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라와 태양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홍한별 옮김 / 민음사 / 2021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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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연락 주신 민음사에 무한 감사를 드린다. 빨간 책에 끔찍한 트라우마를 가진 나님이지만 이 작품은 뭐랄까, 품절되기 직전인 유명 브랜드 제품의 유니크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더랬다. 그냥 끌렸다는 얘기다. 이 작품은 로봇, 즉 안드로이드가 인간의 틈바구니 속에서 그들의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끊임없는 이해와 교감을 시도하고 있다. 로봇은 인간의 어느 부분까지 커버해줄 수 있을까? 이제는 많은 일자리를 로봇이 대신해주고 있지만 인간이 지닌 복잡 미묘한 감정까지도 로봇이 채운다는 건 불가의 영역이다. 로봇의 기능 문제라기보다 로봇을 인간처럼 대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점에서 별개의 문제라 하겠다. 인간과 살아가는 로봇 이야기는 다양한 엔터테인먼트에서 쉽게 볼 수 있는데 이런 장르가 꾸준히 사랑받아온 이유는 인간의 존엄성을 조명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절망에 빠진 인간들 가운데서 로봇만이 희망을 노래하고 있어 조금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어쩌면 인간과 로봇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든다.


AF(Artificial Friend), 로봇 클라라는 한 소녀의 선택을 받고 친구이자 집사가 된다. 허나 소녀는 몸이 자주 아팠고 집안은 언제나 초상집이었다. 클라라는 인간의 감정을 스캔하는 지능으로 소녀를 지극정성 보살폈으나 병세는 악화되었다. 소녀의 엄마는 클라라에게 어려운 부탁을 청한다. 소녀를 위해서라면 뭐든 기꺼이 하겠다는 클라라. 과연 로봇은 인간의 빈자리를 얼마나 채워줄 수 있을까.


인간도 인간의 감정을 헤아리지 못하는데 로봇이 그걸 캐치해낸다니 어딘가 좀 낯설다. 아직도 말을 잘 못 알아먹는 ‘시리‘나 ‘빅스비‘같은 친구들은 언제 에이에프처럼 될까나. 여하튼 말을 꼭 걸어야만 응답하는 스마트폰 친구들보다는 에이에프가 여러모로 편리하긴 하겠다. 사실 에이에프들이 주인의 친구 컨셉으로 출시되었다곤 하나 팔려가면 얼마 안 되어 시중드는 가정용 로봇이 되고 만다. 빨래걸이가 돼버린 러닝머신처럼 말이다. 그러나 클라라는 인간을 관찰하는 호기심 덕분에 구세대 모델임에도 특별해질 수 있었다. 클라라는 인간의 한가지 표정에서도 다양한 감정이 들어있음을 인식했다. 기쁨과 슬픔, 분노와 탄식, 절규와 희망 같은 복잡한 감정들이 얽히고설켜있어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텐데도 이해하려 노력하는 클라라였다. 당연히 인간들은 로봇의 노력을 같잖게 여겼고 무생물에게 동정받는 것처럼 느꼈다. 그러나 각자의 아픔과 상처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클라라 덕분에 위안을 얻고 닫혔던 마음 문을 열게 된다.


한정된 무대와 적은 인원으로도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 다들 소녀를 중심으로 움직이지만 결국엔 클라라를 통해서 제자리를 찾게 된다. 이미 첫째를 떠나보낸 소녀의 부모는 둘째도 떠나갈까 하는 슬픔에 잠겨있다. 그래서 엄마는 클라라가 딸을 복제해서 그 뒤를 이어가주길, 그렇게라도 해서 삶을 버틸 수 있길 원한다. 그러나 아빠는 로봇이 딸을 대체하는 것에 강력히 반대한다. 의견 충돌로 멀어진 두 사람은 클라라와의 시간을 가진 후 서로를 존중하고 계획의 타협점을 찾는다. 소녀의 소꿉친구인 소년의 가족도 상황과 입장이 영 좋지 않다. 엄마를 돌보느라 학업도 사교도 뒤떨어진 소년은 자신과 소녀 사이에 벽이 생겨나고 있었고,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계획에서 점점 멀어지는 중이었다. 또한 소녀의 변덕스러운 감정을 받아주다 사이가 확 틀어지기도 한다. 이때 클라라의 메신저 역할로 서로의 본심을 알게 되었고 두 사람은 클라라를 마음껏 의존하게 된다. 심지어 초 까칠한 가정부조차 우리는 한편이라며 마침내 클라라를 받아준다.


태양광을 자양분으로 삼는 에이에프에게 태양은 우주를 다스리고 주관하는 신의 존재이다. 클라라가 희망의 아이콘이 될 수 있었던 건 태양 덕분이다. 자신이 아직 매장의 전시 상품이었을 때, 다 죽어가던 거지가 햇빛을 받고 생명력을 회복한 장면을 본 후로 태양에게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게 된다. 나름의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응답도 없는 태양에게 소녀의 건강을 빌었고, 인간들의 절망 가운데서 항상 긍정적일 수가 있었다. 인간에게는 한낱 해맑은 로봇이었겠지만 클라라는 인간 못지않은 고민과 근심으로 괴로워하였다. 거기까진 좋은데 그에 따른 클라라의 신념과 행동들이 실은 전부 헛다리 짚는 것이어서 이 순진한 친구는 슬슬 현실을 자각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변치 않는 클라라의 근성을 보며 독자는 말리지도 않고 응원하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지켜보게 된다. 남들이 비웃었던 그 노력이 끝내 보상을 받게 되면서 독자는 크게 한 방 먹는다. 내가 하던 노력들도 보잘것없고 별 볼 일 없이 느껴져서 어느새 손 놓고 있지는 않았던가. 이제 보니 진짜 현실을 자각해야 하는 건 우리 인간들이었다.


등장인물들이 전부 ‘소외된 자‘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각자가 어떤 정상적인 범위에 속하지 못하여 상처가 곪고 있다. 건강한 몸을 얻지 못한 소녀, 온전한 가족을 유지 못한 부모, 급이 낮아 교류 모임에 못 어울리는 소년, 감정을 나누어도 인정받지 못하는 로봇.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그들은 정착 못하고 떠도는 이방인이 된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고 설자리를 잃어버리면 자기혐오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면 인간은 스스로를 비난하고 주저앉지만 클라라는 자신을 희생하여 타인을 돕는 길을 택한다. 주인을 섬기도록 만들어진 이 로봇의 프로세스는 어쩌면 우리가 이방인일 때 살아가는 지혜를 나타내는 게 아닐까 한다. 서양에서 동양인으로 살아온 작가이기에 이방인의 심정과 소외된다는 것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다. 그래서 작가는 이 작품으로 아픈 이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이런 작가의 섬세한 감정선을 실컷 볼 수 있는 멋진 작품이므로 독서가라면 절대 놓치지 말지어다.



※ 출판사에서 지원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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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4-01 22:5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리뷰 보니 다시 책 생각이^^ 클라라의 감정선이 정말 섬세하게 잘 그려진거 같아요~!

물감 2021-04-01 23:03   좋아요 4 | URL
새파랑님도 읽으셨군요ㅎㅎ
공감하신다니 감사합니다. 이 작가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coolcat329 2021-04-02 13:3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 아 읽고 싶어라~~적립금 조금이라도 더 모아 사려고 지금 ㅋ 대기중입니당!

물감 2021-04-02 13:38   좋아요 3 | URL
ㅎㅎㅎ조만간 올라올 쿨캣님의 리뷰를 기대하겠습니다😃

붕붕툐툐 2021-04-02 22:5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와~ 이 책은 홍보 안해도 이미 대박인 거 같던데... 출판사에서 먼저 연락까지 주다닛! 물감님 엄청 대단한 분이시군요!!!!@@

물감 2021-04-02 23:20   좋아요 3 | URL
아니요.. 아닙니다(단호).
알라디너로 지내면서 제가 얼마나 허접한 레벨인지 깨닫고 조용히 짱박혀 살아갈 뿐입니다... 결단코 대단한 사람이 아니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