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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러비드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6
토니 모리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3월
평점 :
11월을 통으로 날려먹었다. 낮에는 직장 일로, 밤에는 집안일로. 그렇게 독서활동이 끊어진 한 달 동안 간신히 한 권 읽었는데, 하필이면 집중력을 배나 더 요구하는 작품이라 낭패를 봤다. 사실 나는 책을 못 읽는 것보다 글쓰기를 못해서 감각이 둔해지는 게 더 괴롭다. 보통은 독서를 하면서 리뷰에 쓸 말들이 저절로 떠오르는데, 이번에는 전혀 그런 게 없었다. 심지어 책을 덮는 순간까지도. 영감이 끊어진 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여서 이제 나의 글쓰기는 끝나버린 걸지도 모른다는, 들어본 적도 없는 슬럼프에 갇혀버렸다. 그래서 지금 무슨 말을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한데, 일단 손이 가는 대로 써보도록 하겠다.
토니 모리슨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최초의 흑인 여성작가다. 대단한 건 알겠는데 미안하게도 나한테는 흑인문학이 다 거기서 거기이다. 억압, 학대, 폭력, 차별이 기본 베이스라서 누가 썼든지 똑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런 이유로 이제는 고만고만한 흑인문학을 잘 읽지 않게 되었다. 특유의 헤비한 감성이 나랑은 안 맞는달까. 그런데도 평점이 겁나 높은 책을 보면 괜히 또 궁금해져서 읽게 된다. 내가 봐도 참 모순이다. 이번 작품도 전형적인 흑인문학이었는데, 진심 가독성이 꽝이어서 산소호흡기가 필수였다. 근데 잘만 읽고 극찬하는 남들을 보노라면 허접한 내 독서 수준에 한숨이 절로 난다. 아직도 나는 갈 길이 멀다.
노예 신분을 청산하고 딸과 함께 살아가는 세서. 그녀를 찾아온 노예 시절의 남사친, 폴디. 그리고 이들 앞에 뿅 하고 나타난 의문의 처녀, 빌러비드. 이들의 불편함 가득한 동거가 시작되고, 빌러비드를 통해 세서와 폴디는 지금껏 덮어둔 과거의 잘못과 트라우마로 고통받는다. 자유를 얻고도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한 두 사람, 그리고 소외감 느끼는 딸 덴버. 세서의 가족을 왈칵 뒤집어 놓은 빌러비드,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꽈.
기본 소개는 이렇지만 절반 이상의 내용이 과거에 머물러있다. 소개된 흑인들의 수난이 너무 많아서 뭐부터 적어야 할지를 모르겠다. 제일 먼저 백인들의 노리개가 되어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는 흑인 여성들이 가장 가슴 아팠다. 아비가 없는 노예의 자식들은 백인의 사유 재산이 되어 물건처럼 사고 팔렸다. 흑인 남성들은 이유 없이 수용소로 끌려가기도 했다. 거리에는 신체의 일부가 없는 노예의 시신들이 널부러져 있었고, 숨이 붙어있는 노예들은 가축만도 못한 대우를 받으며 살아갔다. 이렇듯 쉴 새 없이 학대 당한 흑인들의 삶은 세대를 걸쳐서 이어진다. 이 가운데서 임신한 몸을 이끌고 필사적으로 도망친 주인공 세서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기나긴 노예 생활에 지친 세서 가족은 철저한 계획 하에 차례차례 도망친다. 아들들을 먼저 보내고, 당시 막내였던 빌러비드와 탈출하던 세서는 백인들에게 들키면서 엄청난 결단을 내린다. 나는 괜찮지만 딸까지 노예가 되는 건 참을 수 없었던 세서는 제 손으로 자식의 생명을 끊는다. 이 끔찍하고 비정상적인 엄마의 사랑 방식이 꼭 틀렸다고 봐야 할까. 최근 개그우먼 모녀의 동반자살 사건이 있었는데, 자식을 따라간 모친의 위대한 사랑에 감명을 받았었다. 그와 같이 세서의 모성애도 무조건 비난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렇게 직접 죽였던 딸의 영혼은 갑자기 여인의 몸으로 세서 앞에 나타나서 가슴을 후벼파기 시작했다. 죄책감에 괴로운 세서는 빌러비드의 막무가내 행동과 요구에 전부 맞춰주었다. 몸은 야위어가고 정신도 피폐해진 세서. 그러나 아무도 그녀를 말릴 수가 없었다. 그 누구도.
고전문학은 읽을 때마다 새롭고 느낀 바가 다르다고들 한다. 그래서 처음엔 별로여도 재독하면 또 다를 거라는 기대를 하게 되는데, 솔직히 이 책은 재독할 엄두가 안 난다. 이 정신없는 플롯과 뒤죽박죽 문법들에 도무지 적응될 것 같지가 않다. 정말로 난 내가 난독증이 온 줄 알았다. 한 문단 안에서도 앵글이 수시로 바뀌므로 집중하지 않으면 나처럼 수렁에 빠져버린다. 여하튼 내 타입도 아니고 해서 그냥 넘어갈까 했는데, 타 리뷰들을 보니 아무래도 다시 읽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정말 막막했는데 어떻게든 리뷰를 끝마쳤다. 진짜 이번 리뷰는 의식의 흐름 속에 영혼을 모조리 갈아 넣었다. 어서 커피나 빨고 잠이나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