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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샤 ㅣ 페이지터너스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지음, 정영문 옮김 / 빛소굴 / 2022년 12월
평점 :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후로 국내에 독서 열풍이 일었다지만 여전히 문학보다는 비문학이 더 잘나간다고 하겠다. 대체 문학은 왜 이렇게 인기가 저조할까. 뉴스 기사도 세 줄 요약으로 읽는 바쁜 현대인들에게 그저 시간만 잡아먹을 뿐인 종이 쪼가리인 걸까. 그게 꼭 틀린 말은 아닐 수도 있겠다. 나 역시 문학, 특히 소설을 보는 일 순위는 순전히 ‘재미‘ 때문이란 말이지. 다만 이 ‘재미‘를 어느 방면에서 즐기느냐가 다를 텐데, 독서가들이 손꼽아 얘기하는 한 가지는, 남의 인생을 대리 경험할 수 있다는 데에 있었다. 사람은 각자에게 주어진 일 인분의 삶 속에만 존재하기에 나와 다른 타인의 삶을 배척하도록 되어있다. 하지만 문학을 통해서 타인을 이해하고 납득할 기회를 얻고, 더 나아가 평생 느껴보지 못할 감정의 교류를 배워 세상을 대하는 폭이 넓어지게 된다. 개인적으로 비문학은 지식을 얻고, 문학은 지혜를 얻게 해준다고 생각하는데, 이 지혜라는 인사이트는 도출하면 할수록 사람을 겸손해지게 만드는 뭔가가 있다. 하여 많은 현대인들이 똑똑한 데에 비해 뚝딱거리거나 공격적이거나 무례함과 솔직함을 구분 못한다는 현상들도 문학을 읽다 보면 다 해결되리라고 본다. 반대로 비문학만 읽는 사람들은 머리만 커져서 어떻게든 뽐내고 싶어 하지. 이해는 한다만 솔직히 꼴불견임.
유대인 출신의 폴란드 작가가 쓴 <쇼샤>를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만 들었다. 이렇게 책을 읽지 않았으면 내가 폴란드와 유대인들의 삶에 관심이나 가졌겠나라고. 참고로 사람의 뇌는 실제와 상상을 구분하지 못한단다. 따라서 소설 속 이미지들을 연결하다 보면 마치 실제로 겪은 듯한 대리 경험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작품이 노잼이라도 새로운 경험을 했다면 나는 재미있다고 보고, 거기에 인사이트까지 얻어냈다면 독서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한다. 일단 <쇼샤>는 내 기준에 노잼이긴 했지만 그럴수록 뭐라도 뽑아내야겠단 일념으로 읽었다. 주인공이 유대인 랍비의 아들인 것과, 유대교를 벗어나 작가로 살아간다는 설정은 곧 저자의 자전소설임을 말해준다. 1914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지내는 유대민족들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군의 침공으로 전선 바깥에 쫓겨난다. 이때 주인공 아론과 그가 사랑했던 소녀 쇼샤도 헤어지고, 그렇게 이십 년을 못 본 채로 살아가게 된다. 솔직히 이런 설정은 유대인 작가들이 쓴 작품에 꼭 있어서 벌써부터 질리려고 했다. 그나마 랍비의 아들이면서 정통 유대인이길 거부했다는 점이 내 호기심을 자극해댔다.
성인이 된 주인공 아론 그라이딩거는 잡지사에 글을 투고해서 겨우 입에 풀칠하는 중이다. 그는 종종 방문하는 작가클럽에서 한 미국인 부부를 소개받는다. 남편은 백만장자 노인이고 아내는 젊은 연극배우였다. 부부는 마침 희곡을 쓰고 있던 아론과 작품을 계약하고 빵빵한 선불비를 꽂아준다. 그리하여 본격적인 대본 쓰기에 들어가는데, 아 글쎄, 온갖 출연진들과 관계자들이 감놔라 배놔라 하면서 방향을 맘대로 바꾸는 게 아닌가. 을 중에 을이었던 주인공은 남들이 하자는 대로 하다가 현타와서 정신줄을 놓는다. 책 한 권 내지 못한, 잡지에 몇 번 글 싣는 게 다였던 자신이 위대한 극작가로 하루아침만에 변모한다는 게 맞긴 한 건가. 동료가 얘기한 영혼의 정복은 무엇이며, 갈망의 목적은 무엇이며, 자신의 창작욕은 무엇을 원하는가. 갇혀있기가 싫어서 유대교를 떠나왔거늘 다시 계약의 노예가 되어 자유를 잃었으니 그야말로 낭패였지만, 미국의 자본주의는 얼마든지 자신을 함락시킬 힘이 있다는 게 문제였도다.
전형적인 샌님 스타일이지만 꽤나 여자를 밝혀대는 반전 매력의 주인공. 그에게는 러시아 출신의 공산당원 애인이 있었다. 그리고 하숙집 하녀와도 썸을 탔으며, 미국인 아내와 애인이 되었고, 그 밖에도 어느 유부녀랑도 애인 사이를 맺었다. 여기서 비중 높은 미국인 아내 베티에 대해서만 적겠다. 그녀는 우물 안 개구리인 주인공에게 여러 조언들로 큰 꿈을 키워주는 반면, 퇴폐미로 가득한 그에게 매료되어 갈수록 구애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데이트를 하다가 어릴 적에 살았던 동네 바르샤바를 지나가는데, 거기서 헤어졌던 쇼샤 가족을 다시 만나게 된 아론은 사랑의 작대기를 쇼샤에게로 꺾는다. 다만 놀랍게도 그녀는 초등생의 체형을 하고 있었고 지능도 그 수준에 머물러있었다. 그럼에도 옛 향수에 젖어 쇼샤와 함께하기로 한 그였는데, 그렇다고 다른 애인들을 정리했느냐면 천만의 말씀. 심지어 그 애인들은 양다리 사실을 알면서도 아론을 사랑한다. 아무튼 이런 모습들이 정통 유대인이길 포기한 데에서 나타나는 증상이랄까. 채식주의를 하겠다느니, 주초를 안 한다느니 말은 잘 하는데 정작 정결해야 할 부분에서 그렇질 못하니 진짜 내로남불이 따로 없더군.
결국 원래 쓰던 희곡은 흐지부지되었고, 아론은 밥줄이 끊긴 데다 작가라는 직업에 회의감마저 느낀다. 건강이 위독한 미국인 갑부가 유산을 줄 테니 베티와 결혼하고 미국을 가라는 제안을 하는데, 아주 보란 듯이 쇼샤와 식을 올려버리는 우리의 초식남. 허나 이게 맞는지는 그 조차도 확신하지 못했는데, 이제껏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들은 매춘부나 다름없는, 생계를 위해 자신을 팔았던 부정한 타입들이었다. 자신의 바람대로 정결한 유대인과 결혼을 했으나, 다른 애인들에게 계속 마음이 가는 것은 오래전 내려놓았던 유대교의 금지된 법들을 행하고도 얼마든지 잘 지낼 수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쇼샤>에서는 정통성을 져버린, 변질된 유대인의 정체성에 대한 의견들이 자주 나온다. 정통 유대인이길 포기한 시점부터 그는 유대인이나 비유대인이나 할 거 없이 아니꼬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 그렇다고 그들을 탓하거나 원망할 순 없으며 스스로를 깨어있다 하기로 뭐 한 상황. 유대인들에게는 배신자요, 비유대인들에겐 공공의 적일뿐인 그의 마음이 어째서 율법 밖으로 도망하려는지 알 것도 같았다.
쇼샤를 택해 폴란드에 남더라도 그는 유대교로 돌아가지 않는다. 하여 끊임없이 정통성과 부딪히고 다른 유대인들과 껄끄러워질 텐데, 이러다 히틀러가 침공하기도 전에 스트레스로 죽지나 않을까 싶더라. 나는 차라리 베티와 미국으로 가는 것이 그의 영혼을 위한 길로 보였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는 점에서 <달과 6펜스>가 떠오르지만, 뭔가를 갈구하는 게 없는 사람인지라 <달과 6펜스>의 주인공보다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난 이제껏 ‘작가들은 전부 미친 사람이다‘라는 말에 별생각이 없었는데, 아론과 저자를 보면서 처음으로 그 말에 공감해버렸다. 금지된 법을 따르는 장면들에서 <데미안>도 떠올랐지만, 그렇다고 해서 싱어가 헤세와 비슷하다고는 말 못 하겠다. 헤세가 빛 속에 공허라면 싱어는 흑암 속에 공허랄까. 좀 세게 말하자면 싱어에게는 어떤 고유의 색이랄 게 없다. 굳이 고른다면 착잡함 정도려나. 마치 사약이 담긴 그릇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죄수의 느낌. 신을 떠났으니 철저하게 자기 자신만을 믿겠다던가, 아니면 삶의 어떤 가치를 좇겠다는 포부도 없이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태도였다. 그렇듯 아론은 어떤 질문들에도 해답을 찾으려 하질 않았다. 초점 나간 정신 상태와 달리 육체는 성실한 편이라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였는데, 먼 훗날 지인이 말해주길, 모두가 그를 신비주의자라 생각했지만 실은 철저한 현실주의자란다. 과연 그 관점으로 돌아가 보니 아론의 이상주의나 고민들이 전부 현실 문제와 맞닿아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러니까 살면서 별의 별소리 다 들었을 저자도, 나 역시 당신들처럼 먹고 자고 사랑하는 일들을 걱정했던 거라고 털어놓은 듯했다. 그것도 모르고 독자들은 저자를 유대인 프레임 속으로 꾸겨 넣은 건 아니었을까. 역시 문학은 나를 겸손하게 만든다. 자자, 다 함께 자중들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