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의 증명 (리커버 특별판)
최진영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그리 잘 사는 집안은 아니었다. 전학도 많이 다녔고, 그래서 제대로 된 친구하나 없었다. 전학생이 친구를 사귀려면 돈이 있어야 했다. PC방, 학원, 태권도, 만화책, 군것질 등등. 돈으로 경험과 기분을 공유하는 애들끼리는 금방 친해졌다. 전학생은 돈도 없는 데다 이미 친해져있는 애들 사이에 낄 자신도 없었고, 그렇게 어영부영하다 또 전학 가길 반복했다. 한참 어린 나이에도 돈 없인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배웠고, 학교 밖에선 누군가를 잘 만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게 다 가난 때문이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나와 우리 집이 못 산다는 이유로 원망해본 적도 없었다. 아, 지금 감성팔이 하는 거 아니니까 좀 더 들어보시라.


마지막 전학은 고2 때였다. 여전히 교우관계가 서툰 전학생은 빠르게 존재감을 잃어갔다. 어느덧 전학생이라는 것도 잊혀질 무렵, 급속도로 나에게 관심을 가져준 여자애가 있었다. 인기도 많은 애가 왜 나한테 다가온 건지 사실 지금도 모르겠다. 아무튼 처음으로 누군가와 연인 관계가 되었고, 이제껏 본적 없는 온갖 감정에 정신을 못차렸다.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은 이것저것 나를 가꾸게 했다. 아르바이트로 돈도 벌어보고, 죽어라 노래연습을 하고, 패션에도 눈을 떴다. 그렇게 있는 거 없는 거 다 끌어모아서 내 감정에 갖다 바쳤다. 뒤늦게 안 사실은 그 애가 잘사는 집안이라 늘 빈부격차가 느껴졌고, 그럴 때면 나는 한없이 작아지곤 했다. 그때 알았다. 가난은 죄가 아니지만 가난한 사랑은 죄라는걸. 없이 자라온 나는 몸도 마음도 여유롭지 못했다. 좋아한단 감정만으로는 이 관계를 유지할 수가 없었고 당장의 난관들을 이겨낼 자신도 없었다. 만나면 즐겁고 기뻐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자격지심의 승리였다.


<구의 증명>을 읽으며 내 철없던 과거가, 미성숙했던 정서가 떠올라버렸다. 이 작품의 두 남녀도 가난한 사랑에 허덕인다. 온전치 못한 가정의 두 아이는 가족보다 더 가족처럼 지내며 언제나 붙어 다녔다. 서로에게 구원이었던 이들에게는 오로지 애정의 마음뿐이었고, 그래서 사랑 외 감정 앞에서는 가볍게 무너져 버린다. 둘은 서로가 아니면 기댈 곳이 없었다. 가난한 집의 애들이 다 그렇듯 이들도 일찍 철이 든다. 소년은 부모의 빚을 갚느라 바빠지고, 부모가 없는 소녀는 소년과의 시간이 줄어들어 서운하다. 그러다 알고 지내던 꼬마가 눈앞에서 사고로 죽자 위태롭던 이들의 영혼은 크게 방황하며 약속이나 한듯 서서히 멀어진다.


꼭 알아야 하는 것은 가르쳐주는 이가 없고, 몰라도 되는 것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눈치로 배운다. 쫓기는 삶을 살아보면 다 그렇게 된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난 소년은 제 구차함을 소녀에게 보여줄 수 없어 이래저래 도피생활을 택한다. 유일한 보호자인 이모마저 죽고 혼자 남은 소녀를 자신의 불행에 끌어들일 수가 없었다. 소녀는 떨어져서 평생 괴로우나, 함께해서 평생 힘드나 마찬가지라며 같이 살자고 애원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테니 옆에만 있어달라는 말과, 빚쟁이의 삶은 나로 족하다며 밀어내는 마음이 계속해서 부딪혔다. 누군가는 사랑하니까 보내주라고 하고, 누군가는 사랑한다면 끝까지 잡으라고 한다. 보내주지 않으면 이기적이라고 하고, 붙잡지 않으면 사랑이 그거밖에 안되냐고 한다. 사랑이란 게 어떤 공식이나 정답이 있는 건 아니지만, 가난한 사랑에는 답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 많은 세상 풍파를 사랑과 믿음만으로 헤쳐나갈 수는 없다. 왜 그런 노래 제목도 있지 않은가.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생각지도 않은 그로테스크한 묘사가 자주 나온다. 그러니 마냥 짠하고 먹먹한 러브 스토리라 생각지는 마시길. 왜 작가는 이 눈물겨운 작품에 기괴함을 집어넣은 걸까. 이들의 지고지순한 사랑은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영역에 있음을 표현하려던 건지도 모른다. 일개 독자의 소견으로는, 그런 묘사나 표현 없이도 충분히 감정을 끌어내고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에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런 장면들이 작품에 썩 녹아든 것 같지도 않았고. 여하튼 최진영의 혼잡한 감성을 엿볼 수 있는 무난 무난한 작품이다. 기회 되면 읽어보시되, 추천은 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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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2-03-02 23: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전학을 많이 다니셨군요. 저는 한 번도 전학을 해본적이 없어 그 기분을 잘은 모르지만, 제가 초딩 때 키가 커서 대부분 혼자 앉았어요. 그래서 제 옆 빈자리는 늘 전학생이 앉았죠 ㅎㅎ
근데 그 어색함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그러니 전학생은 오죽했을까 싶어요.
고2 때 현실의 사랑에 눈뜨셨군요. 저는 물감님과는 반대로 세상을 너무 늦게 알아서 😢

이 책 유명한거 같아요. 저도 들어봤고 도서관에서 본 적 있거든요. 제목부터가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네요.

물감 2022-03-03 00:05   좋아요 1 | URL
유소년때 전학은 진짜 최악이에요. 성장이 멈춰버려요. 아니면 매우 더디거나요.
쿨캣님은 전학생들이 안불편하셨나요?ㅋㅋ

이 책은 그냥 그러네요. 강렬한데도 남는게 없는듯한..

coolcat329 2022-03-03 07:53   좋아요 1 | URL
전학생 진짜 불편했죠. 특히 남자일때 , 교과서 같이 봐야할 때는 그 어색함이 ㅋㅋ

새파랑 2022-03-03 08: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완전 감성적이네요~!! 물감님 리뷰만 읽으면 별 다섯 느낌입니다~!! 전 고 2때 스타크래프트나 하고 있었는데 역시 남다르셨군요~

꼭 알아야 하는건 정말 아무도 안가르쳐주더라구요 ㅎㅎ 왠지 이 책이 땡깁니다 ㅋ

물감 2022-03-03 09:44   좋아요 1 | URL
저는 pc방을 안다녀서 스타같은 pc게임하고 멀어질 수 밖에 없었어요 ㅋㅋㅋㅋ 돈 없어서 오락실만 다녔더니 지금도 100원으로 한 시간은 플레이 합니다. 조이스틱과 버튼의 맛, 잊을 수가 없네요 ㅋㅋㅋㅋㅋㅋㅋ
저는 그저그랬지만 새파랑님은 이 책도 냠냠냠 잘 읽으실 거 같아요~ 이책 보다는 <해가 지는 곳으로>를 더 추천합니다 ^^

책읽는나무 2022-03-03 09: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최진영 작가의 소설을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구의 증명> 내용이 좀 생소해서 안읽은 걸 읽었다고 착각했나보다~싶었는데 <해가 지는 곳으로>를 읽은 것 같네요? 그 책은 핀 시리즈 맞죠??^^
최진영 작가의 소설 읽고 꽤 괜찮다는 느낌이 남았었는데 역시 물감님은 별 셋!!! 별짠님!!
별 하나는 더 주시지!!!!ㅜㅜ
그래도 물감님의 리뷰는 늘 읽기 좋아요.^^
김동률 가수의 노래 연습은 고2 때 부터셨구나? 뭐 그런 생각을 좀 했습니다ㅋㅋㅋ
좀 아픈 사랑이었을 수도 있었겠으나, 김광석 가수 노래 제목은 늘 옳다고 생각합니다.^^

물감 2022-03-03 13:16   좋아요 1 | URL
찾아보니까 <해가 지는 곳으로>는 민음사의 ‘오늘의 젊은 작가‘시리즈 더라고요~ 그 시리즈를 몇 권 읽어봤는데 대체로 다 괜찮은 편이었어요. 대거상 받은 <밤의 여행자들>도 이 시리즈입니다^^

음... 저는 별점이 짜면 짤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ㅋㅋㅋㅋ 점수와 별개로 칭찬도 하니까요. 이게 다 높은 점수만 주는 독자들한테 수없이 낚인 탓입니다요... ㅋㅋㅋ

김동률도 김광석도 늘 옳습니다. 요즘은 이런 류의 가수 구경하기가 넘 힘들어요ㅠㅠ 그래서 계속 과거에 머물러있게 되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