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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4
메리 셸리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평점 :
바빠진 만큼 짜투리 시간을 이용하자는 다짐과 달리 점점 독서와 멀어져서 큰일이다. 이제는 휴일마저 책을 멀리할 정도로 독서 습관이 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나마 고전문학 모임 덕분에 아예 놓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느끼는 요즘이다. 자주 가는 알라딘에도 예전만큼 리뷰가 많이 올라오지 않는듯하다. 다들 바쁜 건지 어느새 활동을 끊은 인싸 이웃들도 여럿 보인다. 나라가 흉흉하니 마음도 뒤숭숭해져서 그러신가. 그러고 보니 요새는 동네 고양이조차 구경하기 힘들어진 듯? 가을이 주는 울적함에 내 기분을 전부 맡기지는 마시길. 이번 선정도서는 그 유명한 프랑켄슈타인 차례이다. 분명 유명한데 나는 뭔 내용인지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고전 반열에 들어선 과학소설로 소개되어있던데 SF가 어떻게 고전으로 분류되는 건지 궁금했다.
이 작품은 지가 싼 똥을 밟고 넘어져 머리 깨진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프랑켄슈타인은 대학에 들어가 화학자의 길을 간다. 생명의 신체를 연구하고 밤낮으로 작업한 끝에 그는 살아움직이는 무생물을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창조자가 된 기쁨에 우쭐했다가 자신이 벌인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는다. 그는 두려움에 괴물을 외면했고 괴물은 세상으로 도망쳤다. 그렇게 망연자실하는 중에 부친의 편지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자신이 만든 괴물이 막냇동생을 죽인 것이다. 사실대로 말도 못하고 고통받는 주인공 앞에 나타나 파격적인 제안을 건네는 괴물. 그리고 진퇴양난에 빠진 프랑켄슈타인. 그러나 이 앞에는 더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고전이 이렇게 재미있을 수도 있구나. 가독성도 좋고 진행속도도 적당하고 메시지도 뚜렷하고 정말 칭찬함. 나는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의 이름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괴물을 지은 박사의 이름이었고, 해설에서도 이 오해를 자세히 해명하고 있었다. 나 같은 사람들이 정말 많았나 보다. 한 인간의 잘못된 욕망으로 태어난 이름 없는 괴물. 왜 하필 인간의 감정을 얻어서 그렇게 시련을 겪어야 했을까. 괴물의 토로를 듣다 보니 이거 이거 너무 짠해서 내가 다 미안해지곤 했다. 괴물은 주인에게 말한다. 모두가 나를 혐오해도 창조자는 그래선 안된다고. 자신은 주인의 정의 그 자체이며 사랑받을 존재인데 이유 없이 쫓겨났다고 하소연한다. 반면 프랑켄슈타인은 가족을 죽인 눈앞의 흉물을 만든 이가 자신임을 계속 상기시키는 괴물이 저주스러웠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괴물이 소개한 오두막집 가족의 이야기도 참 인상 깊다. 오랫동안 그들을 관찰한 결과 괴물은 인간의 언어도 배우고, 감정도 터득하고, 문화도 습득했다. 그러나 인간에겐 선함도 있으면서 동시에 사악함도 들어있었다. 그 가족은 과거 누군가에게 큰 배신을 당하고 조국에서 추방당한 것이었다. 똑같은 인간인데 누구는 아름답고 누구는 추한 게 이해되지 않았다. 더 난해한 것은 착한 사람도 순식간에 돌변하는 인간성의 모순됨이었다. 순수한 심성의 그 가족들은 괴물의 겉만 보고 악마라 판단했다. 괴물은 계속해서 인간에게 다가갔으나 그 내민 손을 뿌리친 건 인간이었다. 우리도 타인을 외모로 판단하지는 않았나 돌아보고 반성해야 한다. 친절을 베풀고도 욕먹은 괴물에게 분노와 복수심이 생겨남을 보면 모든 ‘악‘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된다.
인간에게 멸시받아온 괴물은 자신의 행복의 권리를 주장한다. 자신만 짝이 없으니 동반자를 만들어달라는 요구였다. 거절하면 지옥행 관광열차를 태워주겠단다. 그리하여 피조물은 주인이 되고 창조자는 노예가 되는 반전 드라마가 시작되는데 아 글쎄, 이런 내용을 작가가 19세에 썼다는 게 믿어지는가? 아무튼 한 놈 만들고도 이토록 후회하는데 동반자를 만들라니, 심란하다 심란해. 인류를 해칠지도 모르는 흉기를 내 손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과, 배필을 만들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폭주할 듯한 괴물에 대한 염려 사이에서 멘탈 바사삭 중인 프랑켄슈타인. 그의 의심은 결국 계약을 파기하였고 괴물은 약속대로 지옥을 선사했다. 이후로 그의 주변인들이 차례차례 당하는데 그럼에도 괴물의 존재를 함구하는 주인공이 도통 이해되지가 않았다. 게다가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하는 행동들이 오히려 문제를 더 키우고만 있었으니. 이게 다 심은 대로 거둔 거야, 하기엔 좀 거시기하지만 아니라 하기도 뭐 한 상황이랄까.
나는 행복해져선 안되는 사람이라고 생각 하던 시절이 있었다. 수차례 슬픔과 아픔을 겪다 보면 사소한 기쁨마저 크나큰 사치로 느껴지고 스스로 행복과 어울리지 않는 존재라고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처럼 불행은 자신을 갉아먹고 소중한 것들과 담을 쌓게 한다. 프랑켄슈타인도 그것과 같은 수순을 밟는다. 연속되는 불운 속에 기사회생을 반복하나 말 못할 비밀과 고통으로 죽지 못해 살았다. 이 정도 힘들었으면 누가 봐도 자살했을 법하지만 남은 가족들이 당할 일을 생각하면 죽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괴물은 그의 절친을 죽여 정신착란을 일으켰고, 살인죄를 누명 씌워 감옥신세가 되게 하고, 마을 전체에게 죄인 취급받도록 만들었다. 약속을 어길 시 지옥 관광을 선언했을 때 이런 지능 플레이를 할 거라고 상상도 못했다. 내가 볼때 이 책은 고전보다는 메가 히트작 스릴러문학으로 분류가 되었어야 했다.
프랑켄슈타인을 일편단심 사모하는 엘리자베트도 그렇지만, 어떤 상황 속에서도 아들의 지주가 되어준 부친의 사랑 또한 위대했다. 타지에서 수년간 연락도 없는 아들을 대견하게 여겼고, 막내가 죽었을 때 본인도 괴로우면서 아들을 지치지도 않고 달래주었고, 다시 장기 여행을 떠난다는 아들을 응원해주었고, 머나먼 나라에서 감옥신세가 된 아들을 보러 달려와서 간병해준 아버지. 아들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도 끝까지 캐묻지 않았던 속 깊은 부친이 있어줘서 주인공은 다행히도 고독사를 면할 수 있었다. 나는 또 한번 부친의 마음을 아프게 하더라도 아버지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놨어야 했다고 본다. 슈퍼맨도 지구에 위기가 닥치면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만큼 어려운 문제를 혼자 해결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부담감이 따른다. 주인공도 할 만큼 했으니까 이제 그만 아파했으면 싶었다. 그러나 반전은 없었고 모두 다 괴물의 제물이 된다. 그제서야 헌터가 되어 괴물을 추격하는 프랑켄슈타인의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이야기...
역자는 이 작품에 대해 불경한 기술을 빌려 창조주를 사칭함으로써 멸절의 위기를 자초하는 인류에 대한 경고라고 해석하였다. 이 복잡한 말을 간단히 하자면 선을 넘지 말라는 뜻 아닐까. 이건 단지 신의 영역을 침범한 인간의 무모함에 그치는 말이 아니다. 그 어떤 위대한 인간도 자신의 그릇 크기만큼만 담을 수 있다. 욕심으로 더 많이 눌러 담다가 그릇이 깨질 수도 있다. 깨진 그릇은 복구도 안되고 조각 날에 상처도 입는다. 프랑켄슈타인도 괴물을 만들고 나서 지식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욕망에 눈이 머는 게 얼마나 죄악인지 알게 되었다. 이제 곧 2020년에 살아가는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과학기술들에 의존하며 사는가. 나날이 발달하는 그 기술들이 언젠가 선을 넘어서 인류에 큰 재앙을 불러오리라 확신한다. 위험이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르니 집안에 비상용 아이언맨 슈트 한두 개쯤 구비해둬야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