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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지내요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정소영 옮김 / 엘리 / 2021년 8월
평점 :
어떻게 지내냐고 묻는다면. 퇴사하고 이제 한 달 좀 넘었는데 맨날 바람 불고, 꽃가루 날리고, 주말마다 비가 내리질 않나. 그래서 반강제로 방콕 중인데 아 글쎄, 내가 이렇게 집돌이가 적성에 맞을 줄 몰랐네. 그거 알아? 집돌이 집순이에도 두 가지 유형이 있대. 뭔가 사부작사부작 거리는 걸 즐기는 유형과, 침대에서 거의 안 내려오는 유형이라는데 나는 그 두 사이에 끼어있는 세 번째 유형인갑네. 돈 걱정만 아니면 1년 내내 방콕할수도 있겠던데. 맨날 비가 찔끔찔끔 오다가 오늘은 꽤 많이 쏟아지더라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혼자가 익숙해져 버린 지금을 깨뜨리고 싶어질 날이 올까. 혼자가 편하지만 평생 혼자여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건 또 쓸쓸할 거 같은데. 연애하는 것도 이제 지겨워. 그냥 이대로 살다 독거노인 될 팔자인가.
이 울적한 분위기에 어울리는 소설 한 권 읽었지. 사실 소설보다는 거의 일기라고 봐야겠던데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시한부 판정받은 암 환자와, 그 곁을 지키는 절친의 무수한 감정 변화를 기록한 책이었어. 온통 우울한 내용뿐인데도 너무 좋더라. 두 사람 외에도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나이 든 여성들의 일상 속 감정들도 다루는데 아 역시나 좋았어. 왜 그런 거 있잖아. 강렬한 자극을 받았을 때에 새겨진 기억과 감정들. 절대 변치 않을, 영원하리라 했던 그 감정들이 어떻게 지워지고 왜 바뀌는지를 설명해 주는 그런 책이었어. 죽음 앞에서는 무엇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고, 반대로 무엇도 의미를 가질 수가 없게 되지. 과연 살면서 불필요한 감정이란 게 있긴 했을까. 나의 확신과 판단에는 또 얼마나 많은 오류가 숨어있었을까.
암 환자인 친구는 온갖 생각과 감정들이 들쑥날쑥해. 취향과는 전부 멀어지고, 외면한 것들은 흥미로워지고, 소중했던 기억에는 결함이 발견되고, 멍청하거나 혐오스러운 것에도 마냥 너그러워지는 거야. 인간이란 참 이상하지. 그렇게 많은 시험과 경험에도 학습은커녕 오작동이 일어난다는 게. 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사실은 명령 값부터 잘못 입력했던 거였어. 예/아니오로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인생이란 없고, 그래서 우리의 믿음과 정답들은 온통 오류투성이란 거야. 결국 확실한 것도 영원한 것도 없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선을 긋는 데에 목숨을 걸고 있지. 열심히 살지 말라거나 헛수고한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냐.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현실에 좀 더 관대해질 필요성을 느꼈을 뿐이야.
죽어져가는 친구 앞에서 주인공의 마인드 컨트롤은 끝내 무너지고 말았어.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될 친구의 죽음보다도, 친구의 고통이 곧 내 소유가 될 거라는 공포 때문에. 나 참. 죽음도 고통이고, 삶도 고통이라니. 뭐 이런 코미디가 다 있어, 그치? 작중에 이런 격언이 나와. <친절하라. 네가 마주치는 사람들 모두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으니.> 과연 맞는 말이야. 불안하지 않은 사람은 없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아무리 혼자가 좋다는 사람들도 뼛속까지 혼자이길 원하진 않을 거라 생각해. 내가 그렇거든. 아무튼 잠재된 고통까지 다 끄집어낼 최후의 날까지 죽어라 버텨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