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란을 날려라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조지 오웰 지음, 박경서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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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랜만에 읽는 조지 오웰이다. 독자들 사이에서는 호불호가 심한 작가로 분류되는데 일단 나는 오웰의 작품을 좋아한다. 그랬는데 이번 작품은 여태까지의 애정이 팍 식어질 정도로 거북했던, 다른 말로는 지나치게 날 것인 글이어서 곤욕을 치러야 했다. <엽란을 날려라>는 오웰 스스로도 돈벌이를 위해 썼다고 고백한 바 있고, 그래서인지 그의 6편의 장편소설 중에 가장 인기 없는 작품이기도 하다. 물론 국내 한정이다. 이 책 또한 저자의 자전소설로써, 지독한 가난과 돈에 대한 열등감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다. 이 ‘가난‘이라는 주제를 평생 천착했다던데 글쎄, 적어도 이 책에서는 화두만 던져놓고 나 몰라라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책방 점원으로 일하는 서른 살의 고든 씨. 가난하지만 품격 있는 시인의 삶을 꿈꾸며 잘나가는 광고사의 카피라이터를 때려치운 상남자이다. 뜻은 좋았는데 막상 현실에 부딪히자 창작열은 줄어들고 풀칠하기에 바쁜, 본인은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영락없는 실패자로 살아가고 있다. 글을 쓰고 살겠다는 집념 하나는 인정하겠으나 이이도 참 어지간히 현실감각과 융통성이 없는 부류였다. 도대체 옛날 문인들은 죄다 유아독존인 걸까. 가난이 낳은 피해의식은 전부 돈 문제로 귀결시키고 있었다. 소소한 일상생활부터 관계 유지까지 모든 게 돈이 개입되고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힌 고든 씨. 그래서 남들의 호의와 배려도 싹 다 거절하고 저 혼자만의 체통을 지키느라 고군분투 중인데, 으아아아 증말 피 말리는 줄 알았다.


가난한 문인들의 자존심 사수 궐기. 솔직히 이런 류의 서사는 워낙 많은 데다 대부분 거기서 거기라 이젠 좀 질리는 맛이 있다. 그나마 오웰이 썩어도 준치였던 게, 돈의 세계를 제 발로 걸어 나와서 가난함을 탓하는 이중성을 그려냈다는 데에 점수를 주고 싶다. 가난한 예술가의 영혼을 찬미함과 동시에 돈에 대한 질투의 모순을 보면서 독자는 옳고 그름의 분별력이 흐려지게 된다. 이 모호한 선의 기준은 최종 장까지 이어져, 열린 결말도 아닌데 마치 독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다소 무책임한 태도로 보인다. 특히나 이런 사디즘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모르겠다.

참을 수 없는 욕정으로 넘치는데 그것을 해소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것은 빌어먹게도 얼마나 부당한 일인가! 돈이 없다는 이유로 왜 우리는 그것을 박탈당해야만 하는가? (203p)


타인에게 존중받지 못하는 건 모두 돈이 없는 탓이라고 믿는 고든 씨. 왜곡된 해석과 억지 주장들이 어찌나 치를 떨게 하는지, 이 응석을 받아주는 주변인들이 죄다 보살이었다. 얼마 전 읽은 <지하에서 쓴 수기>의 주인공과도 닮았는데, 그 친구는 그래도 문인의 프라이드만은 고수했던 반면에 고든 씨는 매번 돈 타령만 하고 있으니 참으로 꼴불견인 것이다. 이에 비하면 <달과 6펜스>의 주인공은 신사였다고 느껴질 정도니 말 다 했다. 아니, 그렇게 돈에 쪼들려서 체면 구기는 게 싫다면 더 나은 직장을 구하던가, 왜 세상이 제 기준대로 안 돌아간다며 불평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해설에서는 그의 고집과 저항이 연민의 정을 자아낸다고 하던데, 미천한 일개 독자로써 한 말씀 올립니다. 엿이나 드세요. 본인이 백 번 옳다 한들 남들 가슴에 대못을 박아도 되는 건 아니거든. 이렇게 겉멋만 든 모순 덩어리보다는 차라리 자본주의를 숭배하는 속물이 훨씬 낫다고 본다.


고든 씨는 투고했던 시가 팔리면서 들어온 돈을 하루 만에 탕진해버리고 만다. 또한 경찰 폭행죄까지 범하여 결국 직장도 잘리고 하숙집에서 쫓겨나게 된다. 만약 이 부분도 저자의 자전적 경험이라면 정말 박수 쳐주고 싶을 정도다. 이렇게까지 밑바닥의 삶을 몸소 체험하기란 쉽지 않을 테니. 아무튼 아이러니하게도 상황이 악화되자 고든의 심신은 반대로 안정되어간다. 급여가 더 낮은 일자리를 얻고, 더 누추한 방을 구했지만 그게 오히려 체면 차리지 않아도 될 구실을 준 셈이었다. 이 얄팍한 자유에 몸과 마음을 맡기고 나니 그 자신이 런던 어딜 가든 눈에 보이는 엽란과 같은 신세로 느껴졌다. 즉 자신은 길모퉁이와 집구석마다 자리하고 있는 풀 한 포기처럼 흔하고 별 볼일 없는 존재임을 자각한 것이다. 그런 게 싫어서 이제껏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다 손절하고 살았거늘, 보다시피 결과는 이 모양 이 꼴이다.


이렇게 대책 없고 무책임한 인간에게, 모든 걸 내려놓고 자포자기할 만큼 열심히 살긴 했는지 물어나 보고 싶다. 스스로를 존중치 않는 이들은 결국 제 인생이 아닌 남의 인생을 사는 것과 다름 아니다. 결국 돈과의 전쟁에 굴복한 고든 씨는 남들처럼 돈의 규범에 따라 품위를 유지하기로 한다. 끔찍했던 광고사에 다시 들어가고, 애인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다. 돈이 주는 명예와 존경은, 자신과 다름없었던 엽란을 날려버리는 행위로 얻을 수가 있었다. 이로써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건만 전의를 상실한 그는 더 이상 펜을 잡지 않는다. 과연 고든 씨는 패배자에서 벗어났다고 해야 할까. 이제라도 정신 차렸으니 다행인 것일까.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는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으로 살았지만 보여지는 걸 중시한 탓에 남의 인생을 흉내 낸 것에 불과했다. 자신의 이상을 앞세워서 세상과의 타협을 불경한 것으로 여길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 고독한 싱글 플레이어로 살아갈 게 아니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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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2-09 16: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아독존 맞습니다. 기승전결을 알고 써야하니 그럴 수 밖에요. 그러니 물감님이 너그럽게 봐주십쇼. ㅋ
전 조지오웰 불호에 가깝죠. 글을 어렵게 쓰는 건 아닌데 또 딱히 와 닿지는 않더라구요. 하긴 주요작 동물농장이나 1984도 안 읽어 본 제가 이렇게 말 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ㅠ

물감 2024-02-09 17:01   좋아요 1 | URL
캐릭터를 그렇게 잡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만, 왜 하나같이 대중의 비난을 한 몸에 받겠다는 듯한 스탠스여야 하는지 이해가 안가요.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인 셈인가..
말씀하신 <동물농장>과 <1984>는 활동 후반에 나온 작품이라서 그런지 전 좋았어요. 이 책은 활동 초반에 나와서 그런지 다듬어야 할 구간이 꽤 보입니다. 왜 인기없는 작품인지 단번에 알겠네요 ㅋㅋㅋ

stella.K 2024-02-09 17:09   좋아요 1 | URL
아참, 이게 또 영화로도 만들어졌다잖아요. 혹시 보셨나요? 엽란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혹시 아시겠는지요?

물감 2024-02-09 17:14   좋아요 1 | URL
영화가 있었군요. 딱히 보고 싶지는 않네요 ㅋㅋㅋ
책 서두에 엽란 설명이 있는데요, 화초처럼 여러 잎사귀가 달린 관상용 식물이라네요. 아마도 영국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풀때기중 하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우끼 2024-02-09 19: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난은 구조적인 게 맞다고 생각해요. 개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자기자신을 존중하려 해도 그것마저 어려운 게 가난이라고 보고요. 성격이야, 가난에 처한 존재만 나쁜 것도 아니고요.

물감 2024-02-09 19:54   좋아요 0 | URL
제 글이 가난의 여러 모양을 고려치 않고 일반화한 것처럼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요 친구가 재능, 인맥, 기회도 있으면서 활용할 생각은 안하고 이런저런 탓만 하는 게 꼴뵈기 싫어서 그렇습니다. 사실 성격이야 어떻든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주변에 피해는 주지 말아야죠.

페크pek0501 2024-02-23 2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 동물농장, 1984년, 그리고 에세이인 코끼리를 쏘다, 나는 왜 쓰는가 등을 읽었는데 이 작품은 몰랐네요. 저도 조지오웰의 글을 좋아합니다. 어떤 에세이에서 돈을 벌기 위해 서평을 썼던 이야기를 했는데 서평가로도 유명하죠. 물감 님 덕분에 알게 된 이 작품을 검색해 보겠습니다.

물감 2024-02-25 09:40   좋아요 1 | URL
이제는 좀 식상하다고 느껴질 문필가의 이야기였고요, 스토리텔링도 다 아는 맛이어서 그냥 그랬습니다. 이런저런 경험이 많은 작가라 그런지 생동감만은 끝내줘요. 근데 어쩐지 주인공을 일부러 욕 먹이려고 작정한듯한 느낌이었어요. 여기에 어떤 의도가 있는듯한데 저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페크 님이 읽어보시고 한번 확인해봐주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