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3권 합본 개역판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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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명저의 기준이 뭘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십중팔구가 박수 치는 작품도 누군가에겐 느낌이 안 올 수가 있는 건데, 작품 볼 줄 모른다며 한심하게 보거나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들이 꼭 있다. 반대로 작품의 어디가 어떻게 좋은 지도 모르면서 그 십중팔구 쪽에 끼고 보는 사람들도 정말 많다. 오랫동안 독서와 글쓰기를 하면서 느낀 건데, 한국인은 진짜 좀 이상한 민족이다. 이번에 국내외에서 굉장한 파급력을 자랑했다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읽게 됐다. 헝가리 문학도 처음인데다 슬라보예 지젝이 언급한 책이라고 해서 관심이 갔다. 그럭저럭 잘 읽었는데 이상하게도 남는 게 별로 없어서 민망했다. 평소에 내가 극도의 중립 상태라서 별 감흥이 없었나 보다.


세 개의 중편을 하나로 엮은 책이다. 인물과 배경이 시간의 순서대로 이어지긴 하나, 저자가 연작을 생각하지 않고 썼다니까 참고하시길. 1부 내용은 어린 쌍둥이 형제의 성장과정이다. 엄마가 전선을 떠나면서 할머니한테 애들을 맡겼고, 쌍둥이는 산골 집에서 자연인의 생존법을 배워나간다. 감정이 결여된 쌍둥이는 잔인한 말과 이해 못 할 행동들을 서슴없이 행하였다. 먼 훗날 글쟁이가 된 쌍둥이는, 연필을 쥘 때부터 해석의 여지가 없는 글만 써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들처럼 저자 또한 모든 문장에서 감정을 제하여 눈앞의 보이는 날것만을 서술하였다. 1부만 보면 크리스토프가 자연주의구나 할 텐데, 3부까지 읽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느끼게 된다.


2부는 한 명이 국경을 넘어가 홀로 남겨진 루카스의 내용이다. 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형인 클라우스는 타국으로 가고 루카스는 할머니 집에 남기로 한다. 분신이 사라진 뒤에야 이웃들과 교류하며 평범한 일상을 갖게 된 소년. 또다시 공습경보가 터지고, 마침 쌍둥이를 데리러 온 엄마가 포탄에 맞아 눈앞에서 죽는다. 다들 도망치기 바쁜데 루카스와 할머니는 절대 집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성인이 된 그는 여자도 만나보고 인맥도 만들면서 어떻게든 살아본다. 어릴 때와 달리 지금은 최소한의 욕구랄 게 있었지만 뭘 하든 영혼이 없었다. 그가 형과의 재회를 기다리는 걸 알고 모두들 이해해 주었다. 오직 사실만을 기록하자던 어릴 때의 원칙을 삶 전체에 적용한 루카스에게는 의미를 부여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그래서 돈을 태워버리기도 하고, 친한 이의 죽음에도 태평했고, 형에게 썼던 글들에서 많은 부분을 지워버리기도 했다. 마치 삶이란, 생명을 유지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태도이다. 안 그래도 힘든 삶을 괜히 더 복잡하게 만드는 인간의 존재란 무엇인가.


사실주의 작품이면 그냥 보고 느끼는 대로 이해하고 감정 지을 텐데, 이 작품은 어느샌가 해석의 여지를 주는 이야기로 바뀌어서 혼란스럽다. 문장들은 여전히 날것이지만 갈수록 구조가 묘하게 틀어지는 것이다. 그러다 2부 후반부에 등장한 클라우스의 신분을 증명할 수 없는 세 가지 개인정보가 거짓말이라며 강제로 바꾸는 장면이 나온다. 국경을 넘어간 클라우스의 안전을 위한 장치였지만, 지금까지의 존재를 부정하게 된 꼴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3부는 50년 뒤에 클라우스가 루카스를 찾아오는 내용이다. 한참 전에 떠난 루카스를 대신해 지역민들이 클라우스를 맞아준다. 결국 이런 엔딩인가 싶었는데, 클라우스의 과거가 뒤죽박죽 나오기 시작한다. 그 회상들은 우리가 1부, 2부에서 보았던 장면들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고, 이전까지의 내용과 클라우스의 기억 중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가 없게 돼버린다. 이어서 흐름은 루카스/클라우스가 쌍둥이가 아니라 처음부터 한 사람이었다는 명제로 넘어간다. 몇몇 주변인들도 헤어졌던 형제의 이름을 언급하고는 있는데, 그 형제가 실존 인물이었다는 증거가 어디에도 없는 거다. 회상에서도 등장하는 쌍둥이의 기억들이, 제 존재를 지키려고 만들어낸 허구였던가.


만약 허구의 인물 쪽이 정답이라면, 인생 자체가 거짓으로 되고 만다. 허상을 쫓아온 삶. 그것이 딱하고 안타깝기만 할까. 오히려 루카스/클라우스는 그렇게라도 살아서 됐다고 본다. 어떠한 의욕도 소망도 없는 아이가 그래도 살겠다고 마음먹었던 건 형제가 있어준 덕분이니. 비록 가상으로 일궈낸 믿음이었다 해도, 반쪽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동안 남들을 돕고 말동무가 돼주는 등 충분히 존재를 증명했으니까. 마지막 장면들이 진짜 세긴 한데 이 작품이 존재에 대한 이모저모를 논하려고 쓴 건 아닐 테다. 애초에 한 권짜리 책도 아니었고 지금의 제목도 없었으니까. 어쨌거나 전쟁 관련 이야기답게 삶의 모순은 실컷 구경했다. 슬라보예 지젝은 둘이자 하나인 쌍둥이처럼 살아야 함을 강조했는데 첨엔 이게 뭔 소린가 싶었다가, 내 안의 나를 분리시키는 연습과, 떨어져 나간 나를 다시 합치려는 노력을 말한 걸로 이해했다. 어라, 이렇게 쓰고 보니 명저가 맞긴 하네. 근데 내가 좋다고 해서 누구나 좋은 책은 아니므로, 앞으로는 절대 책 추천 따위 하지 않을 생각이다. 각자 끌리는 거 읽으시되, 투명하고 솔직하게 독서합시다. 스스로를 그만 좀 속이자고요. 증말 파이팅 코리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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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3-07-07 21:0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입시교육이 솔직하지 못한 독서인을 만드는데 크게 한 몫 했다고 생각해요.
저도 그런 사람이고 때때로 반성하지만 쉽지가 않네요.
김누리 교수가 ‘자기 생각 한 줄 없이 대학에 입학 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라고
하더군요. 그래도 물감님 같은 독자들이 있어 또 한 번 되돌아보게 됩니다.ㅎㅎ

물감 2023-07-07 21:53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교육법 탓도 있고요, 남들 눈치보느라 그렇다고도 생각해요. 요즘 한국인들은 감정표현에 완전 과감한데 왜 독서는 그렇게 남 눈치를 볼까 궁금해요.
의견 들려주신 미미 님께 감사드립니다ㅋㅋㅋㅋ

새파랑 2023-07-08 09: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너무 좋았어서 이번에 나온 개정판도 샀는데 ㅋ 그런데 왠지 저도 십중팔구 쪽에 끼어 보려고 한 듯한 기분도 듭니다 ㅡㅡ

전 철학은 잘 모르지만 이책에서 그리는 낯설고 선명한 분위기가 너무 좋았습니다. 1,2부는 정말 좋았던거 같은데 3부에서는 약간 갸우뚱 했던 기억이 나네요 ㅋ

물감 2023-07-09 13:49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제 기준에 새파랑 님은 십중팔구 쪽이 분명하나, 독서와 글쓰기가 성실하셔서 참 애매합니다. 양보다 질이라고 늘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꾸준히 읽는 게 어디냐 싶어서요! 새파랑 님은 제게 연구대상 뭐 비슷한 분... ㅋㅋㅋㅋ

저도 철학 몰라요. 그냥 읽다보면 이런저런 촉이 오고, 그걸 붙잡아 쭉쭉 사고가 뻗어나가는 트레이닝을 하는 거ㅋㅋㅋ 저 역시 1~2부가 너무 좋았는데 3부는 뭔가 뜬구름 잡는 기분이었어요. 갑자기 집중력에 문제가 생겼는 줄 알고 몇 번이나 앞으로 돌아가서 읽고 그랬네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목련 2023-07-10 1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읽어야 하는데.
책장에서 합본이 아닌 세 권이 나란히....

물감 2023-07-10 12:23   좋아요 0 | URL
늘 궁금했던 책이었는데 읽어보니 꽤 만족스럽습니다. 분권으로 구매하셨었군요! 가독성 좋아 금방 읽으실 거에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