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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 ㅣ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아니 에르노 지음, 이재룡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평점 :
아니 에르노의 작품은 아무래도 어렵다. 아니, 어렵다는 단순한 표현보다 난해함과 복잡 미묘 쪽이라고 해야 하나. 전혀 못 알아들을 내용은 또 아니니까. 이번 작품도 얇아서 도전해 봤다가 낭패를 봤다. 그나마 해설 덕분에 뭐에 대한 부끄러움인지를 알겠더라. 에르노의 말은 명확하게 나가는 법이 없고 늘 빙빙 돌려대기만 한다. 실제로 이런 타입과 대화하다 보면 나까지 붕 떠있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 사람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뭘까 싶어 화병도 생기고. 여하간 이 분은 나랑 안 맞음.
어머니를 죽이려던 아버지를 목격한 게 시작이었다. 그때의 강렬한 장면은 12살의 세상을 하나에서 둘로 갈라놓았다. 집안은 화목하기만 한 곳이 아니었고, 학교는 흙수저들을 차별 중이었으며, 2차 성징이 온 친구들은 어른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일상의 모든 법칙들은 하나도 지켜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 사실을 ‘그 사건‘으로 마주하게 되었고, 그 신세계가 당연하다는 듯한 사람들 속에서 ‘나‘는 말 못 할 부끄러움을 느껴야만 했다.
제2의 세계에서는 당연해야 할 일관성이 없이도 잘만 돌아가고 있었다. 제멋대로인 행동, 쓰지 말아야 할 언어, 외설적인 활동, 어긋난 예절법 등등 관례와 규칙에서 벗어나는 모든 짓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 집단이든지 우위와 서열이 있었으며, ‘나‘는 이 오류의 세계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했다. 이 점을 알게 해준 ‘그 사건‘은 저자의 불행을 벌어놓았던 것이다.
저자의 부끄러움, 즉 수치심의 원인은 자신이 속했던 안쪽 세계와 바깥 세계를 구분 짓는 계급 때문이었다. 폭력과 소외를 마주한 뒤로는 다시 안쪽 세계에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남들 따라 범법자가 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윤리와 종교의 가르침들은 정녕 무엇을 위한 것이었던가. 그날의 일로 12살의 어린아이는 순수를 잃었고, 그 후로 저자는 논란을 몰고 다니는 파격적인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 작품을 쓰고 난 후로는 저자가 부끄러움에서 해방되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해설에 따르면, 마음속 밑바닥에 깔려있는 은밀한 치부를 후련하게 떨쳐버린 다음에야 비로소 자유로운 글쓰기가 가능했을 거라는데, 나도 이 말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에르노는 이것으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