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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남극 탐험기
김근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7년 7월
평점 :
각양각색의 인간승리를 보고 들을 때마다 역시 인간은 위대하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구상에서 인간은 사라져야 할 1순위라고 생각하는 나조차도 그 불굴의 의지에 반할 때가 많다. 지금 얘기하는 승리가 곧 성공을 가리키는 게 아니란 걸 그대들도 알 것이다. 빤히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나아가기를 희망하는 인생들이 모여서 미래에 대한 불안을 조금씩 지워나간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요, 문학이다. 따라서 모든 문학은 실패자들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결국 인간의 위대함은 실패에서 만들어진다고 하겠으며, 그중에 성공한 사람은 지난날의 실패를 자랑해야 할 것이다. 토끼를 이긴 거북이는 자신의 느림을 전혀 탓하지 않았으니까.
오랜만에 김근우 작가의 소설을 읽었다. 주로 판타지물을 써오던 분인데, 2015년에 쓴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로 문학상을 받고부터는 장르가 완전히 바뀌었다. 말하자면 차분한 B급 정서의 대중문학인데, 정세랑의 명랑함과 한차현의 괴랄함 경계선에 있는 느낌? 어쩐지 표현하기가 어렵다. 안 내키면 그냥 보지 마시라. <우리의 남극 탐험기>는 마치 기안84가 책을 쓰면 이렇겠구나 싶었던 작품이다. 뇌절도 끝까지 가면 예술이 된다는데, 그 정도는 아니지만 꽤 그럴싸한 병맛이 줄줄 나온다. 딱 봐도 욕먹을 작정하고 썼던데 오히려 그래서 봐준다는 마음으로 읽어나가게 되는 묘한 작품이었다.
프로 야구의 벽에 부딪혀 탈선한 ‘나‘는 재수까지 해서 지방의 삼류 대학에 들어간다. 학생도 교수도 수업도 다 개판이던 그곳에서 만난 강 교수와의 질긴 인연으로 ‘나‘는 혜진의 연인이 된다. 머리도 집안도 좋았던 그녀를 반년 만에 차버린 데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야구도 전공학도 인간관계도 재능이 없었던 ‘나‘는 ‘지금 여기서 뭐 하냐‘는 마음의 소리를 계속 듣는다. 이후 의경이 된 그는 시위대와 싸우다가 ‘정답이 없는 인생의 죄‘와 마주한다. 하여 전역하고 학교를 자퇴한 후 느닷없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문학이 뭔지도 몰랐던 ‘나‘는 오직 날것의 감성으로 부딪혔고, 그것이 두 번이나 문학상을 가져다주었다. 상금 때문에 시작한 일이었고 또 잘 풀려서 다행이었지만 그는 전업작가의 뜻이 없었다. 좋아하지 않는 일도 잘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도 못할 수 있다던 과거 자신이 내뱉은 말이 이뤄질 때마다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지금 왜 여기에 있느냐고. 정답을 말해야 하는 세상에서 오답을 꺼낸 ‘나‘는 곧 죄인이었다. 죄를 인식함과 동시에 무명작가가 되어 서서히 잊혀져가는 ‘나‘라는 존재.
‘나‘와 평행선을 밟은 듯한 섀클턴 박사의 내용이 번갈아 나온다. 태어나길 맹인이었던 박사는 다 예상되듯이 험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영국의 귀족 가문에서 났기에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는 건데, 이 배경 때문에서라도 박사는 또래들에게 먹잇감이 되곤 했다. 장애인이면서도 일반 학교를 고집한 이유로 학생과 선생들에게 비난받았던 박사 또한 ‘지금 여기‘의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 하여 비상한 머리를 풀가동해서 명문 대학까지 조기졸업해버리고 23세에는 최연소 대학교수가 된다. 인간관계에 기대할 수가 없었던 그는 본업에 충실하기로 한다. 이후 박사의 경제 논문들은 정치인들의 오해를 샀고, 좌우 진영에게 맹공격을 받는다. 박사가 느낀 ‘정답이 없는 인생의 죄‘는, 그 가문이 만든 장애인 재단에서도 볼 수 있었다. 어릴 때 박사를 괴롭혔던 가해자의 아이가 선천성 녹내장을 앓고 있었고, 지금은 재단의 후원을 받고 있단다. 안절부절못하는 가해자와는 달리 아이는, 다 이해한다는 듯이 말하는 박사에게 비아냥 거린다. 당신 같은 귀족과 자신의 고통이 절대 같을 수가 없다면서. 재단의 이사장 직을 달고 있는 박사는, 어쩌면 여기도 자기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다시피 ‘나‘와 박사는 전혀 다른 삶이었음에도 완벽한 대칭의 고뇌와 위기를 겪는다. 하여간 김근우는 진짜 하이브리드형 작가가 틀림없다. 아무튼 박사는 한국 경제 연구소의 초청장을 받아 한국을 방문하고, 나중에는 아예 한국에 눌러앉아버린다. 그러다 어느 지하철에서 ‘나‘를 만나 인연을 맺고 ‘지금 여기‘의 정답을 찾아 남극 횡단을 하러 떠난다. 여기서부터는 설명도 많이 생략되고 비현실적인 설정이 등장하지만, 이미 여기까지 달려온 독자라면 그런갑다 하고 읽게 될 것이다. 왜 뜬금없이 남극이었냐 하면, 박사에게 들려왔던 목소리의 주인이 바로 옛 남극 탐험가였기 때문이다. 박사와 동명이인의 그 탐험가는 무모한 탐사를 나섰다가 대 실패를 했지만 동료들과 살아 돌아온 기적의 인물이었고, 그의 행적을 따라서 박사와 ‘나‘는 ‘지금 여기‘의 해답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죄인‘이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이며, 이유가 없었던 수많은 실패의 이유를 알아내야만 했다. 이렇게만 보면 루저들의 훌륭한 도전기 같은데, 앞서 말했듯이 병맛 가득한 작품인지라 퍽 진지하지도 않다. 괜히 과몰입하지 마시길.
작품 내내 반복해서 강조하는 메시지가 있다. ‘끝나지 않는다면 시작할 필요가 없지만, 언젠가 모든 것이 끝난다면 시작해야 한다고(287p)‘. 그 말은 곧 불확실성에 뛰어들어야 의미를 가진다는 것으로 와닿았다. 토끼에게 뻔히 질 것을 알고도 시합을 했던 거북이처럼. 다 정해진 결과만을 위한 삶에는 한계를 돌파한다는 개념이 없다. 그래서 인간은 질 것을 알고도 싸워야만 하는 때가 있는 법이고, 설령 실패하더라도 포기하지 않았음에 박수갈채를 받는 것이다. 꼭 기록을 경신하고 훌륭한 퍼포먼스를 선보일 필요는 없다. ‘지금 여기‘를 찾아 계속 방황하는 것이야말로 불굴의 의지 아니겠나. 헤밍웨이도 <노인과 바다>에서 다 보여주었다. 패배했지만 굴복하지 않은 인간의 위대함에 대하여. 가파른 절벽 아래 핀 들꽃에도 벌과 나비는 날아드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