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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갈증 ㅣ 페이지터너스
미시마 유키오 지음, 이수미 옮김 / 빛소굴 / 2024년 6월
평점 :
언젠가 시중에 판매되는 과일음료들의 과즙 함량에 대한 논란이 생각난다. 예를 들어 1000ml 정도 되는 오렌지주스에 들어간 과즙 함량이 겨우 n%인데 이것도 오렌지주스라고 보는 게 맞느냐는 식이었다. 그 논란이 일고부터 과일음료마다 함량이 nn%로 증가해서 더욱 말이 많았더랬다. 명색이 ‘오렌지‘주스인데 오렌지는 거의 없고 기타 혼합 성분들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걸 납득하지 못한 소비자들의 분노였다. 물론 음료의 제조 성분과 비율은 식약청의 검수 및 승인 하에 유통되므로 문제랄 것도 없으나, 사람 마음이란 게 논리적이질 못해서 만족할 만한 답을 듣기 전에는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랑‘이라는 감정 또한 수많은 복합 성분으로 구성돼있어, 각자가 생각하는 주 성분의 함량이 적다고 느껴질 때 불만이 찾아드는 법이다. 1%의 애정과 99%의 미움+질투+짜증+우울+권태가 무슨 사랑이냐고 할 사람이 있는 반면 또 누군가는 그런 사랑도 존재한다 믿고 잘만 받아들인다. 이제는 인간의 감정 대부분이 해석되었고 생각보다 단순 명료하다고 판명되었으나 사랑의 감정만큼은 여전히 복잡 미묘하여 풀지 못할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그리고 나님은 이 문제가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아있어주길 바란다.
일본 고전문학의 마스터피스라 부를만한 <사랑의 갈증>을 읽었다. 옛 일본 작가들이 다 그렇지만, 미시마 유키오도 참 빠지지 않는 감성 변태랄까나. 이성과 본능을 널뛰는 감정의 줄타기가 가히 예술이었다. 특히 인간이라는 존재의 최저점과 최고점을 단번에 훑는 통찰과 기교에 손발 다 들었다. 또, 단편이 가진 미완의 느낌을 싫어하는 내가 푹 빠져읽었다는 것도 이례적인 일이다. ‘페이지터너스‘ 시리즈를 쭉 읽어본 바, 기획자의 안목이 매우 탁월하다고 생각된다. 잡담은 이쯤 해 두고, <사랑의 갈증>은 하인을 사모하는 마나님의 불치병을 다루고 있다. 남편 따라 전원생활을 하게 된 차도녀 에쓰코. 외도를 일삼던 남편이 병사하여 시아버지의 비공식 아내가 되기로 한다. 거주 중인 별장에는 남성미 뿜뿜하는 어린 하인이 있는데, 이 친구의 강력한 호르몬이 에쓰코의 여심을 밤낮으로 자극해댔다. 안주인의 체면상 차분한 태도로 일관했지만 다른 가족들에겐 둘도 없는 꿀잼 구경거리였던 것. 허나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하인한테 플러팅 해봤자 소귀에 경 읽기였고, 이에 침착함을 잃은 마나님의 질투력이 갈수록 치솟기 시작한다. 사랑의 총알을 맞고도 어쩜 그렇게 멀쩡할 수가 있느냐면서.
단편소설답게 줄거리는 별거 없지만 장면 장면마다 심리 묘사의 디테일이 엄청나다. 일단 주인공 에쓰코는 실어증에 걸린 사람처럼 감정의 기관들이 멈춘듯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도시 사람이 시골에 와서인지,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해서인지 잘은 몰라도 느낌상 원래 속을 알 수 없는 캐릭터로 보인다. 왜 주변에 그런 사람들 한두 명씩 꼭 있잖아. 아무튼, 갑작스러운 병에 걸려 몸져누운 남편을 간병하며 야릇한 쾌감을 맛본 그녀. 죽음에 이르러서야 자신을 찾는 남편에게서 우월감을 느끼자, 그 기분에 취하고 싶어서 남편이 죽지 않을 만큼만 간병에 힘쓰는 광기를 보여준다. 끝내 죽은 남편을 화장하던 날, 에쓰코는 내리쬐는 햇빛에 온 마음을 뺏겨버린다. 이상하리만치 평온한 지금, 햇빛 말고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듯이. 이어서 미망인이 된 자신을 우리 안에 갇혀있다 나온 한 마리의 사자처럼 여겼다. 똑같은 세계라도 야생 사자보다 해방된 사자에게 더 크고 넓게 느껴지는 법이었다. 그렇듯 쏟아지는 햇빛들은 남편을 잃은 그녀가 비로소 인간이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뒤늦게라도 해방된 삶을 찾아가나 했더니, 먹통이었던 감정기관이 오작동을 일으키는 게 아닌가. 에쓰코는 슬픔, 가난, 원망 같은 부정의 감정 스위치는 꺼놓고, 행복에 대한 긍정 회로만 돌아가도록 놔두었다. 또, 자기 세뇌에 불과한 그 긍정 에너지가 외부로부터 간섭받는 것을 극도로 꺼려 했다. 이것을 남편한테 얼마나 시달렸으면 그랬겠냐고 1차원적으로 판단해선 안된다. 어째서 저자가 주인공을 우리 밖에 나온 ‘사자‘로 표현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인간의 다채로운 감정이 다 마비되고 오직 한 가지만 작동한다는 건 기이하다 못해 섬뜩한 일이다. 그녀의 강박적인 긍정의 또 다른 이름은 행복의 결핍인데, 남편의 고통이 길어지는 시간만큼 행복하단 걸로 보아 심연에 삼켜진 괴물이 되리라는 사실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알다시피 괴물이 된다는 건 일반적인 이해의 영역을 벗어났음을 뜻한다. 하여 남편과 그의 애인들을 질투하는 듯 보이지만 내 눈에는 질투하는 에쓰코 자신의 모습, 그 역할놀이에 심취해있는 걸로 보였다. (심적의)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널뛰는 것 또한 남편한테 하도 데여서 맛이 간 게 아니라 갖고 있던 또 다른 페르소나를 꺼냈을 뿐이다. 어느덧 남들처럼 보통날을 보내지만 여전히 잡생각과 자의식에 사로잡혀있는 에쓰코는 남편의 죽음이 선사했던 자극이 그리워졌다. 자신의 심장을 뛰게 했던 그 죽음이 곧 행복이었다는 결론까지 내린다. 이렇게 죽음을 숭배하게 되면 그밖에 모든 삶의 순간들이 시시해져 버린다. 에쓰코가 엄격하게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이 기대하던 것에 배신당하는 것보다, 오히려 애써 무시했던 것에 배신당할 때 더 깊은 상처를 입는다(108p).』 그래서 에쓰코는 어떠한 것이라도 기다려선 안된다는 교훈을 얻는다. 남편이 정신 차리고 자신과 가정에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지난날의 잘못과 실패를 생각하며, 다음 사랑에게는 제대로 어필하기로 다짐한 그녀. 그래서 하인에게 새 양말을 선물했더니 무슨 이유에서인지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린 게 아닌가. 침착히 대응했지만 속으로는 자신이 사모하는 대상을 꾸짖을만한 명분이 생긴 것과, 그를 나무라는 과정에서 자신의 우월감으로 기뻐하였다. 그것은 오래전 남편을 간병할 때에 맛보았던 ‘필요악‘이었고, 이제서야 그 필요악이 제 삶의 원동력이란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 된 셈이다. 그녀가 감히 가질 수 없었던 정복욕을 하인에게 느끼자 다시금 자기 세뇌에 가까운 행복 회로를 돌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탈출한 사자는 사냥하는 재미를 알아가게 된다. 그리고서 남긴 말은 다음과 같다.
찾아낸 삶의 의미를 소급함으로써 이 삶의 이중성을 통일하려는 욕망이 우리 삶의 실체라고 한다면, 삶의 보람이란 끊임없이 발현되는 이 통일의 환각, 아직은 소급할 수 없는 생의 의미를 가설적으로 소급해 보는 데서 생기는 환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의미의 ‘삶의 보람‘이라는 것은 에쓰코에게는 아무런 인연도 관계도 없는 대상이었다. (117p)
일반 사람들이 삶의 ‘의미‘와 ‘보람‘을 연결 지으려고 애쓰는 반면, 에쓰코는 그 둘을 분리하려고 애를 쓴다. 이런 태도는 의미나 보람 따위는 필요 없다는 패배주의적인 말보다 더 심각하고 위험하다. 문제가 생기면 어떤 식으로든 정의를 내려서 편해지고 싶은 게 인간이다. 하다못해 회피형 들도 ‘회피‘라는 정의를 내리는데 말이다. 그런 반면에 우리 마나님은 어떠신가. 페르소나를 번갈아 썼다가 결국 하나 남은 긍정 회로마저 고장 나버리고 말았다. 그 증상은 자신에게 마음 주지 않은 대상을 벌하려는 마음과, 자신도 그 벌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동시에 나타내었다. 그렇게나 죽을 것 같다면 주변에다 도움을 요청해도 될 것을, 왜 혼자 끙끙대고 있는지 이해 못 할 독자들에게 하는 말. 삶의 어려움을 찾아내는 능력, 참 피곤하게 산다고 할만한 이 능력이 반대로 나를 지켜주는 갑옷이었다고(119p).
예의범절이나 사회적 가면 등을 중요시하는 사람일수록 무례하고 오만한 사람들이 눈에 더 잘 들어오는 법이다. 그런 세상 틈바구니에서 나를 보호하려는 결심 속 어딘가에는 나도 저들처럼 천박해지고 싶다는 욕망 또한 존재한다. 품위 있는 신사 숙녀들도 친구들끼리 만나면 욕도 좀 하고 시답잖은 아재개그도 하고 놀지 않나. 에쓰코가 지닌 선악의 공존과 대비도 그런 욕망의 연장선이다. 남들이 생각하는 행복을 느낄 수 없다면 차라리 고통으로 결핍을 채우는 편이 더 간단했을 테니. 그녀가 말하는 ‘긍정‘이란 부정 에너지에서 오므로, 행복하려면 자신을 불행 속에 던져 넣어야만 했는데 다 그렇듯 이 모순은 결코 오래 가질 못했다. 마음이 아프다 보면 몸까지 아파지듯, 몸밖으로 새어 나온 통증이 그녀를 무너뜨리고 있었으니까. 그냥 하인한테 가서 속 시원하게 고백하고 차이던가, 아니면 본인이 별장을 떠나버리던가 하지, 왜 그렇게까지 고통에 빠져살려고 할까. 이같이 한 가지 생각에만 골몰하는 이들은 미운 오리 새끼처럼 언제까지고 계속 겉돌게끔 돼있다. 한때 그랬었던 나님의 의견을 보태자면, 몸이 멀어져서 마음도 멀어지게 하는 수밖에 없더라.
하인을 좋아하는 그녀의 마음을 가족 모두가 알고 있거늘, 들키지 않으려 애쓰는 애쓰코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그렇게나 자의식 과잉이면서 가족들의 시선은 왜 알아채지 못했을까? 에쓰코를 보노라면 딱한 마음이 들면서도 이 원맨쇼를 언제까지 할 건지 두고 보자는 못돼먹은 생각도 든다. 그녀가 고통에 앓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 시아버지 또한 나와 같은 마음이었지 싶다. 저자는 이 같은 불행을 ‘공범 같은 친밀감‘이라고 표현했다(189p).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쉬쉬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이중심리를 이토록 집요하게 건드리는 작가가 몇이나 될까. 여하튼 자신만의 죽음과 사투 중인 그녀를 좋든 싫든 응원해 주고 싶어졌다. 죽어가는 남편이 살고자 몸부림치던 심정을 또 다른 방식으로 알아가는 중이었으니.
역시 예상한 대로 가질 수 없어 파괴한다는 결말이었다. 괴물이 될 거라던 예상도 적중했다. 뭐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고, 주인공의 결핍이 소유의 감정에서 정복의 감정으로 변이 되었다는 점을 주목해 보자. 술을 먹다 보면 술이 나를 먹는다는 흔한 말이 있다. 그처럼 <사랑의 갈증>에서는 창조한 사랑에 역으로 삼켜진, 위험한 줄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마약 같은 욕망에 정복당한 인생의 불행을 묘사했다. 이 소유의 사랑과 정복의 사랑은, 에쓰코가 끌렸던 ‘빛‘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남편과 지내던 시절에는 햇살 즉 태양빛에 구원을 받았지만, 하인을 덕질하는 지금의 그녀는 불(fire) 빛에 정신을 뺏긴다. 따사로운 태양빛은 맑은 정신을 갖게 하지만, 정신을 홀리는 불빛에 다가갈수록 화상을 입게 된다. 비록 고통스럽긴 해도 그 불행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주므로 끌리는 게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원래 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사람일수록 악에 대한 관심도가 높은 법이니. 과연 에쓰코의 결핍은 다양한 사랑의 형태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을까. 고작 n%의 과즙이 들어간 것도 과일주스로 쳐준다면, 나는 광기로 가득한 그녀의 결핍도 사랑이었다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