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호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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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품은 그 자체만으로도 쉽게 이해되고 충분히 즐길 수가 있는 반면, 어떤 작품은 책 밖의 정보가 필수로 요구되기도 한다. 반대로 사전 지식이나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후자의 책을 읽으면 즐거워야 할 독서시간이 그렇게 괴로울 수가 없다. 감히 소신 발언을 하자면, 소위 지식인들만이 알아듣고 이해할 문학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언제부터 문학이 대중에게 연구 대상이 되었던가. 뭔가의 고발이나 풍자 목적의 작품이라도 마찬가지이다. 엔터테인먼트의 유무를 떠나서 어렵고 복잡하게 쓸 필요가 없다. 설령 작품의 성격상 어쩔 수 없었다 해도 저자 본인의 방대한 지식을 뽐내고 싶은 마음이 느껴져서 작품성과 상관없이 비호감으로밖에 안 느껴진다. 이렇게 말하면 꼭 빈정대는 사람들이 있다. 지가 멍청한 건 생각 못하고 남 탓만 한다는 말. 내가 멍청한 건 부인 안 하지만 그런 말하는 사람치고 본인의 멍청함을 아는 사람도 없더라. 아무튼 처음 읽은 작가의 스타일이 영 아니어서 김이 팍 샜지만 읽었으니 뭐라도 적어본다.


편집장은 2류 기자들을 모아 발간되지 않을 창간호를 만들기로 한다. 그것은 유명인들의 비리를 폭로하는 협박용 신문으로... 이하 생략.


이때까지 읽은 저널리스트 소설 중에 제일 별로였다. 실패한 글쟁이들이 한 팀이 되어 신문 기사를 쓴다는 설정은 ok. 이들은 가짜뉴스를 다루었고, 그래서 어떻게 독자들의 주목을 끌고 자극을 하느냐가 관건이었다. 팀원들은 위에서 시킨 대로 대중의 입맛에 맞는 기사를 써야 했고, 사실을 왜곡해서 독자들의 분쟁을 일으켜야 했고, 별거 아닌 일도 확대해서 스캔들을 터뜨려야 했다. 이 책의 화두는 미디어 정보의 신뢰성인데, 적나라한 언론 부패의 묘사에도 불구하고 시큰둥한 것은 이야기에 매가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팀원들의 창간 활동 위에는 주인공과 편집장의 계획이 있었고, 이 목적을 토대로 쭉 진행되나 했더니 갈수록 작가의 저널리즘 철학 이야기로 변해간다. 기사란 무엇이며 독자의 니즈는 무엇이고 정보란 무엇인가를 디테일하게 쏟아낸다. 정작 풀어야 할 문제는 풀지 않고 흘러가는 이야기의 헐렁한 구조가 킬링 포인트였다.


작품의 방향이 모호해지던 중에 팀원 하나가 무솔리니의 생존설을 깊이 파고들면서 더욱 모호한 방향으로 틀어진다. 자신이 접수한 정보들을 버무린 빅 픽쳐를 주인공에게 신나서 설명하는데 아 글쎄, 주인공 귀에서 피가 흘러나도 꿈적 않는 그의 태도에 백기를 들고 말았다. 이 기자가 하는 말들이 어려워서 나는 따라가질 못했는데, 평소 에코가 이처럼 피곤한 캐릭터이지 않았나 한다. 그런데 저자 후기에서 말하길, 이 책은 자신의 작품 중 가장 학식이 절제된 거란다. 그럼 이게 제일 무난하다는 말? 우웩. 다시 작품 얘기로 돌아와서, 그놈의 무솔리니 이야기만 줄기차게 하느라 그전까지의 저널리즘 썰전도 쏙 들어가고, 간간이 나오던 주인공의 직장 로맨스도 붕 떠버리고, 편집장과의 계획도 허무하게 끝나버린다. 작가는 후반에 가서 거대한 음모론으로 몰고 가는데, 그전까지의 어수선한 상황을 정돈하지도 않고 결말을 내려고만 하니 이 매가리 없는 전개에 영 납득이 안 가는 것이다. 아아, 소대장은 에코에게 매우 실망했다.


유일하게 주목했던 장면은, 팀원 중 홍일점인 주인공의 애인이 얘기한 상투적인 표현의 글은 피하자는 주장이었다. 나는 진부하고 상투적인 표현이 들어간 글을 손사래치는 사람이다. 그건 주로 글감각 없는 사람들이 습관처럼 사용하는 건데, 그것만큼 문장의 질을 떨어뜨리는 것도 없다. 솔직히 아무나 쓸 수 있는 글을 흉내 내서 무슨 기쁨과 유익함이 있을까. 책이든 기사든 서평이든 뭐든 간에 남들과 겹치지 않는 글을 쓰려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 노력들이 쌓여서 오리지널이 되는 거지, 그런 수고가 없이는 맨날 써봤자 감각 있는 글은 절대 나오지 않는다. 글쓰기가 취미라면 상투적 표현을 걸러내는 안목을 기르시길. 그것만 주의해도 최소한 읽기 싫은 글이 되지는 않을 거니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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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12-13 22: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소설 중간에 난데없는 지식 자랑! 저도 좀 싫을 것 같은데요^^; 전 에코는 그 유명한 장미의이름도 안 읽고 산문집만 하나 읽은 사람이라..

물감 2021-12-13 23:51   좋아요 2 | URL
에코의 글은 어렵기로 유명하더라고요ㅋㅋ전 한번 경험한 걸로 만족하렵니다...

coolcat329 2021-12-14 09: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고생하셨네요. 에코 책은 한 권도 읽어보지 않아서 모르나 손이 안가긴 했어요. 어렵다고 해서요.
그래도 끝까지 읽으셨군요! 저라면 포기했을거같아요.

물감 2021-12-14 10:38   좋아요 1 | URL
저번에 제가 혹평한 발자크의 나귀가죽에 비하면 아주 양반이긴 합니다만, 에코도 쉬운 분은 아니더라고요ㅋㅋ하도 유명해서 그냥 읽어보고는 싶었어요...

페크pek0501 2021-12-19 14: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점수를 박하게 주셨네요.
저는 뭐 때문에 이 책을 샀을까요? 아직 읽지 못했어요. ㅋㅋ

물감 2021-12-19 18:01   좋아요 1 | URL
한 때 화제여서 덩달아 구매하지 않으셨을까요 ㅎㅎ 저랑은 안맞았지만 다른 분들은 재미있게 읽으셨다니까 페크님도 그럴거라고 생각됩니다~ 페크님은 어떤 평을 내리실지 궁금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