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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O ㅣ 모중석 스릴러 클럽 43
제프리 디버 지음, 이나경 옮김 / 비채 / 2017년 7월
평점 :
근래 고른 책들이 죄다 꽝이었다. 연달아 중도 하차를 하다 보니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기분전환할 겸 제프리 디버를 읽어주었다. 역시 언제 읽어도 꿀잼을 보장하는 애정 작가이다. 좋아하는 작가의 전작을 섭렵하는 독자들도 있는 반면 나님은 아껴두었다가 위기일 때 꺼내 먹는 편이다. 아무튼 덕분에 이번 위기도 무사히 넘긴 기념으로 짧고 굵게 평을 남겨본다.
캘리포니아 CBI 요원 캐트린은, 대상의 보디랭귀지를 읽고 프로파일링하는 동작 전문가이다. 용의자 및 범인의 자잘한 동작에서 속내를 캐치하여 수사를 돕는 포지션인데, 이번 편에서는 동작학이 전혀 무용지물인 대상을 만난다. 대충 아이유 정도의 파급력을 지닌 가수의 스토커를 상대한다는 내용인데, 망상에 아주 단단히 빠져있어서 동작학이 전혀 먹혀들질 않는다. 가수가 팬들에게 돌린 전체 메일을 마치 본인에게만 쓴 연애편지처럼 생각하고 또 애인관계처럼 여기며 그녀에게 접근하는 스토커 센세.
범인의 살인 계획이 매우 참신하다.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범인은 항상 신호를 알려왔다. 그것은 가수의 타이틀곡 1절만 틀고, 1절의 가사와 연관된 장소에서 범행을 저지르는 식이었다. 4절까지 있는 그 노래 가사를 통해서 가수의 측근이 죽어나가는, 러시안룰렛의 뉴타입이랄까. 콘서트 일은 점점 다가오는데 사건은 계속 발생하고, 용의자마저 파악이 안되는 답답한 상황이다. 초반부터 접근해온 스토커가 유일한 용의자인데, 심증만 있다 보니 막 건들지도 못한다. 독자 입장에서는 스토커가 미끼 역할이라는 걸 알지만 그냥 넘어가지도 못하는 게 광팬의 수준을 넘어선 정보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스토커는 가수의 개인 정보들과 음악적인 것들과 주변인들의 사적인 비밀들까지도 줄줄이 꿰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가수와 팬 관계의 선을 자꾸 넘었지만 딱히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었으니 그저 지켜보는 일 외에 뭐가 없었다. 진짜 심각함.
평소 휘몰아치기를 즐겨 하는 디버 치고는 좀 평범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일단 캐트린의 활약이 너무 약소한데다 이번 편의 주인공인 가수 케일리도 내내 울고 무기력한 모습밖에 보여주지 못했다. 슬슬 실망하려던 차에 가수의 열혈 팬인 선거 후보자가 등장한다. 여기서 독자들은 가수를 선거운동에 이용해먹는구나 할 텐데, 흐름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진행된다. 이어서 캐트린은 링컨 라임을 현장으로 초대해 법과학으로 범인을 검거한다(등장만으로도 든든한 빛링컨). 그렇게 종결된 줄 알았더니 또 어디선가 4절이 반복 재생되어, 아직도 끝난 게 아니었다는 공포가 솟구친다. 그리고 미끼가 미끼를 낳았음을 알게 된 캐트린은 마침내 몸짓의 동작학에서 언어의 동작학으로 각성한다. 그래, 내가 알던 디버는 바로 이런 맛이었지.
비상시에만 꺼내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덧 저자의 전작을 다 읽어간다. 그나저나 내 스타일의 작가를 발견하기가 왜 이리도 어렵냐. 솔직히 나도 아무 책에나 재미를 느끼고, 남들처럼 열광할 만한 작가가 많다면 좋겠는데 말이다. 전 세계가 주목하는 이 한반도에 비주류로 태어나 마이너 취향을 가진 자의 설움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