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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2
헤르만 헤세 지음, 한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평점 :
판매중지
MBTI 검사 결과 INFJ인 나님은 한마디로 이방인이라서 평생을 고통 중에 방황하는 유형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내가 무겁고 적막한 이야기에 끌리고, 그토록 페이소스를 중요시했던 게 알고 보니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사실 그렇게나 삶이 힘들면 즐거움과 평안을 쫓아야 할 터인데 오히려 스스로에게 시련을 가함으로써 고통의 삶을 자처한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근데 나의 내면 어딘가에서는 이 같은 시련이 있어야 자아가 성장한다고 보는 모양이다. 그래서 소설을 읽어도 꼭 트라우마로 맘 고생하고 성장통 씨게 겪는 인물의 이야기에 매력을 느끼곤 한다. 재밌게도 고전문학에는 그런 캐릭터들이 넘쳐나는데, 많은 나라 중에서 독일 쪽이 나랑 잘 맞는 것 같고, 여러 작가들 중 헤르만 헤세와 가장 잘 맞는 듯하다. 헤세의 삶 또한 방황과 시련 그 자체였고, 그래서 그는 항상 자아를 찾고자 하는 작품을 많이 썼다. 그러다 보니 작품이 다 고만고만해 보여 혹자에겐 지겨운 인상을 주겠지만, 나 같은 이방인에게는 참으로 고맙기만 한 작가란 말씀. 나의 아픔을 헤아리고 어루만져 주는 작가를 살면서 몇 명이나 만나보겠나. 헤세, 당신은 그저 빛...
동네에서 영재 소리 좀 듣던 초딩 한스는 명문 신학교에 들어간다. 그곳에서도 모범생이 되어 선생들의 관심과 총애를 받는 공부의 신, 한스. 전국에서 모인 돌아이들 가운데 랭킹 1위인 하일너와 단짝이 되고부터 한스의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한다. 의욕 저하로 성적과 사회성이 쭉쭉 떨어지고, 그러다 결국 정신쇠약증에 걸려 퇴학을 당하고 만다. 이후 어떻게 해봐도 병이 낫질 않자 죽음으로 고통을 끝내려던 그에게 한줄기 빛이 내려온다. 그것은 바로 LOVE...
앞서 말한 대로 나님은 방황하는 이야기를 좋아하나 정확히는 극복과 성장보다는 고뇌와 방황에 더 주목하는 편이다. 우리 아싸들이 겪는 방황은 뭐랄까,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만 같아서 주변에 탄식과 아우성이 끊이질 않는다. 주인공 한스도 마찬가지였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만 살았다 보니 어느새 미세한 자극에도 금이 가는 유리멘탈이 된 주인공. 낚시가 유일한 취미이자 기쁨이었는데 그마저도 학업 때문에 내려놓았고, 이로써 ‘나‘를 잃어버린 소년의 보이지 않는 방황이 시작되었다. 이어서 신학교 희대의 빌런, 하일너의 등장으로 한스의 자아는 흑화하고 독자들은 뜨악한다. 솔직히 이거 <데미안>의 베타버전 아닙니까, 글쎄?
천재 소리 듣는 하일너는 학업에 관심이 없었고, 자신이 좋아하는 대 자연과 시 쓰는 일에만 몰두하는 친구였다. 그의 사차원적인 말과 행동에 모두가 등 돌렸지만 오직 한스만이 하일너에게 끌렸고, 모양은 달라도 목적이 같은 벌과 나비의 관계로 발전한다. 하일너의 돌발행동들은 착한 아이였던 한스에게 엄청난 충격과 자극이었고, 누가 시켜서가 아닌 제멋대로 인생을 재단해가는 친구를 보며 나도 모르는 스위치가 켜지고 만다. 알고 보니 행복은 결코 성적순이 아니었고, 꼭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게 정답이 아니었다. 친구의 반항과 이탈이 옳다고는 말 못 해도, 그 금지된 것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찾아간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은 주인공. 그러니까 이제껏 자신은 남을 위한 인생을 살았고, 하일너는 철저하게 자기 인생을 살았던 거였다. 이제까지 내 인생에 내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한스는 청소년의 허물을 차례차례 벗어던진다. 그런데 이 과정이 너무 빨랐다는 게 문제였다. 와장창 깨져버린 유리멘탈은 한스를 통제불능의 정신병자로 만들어버렸다. 그를 잡아줄 수 있는 유일한 친구는 학교를 떠나 곁에 없었다. 이젠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그 사실이 한스를 깊은 수렁에다 던져넣은 것이다. 그렇게 한스는 커다란 수레바퀴에 깔린 채로 있어야 했다.
근데 하일너가 전교생에게 버림받았을 때에 한스도 그를 외면했었다. 그러자 혼자가 된 하일너를 보며 자신이 얼마나 야만적이었는지 알게 되었고, 다음엔 자신이 혼자가 되어보니 학교가 얼마나 야만스러운 곳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최고의 교육을 자랑하고, 우수한 신학생을 양성하는 신학교가 어쩜 이렇게 영혼을 달래주는 법도 모른단 말인가. 어느덧 몸도 정신도 커버린 소년은 손상 부위를 잘라내려고만 하는 신학교를 이해하지 못해 마음이 완전히 떠버린다. 자신이 그토록 방황할 때 진심으로 대해준 이가 아무도 없자, 어째서 하일너가 그렇게 혼자 겉돌다 학교를 떠나야 했는지 겨우 이해한 것이다. 보다시피 이 두 사람은 이상주의자다. 이런 사람들은 삶의 의미와 목적이 의식주에 있지 않기 때문에 사회성 떨어지고 현실성 없다는 말을 듣기 쉽다. 누구보다 이해와 공감이 필요한 타입인데 본인들도 그 점을 모르고, 남들도 알아주질 않으니 상처가 점점 벌어져 더 이상 손쓸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른다. 과연 헤세는 불완전한 자아의 붕괴 과정을 아주 세밀하게 다루는 감정 조절의 달인이다. 살아생전 헤세가 겪은 고통이 어느 정도였을지 전혀 가늠이 안된다.
고향에 돌아온 한스를 누구도 반겨주지 않았다. 이제 개천에서 용 나올 기대는 물 건너갔으니까. 공부밖에 할 줄 모르던 애가 공부를 내려놓으니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아직 한참 어린 나이인데 벌써부터 실패한 인생이라는 낙인이 찍힌 것이다. 대체 절망이 그를 어디까지 데려가려는 걸까. 한스는 요양하면서 유년시절에 좋아했던 것들과 멀어지게 된 일들을 떠올린다. 또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마음이 끌리던 미지의 것들을 추억해본다. 아무리 찾아봐도 안보였던 나의 존재는 과거에 머물러 있었고, 그렇게 자신을 찾고 나자 병세도 점점 회복되는 게 아닌가. 이쯤에서 어린 한스에게 무거운 짐을 짊어주던 부친과 동네 어른들을 생각해보자. 아이에게 미래만을 강조하고 요구하면 아이는 자신의 현재를 부정당한다고 느낀다. 그게 반복되면 현재를 회피하려는 본성이 눈뜨는데, 문제는 미래가 아니라 과거로 도망 간다는 데에 있다. 아직 자신에게 어떤 기대가 있기 전의 시절로 말이다. 결국 살려고 하는 행동들이 반대로 자신을 잡아먹는 셈이니, 갈수록 심각해진 한스의 병 증세도 사실 이상할 게 없었다. 여하튼 나를 찾아낸 시점에서 소년의 길고 긴 방황은 끝났다고 봐도 된다. 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았지만 이쯤 하기로 하자.
과거의 나도 나고, 현재의 나도 나다. 어느 한 쪽도 부정할 필요는 없다. 세월이 나의 많은 것을 가져갔대도 뿌리만은 여전히 제자리에 있거든. 나보고 넌 이쪽으로만 가야 한다고, 그게 후회 안 할 선택이라 말하는 타인에게 그리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남들이 나를 알면 뭐 얼마나 안다고. 나를 제멋대로 규정한 이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줘야 내 존재가 인정받는 게 아니올시다. 찍먹파라고 해서 부먹을 먹지 못할 이유는 없으니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