안에 들 만큼 좋았지만 너무 애처로워서 두 번은 못 읽을 작품이었다. 진짜 울컥하고 숨이 막혀서 읽다가 멈추기를 여러 번 반복했단 말이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리뷰를 남기고 싶지 않은데 그랬다간 이 감정들이 길게 갈 것 같아서 빨리 털어내는 게 나을 듯하다. 말하자면 양 옆집에 사는 이들의 불행 잔치인데, 이거야말로 하이퍼리얼리즘이라며 박수 친 나와는 달리 요즘은 너도나도 불행하므로 이런 이야기에 별 감흥이 없을 수도 있겠다. 도파민에 절여진 현대인들에게 주어진 계절은 겨울뿐이다.


701호 사는 50대 여성 공명주. 모친의 시신을 집안에 보관해두고, 모친의 연금으로 겨우 생활하는 중이다. 이혼한 데다 화상을 입어 일할 몸도 아니었고 재산도 없었던 그녀는, 불행한 삶을 안겨준 세상에 그렇게라도 복수하기로 했다. 문제는 여기저기서 모친의 안부를 묻거나, 모친의 휴대폰으로 연락이 오는 등 아주 난처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 연출된다는 거였다. 여기에 곧 대학을 졸업하는 딸이 갑자기 찾아와 돈을 요구한다. 또 얼마 뒤에는 익명의 전화가 와서 당신이 한 일을 알고 있다며 계속 협박해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발생하는 불행들이 그녀를 대체 어디까지 데려가려는 걸까.


702호 사는 20대 남성 박준성. 뇌졸중 환자인 부친을 고등학생 때부터 홀로 모시고 있다. 도망 친 형이 남긴 대출금의 빚과 부친의 치료비 때문에 그는 밤마다 대리운전을 뛴다. 간병하느라 학교도 못 다니고 직장도 구하지 못했지만 그는 결코 부친과 집안을 원망 않고 건실하게 살아간다. 그러다 가스레인지 사고로 부친이 입원하게 되자 이제는 부친의 건강보다도 돈 걱정이 앞서기 시작한다. 다급한 마음에 외제차를 대리 뛰다가 기어이 사고가 났고, 그 피해 보상을 메꾸려면 장기라도 적출해야 할 판이었다.


적어도 내겐 이들의 불행이 허구의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았다. 대체 누가 신은 공평하다고 했는가? 노력이 재능을 이길 수 있다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다 꺼지라 그래. 이제는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도 안 하는 세상이올시다. 한때는 불우이웃을 보면서 위안을 삼아야 했던 시기도 있었다. 근데 그렇게 정신승리해 봤자 내 삶이 더 안락해지는 것도 아니다. 어떨 때는 내가 불우이웃하고 어디가 다른지도 모르겠거든.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을 이해할 나이가 되고 보니 불행이 불행을 불러온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두 주인공의 연쇄적인 불행을 보며 온통 극단적인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안개가 걷히고 빛이 들 거라는 확신이 들어야 희망을 갖는 거지, 안 그래?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된다더니, 불행 또한 그러했다. 각자의 불행을 공유한 두 사람의 걱정은 더 커지기만 했다. 상대방에게 의지하고 말 것도 없었지만 동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된다. 아마도 이것이 저자의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한다. 지금 현대인들의 삶은 여러 가지의 이유로 고립되어 있다. 그렇게 모든 희로애락이 개인의 몫이 되다 보니 타인의 호의를 무슨 빚진 것처럼 여긴다. 이 꼬여있는 사회문화를 어디까지 이해해 줘야 할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잡다한 이유로 우리는 단절되었고, 그래서 타인의 불행과 아픔에도 무관심해져버렸다. 하지만 어두울수록 작은 불빛도 잘 보인다지?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은 도무지 희망을 찾아볼 수가 없는 작품이다. 저자는 삶의 터전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박살 내버린다. 그런데도 나는 두 사람의 공유된 불행에서 어떤 빛을 발견했다. 차마 그것을 희망이나 용기라고 부를 순 없겠지만 불행에 삼켜짐을 막아줄 무언가가 분명하다. 이 겨울이 영원토록 지속될지 스쳐가는 계절이 될지는 그 무언가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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