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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노린 음모
필립 로스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5월
평점 :
나님이 오늘날에 가장 미국인답다고 생각되는 작가인 필립 로스의 <미국을 노린 음모>를 일부러 이 시국에 읽어주었다. 이 작품은 잘못 뽑은 대통령 때문에 일어나는 파국을 다루는데, 마침 국내에 출간된 시기가 현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을 앞두고 있던 때라서 더 주목을 받았었다. 사실 2004년 작품이라 현시점과는 전혀 무관하지만 대중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에는 이만한 것도 없지 않았을까. 아무튼 나는 천조국 빌런의 입후보 때보다 당선 이후에 이 작품을 읽는 게 더 맞아 보였고, 현재 한국의 대통령 또한 입에 담지 못할 만행들로 국가를 무너뜨리고 있어 딱 시기적절하다 느꼈다. 개인적으로 정치에 대해 논하기를 꺼려 하고, 내 글들에 정치색이 묻는 것도 매우 싫어한다. 나도 입장이야 있지만 꺼내고 싶지 않을뿐더러 솔직히 도긴개긴인데 서로 자기들이 맞다고 우기는 걸 보노라면 숨이 턱 막힌다. 그래서 뉴스나 기사도 거의 안 보는 편이다. 어차피 주위에서 다 말해줄 테니까. 아무튼 그런 정치나 사회문제를 너무 접하다 보면 내 정신이 너무 피폐해져서 거리를 두는 편인데, 시국도 그렇고 읽은 작품도 그런 내용이고 하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치색이 들어간 리뷰를 써보도록 하겠다.
이 작품 역시 저자의 자전소설이다. 필립 로스 자신과 가족들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고, 그밖에 인물들도 전부 실존했던 이름들이다. 벌어지는 상황이나 사건들도 막 허구가 아니어서 정녕 이게 소설이 맞나 싶긴 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 시작된 1940년, 겨우 10살의 어린 로스가 보았던 미국의 격동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먼저 반유대주의자인 린드버그 대령이 차기 대통령으로 뽑혀 온 유대인들이 탄식하기 시작한다. 파일럿 출신의 린드버그는 비행기로 독일을 직접 방문하고 히틀러와의 평화정책을 협상했다. 1차 대전의 피해를 생각하며 미국의 참전을 반대하는 의사를 밝혔고, 이에 히틀러는 이런저런 조건을 내걸게 된다. 그리하여 신 정부의 개입으로 유대인 가정들은 서서히 무너지고 흩어져 버린다. 물론 로스의 가족들도 예외는 없었다.
미국인들에게 유대인이란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저 굴러들어 온 민족 때문에 전 세계가 시끌벅적하고, 자국민들도 괜히 눈치 보며 살아야 했을 테니. 이것을 한국에 눌러앉은 이민자들에 대한 이슈로 본다면 금방 이해가 된다. 그 이민자들이 자꾸 한국 사회에 진출해서 우리의 밥그릇을 다 뺏어간다면 기분이 좋을 수 있을까. 아무리 유대인들이 미국을 사랑하고 국가 발전에 기여한다 해도 미국 정부와 국민들을 위협할 만큼의 영향력을 갖게 되는 건 별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을 유대인 작가가 썼다고 해서 무조건 그 편을 들어줄 생각은 들지 않는다. 물론 유대인들이 반유대주의를 비난하는 게 당연하고, 실제 미국에서 색안경 끼고 차별한 일들에 변호할 마음이 없다. 단지 서로의 입장 때문에 누가 더 잘못했다고 따질 수 없다는 얘기다.
로스의 가정사를 말해보자. 일단 로스 집에 얹혀사는 사촌 형이 있는데, 그는 독일과 싸우기 위해 캐나다군에 자진 입대했다가 다리 한쪽을 잃고 돌아온다. 원래도 삐딱했던 사촌 형의 수발을 들면서 로스 집안의 분위기는 날마다 축 처진다. 헌데 그보다도 장남인 샌디의 정치 성향이 가족들과 달라서, 유대인들을 위한 국가정책에 아주 호의적이라는 게 문제였다. 이 한 사람으로 인해 온 집안의 평화가 산산조각 나버린다. 장남은 정부가 세운 유대인들을 위한 사회 프로그램의 봉사자로 활동하면서, 더더욱 린드버그 정부에 불평하는 동족의 낡아빠진 관념을 혐오하게 된다. 장남의 눈에는 서로 윈윈하는 제도와 정책인데, 가족들 눈에는 가정과 집단을 해체시키고 무력화하려는 게 보인단 말이지. 이처럼 제도에 정치가 개입되면 공정과 평등은 물 건너간 건데, 딱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장남 같은 사람들이 판을 흐려놓는다. 이런 상황은 보수와 진보에 관계없이 모두 해당되므로 이 글에 괜히 욱하는 분은 없길 바란다. 아무튼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가족 형태가 바로 정치 성향이 다른 건데 그 예시를 아주 잘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막상 린드버그가 대통령이 되고부터는 거의 등장하지를 않는다. 그리고 한동안은 별다른 분위기 없이 조용하게만 흘러간다. 거기다 유대인들을 위한 각종 제도나 혜택들이 생기자, 린드버그 정부에 순응하는 듯한 분위기도 만들어졌다. 그렇지만 린드버그는 히틀러와 나치를 옹호하고, 파시즘으로 유대인들을 와해하고, 독일에 저항하려는 루스벨트를 전쟁광으로 프레임 씌우는, 전형적인 양의 탈을 쓴 늑대였다. 계속해서 히틀러와 꽁냥대는 현 대통령을 보다 못한 루스벨트가 질책의 연설을 했고, 정부는 루스벨트가 또다시 미국을 전쟁통에 집어넣으려 한다며 힐난했다. (이쯤에서 잠깐 언급된 싱클레어 루이스의 <있을 수 없는 일이야>도 읽어보길 바란다. 같은 테마인데 좀 더 매운맛이다.) 근데 솔직히 전쟁이 애들 장난도 아니거늘 참전 반대쪽을 더 선호하는 게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1차 대전 같은 피해를 막기 위해 얼마든지 꼬리 내리고 저자세로 나갈 수도 있는 건데 그것을 비굴하거나 창피함의 문제로 보아선 아니 된다. 유대인들에게나 처참한 것이지, 일반 미국인들에게는 열일하는 정부였을 테니까.
양측의 입장을 고려한다 해도 저자의 입장과 시선에서 읽고 헤아리는 게 맞겠다. 아버지 세대들도 그렇지만 미국에서 나고 자란 주인공 세대들은 자신을 미국인으로 생각하지, 유대인의 뿌리를 새겨가면서 살지는 않는다. 그런 자신들이 충성을 다했던 미국이 철천지원수에게 영혼을 팔아넘기는데 어떻게 보고만 있을까. 하여 보다 못한 유명 언론 기자 유대인이 차기 대선을 나섰다가 총살 당한다. 그 일을 도화선으로 시작된 포그롬에 유대인들은 신변 위협을 받는다. 린드버그의 평화조약이 과연 미국을 지켜냈다고 볼 수가 있을까. 국민들의 적개심이 미국을 쥐락펴락하는 독일이 아닌 국민에게 향하도록 하는 것, 그렇게 해서 자멸하게 만드는 것이 히틀러의 목적이었다. 다시 총통을 만나러 간 린드버그가 돌아오질 않자, 그의 세력과 측근들을 체포하면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히틀러에게 약점 잡혔던 린드버그의 비하인드가 드러나면서.
린드버그의 말로만 살짝 다를 뿐, 실화가 바탕인 미국의 현대사라서 소설 같지가 않다. 그 격동의 시기를 보낸 유년 시절의 저자도 참 힘들었겠다 싶고. 미국이란 나라는 예나 지금이나 한 가지에 꽂히면 다른 것들을 잘 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헌데 그 좁다란 시야를 한국 정부가 따라 해서 참 큰일이다. 현 정권이 너무나 개차반이라서 그렇지, 이전의 정권들도 먼지가 한 트럭이었다.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자신들이 옳다는 식의 태도가 그래서 웃긴 것이다. 언제나 대선은 최악 중에서 차악을 뽑는 일 아니던가. 밥그릇 싸움뿐인 정치판에 선이 있긴 어디 있어. 그래서 난 항상 자기 주장만 앞세우는 사람은 상대하기도 싫다. 한쪽으로 치우진 이들은 상대가 정답을 말하고 옳은 일을 해도 인정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본인들의 문제점을 알려고도 하지 않으며, 기분 나빴다는 이유로 공격하기에만 바쁘다. 쭉 지켜본 바 내로남불이 심한 사람들이 정치에 잘 몰입하더라. 나님은 중립인데다 누군가와 맞서 싸울 자신도 없어 그냥 몇 발짝 물러나 살아갈 뿐이다. 누구나 필드를 뛰면 감독이고 코치고 간에 그냥 자기가 최고거든. 아무튼 읽어주셔서 감사드리고, 반박 시 님 말이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