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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오피스 ㅣ 오늘의 젊은 작가 34
최유안 지음 / 민음사 / 2022년 1월
평점 :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말하길, ‘노동‘이란 자발적으로 뛰어들 만큼의 매력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반대로 노동에 강제성이 요구될수록 개인은 기계의 부품이 되어 무력해질 뿐이란다. 허나 자본주의라는 공룡을 생쥐가 무슨 수로 상대한단 말인가. 그냥 위에서 시키는 거나 잘해야지, 괜히 나의 이상과 뜻을 내세웠다간 찍혀서 피곤해질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계획대로 되는 게 없음을 경험할수록 우리의 사고와 태도는 소극적이게 되고, 노동은 매력과 가치를 잃어버리고, 그렇게 개인도 기업도 사회도 다 같이 침몰하는 형국이 되고 만다. 이런 물음들 앞에서 늘 돌아오는 대답은, 너 아니어도 잘만 굴러간다는 고의성 짙은 팩트였다. 따라서 현대인들이 서있는 갈림길은 공룡과의 투쟁이나 협상이 아니다. 오직 복종과 패배만이 기다릴 뿐이다.
앞만 내다보며 달려온 사람도, 실패를 거듭하며 주저앉은 사람도 결국 같은 의심을 한다. 대관절 노동이란 무엇이며 이토록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되는가. 그런 걸 신경 쓸 여력이 있으면 차라리 자기 계발이나 해야 할까?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것마저 여의치 않으면 입 다물고 하던 일이나 잘하라고?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닐 거다. 현재의 내 모습들은 전부 나 자신의 선택으로 이뤄진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투덜거릴 자격도 없다는 말은 어쩐지 너무 가혹하다. 그 불평들은 자아실현의 단계에 훨씬 못 미치는, 전혀 보장되지 않는 삶의 안정성 때문이란 말이다. <백 오피스>는 그러한 불안요소를 안고 살아가는 현대사회를 그린 작품이었다.
대기업 태형그룹과, 태형의 신 프로젝트를 맡은 기획사와, 컨벤션 호텔의 이해관계가 얽힌 내용인데 솔직히 정신 산만해서 피곤했다. 큰 무대와 많은 인물에 비해 분량이 퍽 모자랐고, 복잡한 인물관계 구도가 오히려 집중력을 분산시켰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건 알겠지만 욕심이 너무 과했다. 한 400p 이상의 분량으로 뽑았으면 대박이었겠는데 참 아쉽다. 인물들의 신경전, 직장인의 생존법, 업계의 명암 등 리뷰할 게 많으나 시간상 메인 요리만 다루도록 하겠다.
태형 그룹의 홍지영 대리부터 시작하자. 그녀는 교활한 사수한테 걸려서 몇 년째 시달려왔다. 세상은 순진한 토끼보다 꾀 많은 여우를 더 알아주는 법이었다. 자신의 공을 가로챈 사수의 비리를 고발한 그녀는 이번 컨벤션 행사의 총괄을 맡는다. 이제부터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데 문제는 그녀가 사수처럼 잔머리도 없고 인간관계도 서툴다는 것. 하여 더욱 빈틈없는 책임자의 탈을 쓰려는데,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현타가 연달아 찾아온다. 자신의 능력 부족과 고발정신과 융통성 없음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직장에서, 대체 무엇 때문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싶어진다. 일에 대한 보람은 없고, 평판은 나빠지고, 급여 인상은커녕 일거리만 늘어간다. 지금의 현대인들이 하고 있는 고민거리가 딱 이런 형태다. 그래도 잘해보겠다는 나의 의욕을 확 밟아버리는 이 거지 같은 환경을 참아내기가 정말 힘들다. 심지어 ‘빌런‘들도 자기가 피해자라며 남들과 똑같은 고민을 한다. 그걸 이상히 볼 것도 없다. 우리 모두가 기계의 부품이 되었기 때문에.
다음으로 기획사 직원 임강이를 알아보자. 업계 1위와의 경쟁을 이기고 태형 그룹의 프로젝트를 따낸 그녀. 이번 행사에 진심이었던 그녀는 이름 없는 중소기업의 신화를 새로 쓰고 싶어 했다. 아무튼 행사 기획은 좋았으나 행사 무대를 구현하는 데에는 많은 리스크가 있었다. 디데이는 다가오고, 예산은 부족하고, 세팅은 시작도 못해서 조급해지는 그런 상황.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알게 된다. 담당 업무가 자신의 역량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를. 그 일이 내 능력을 훨씬 초과한다면 아예 도전의 영역을 넘어가 버린다. 마치 만 원짜리 낚싯대로 참다랑어를 잡겠다는 것과도 같다. 임강이는 이번 프로젝트가 버겁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여 업계 1위의 경쟁사에서 온 스카웃에 흔들린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규모가 큰 곳으로 가면 지금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신경 쓸 필요도 없을 테니. 괜히 욱해서 무리하게 계획을 밀어붙인 탓일까. 우려했던 무대 사고가 일어났다. 보통 이런 경우는 불명예를 안고 떠나거나,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혀 쥐 죽은 듯 지내야 한다. 사고가 날 줄 누가 알았겠냐마는, 의욕이 과다해서 너무 오버한 건 아닌지 등등 온갖 자책과 후회를 하게 된다. 신기하게도 꼭 이런 일들은 요령 피우지 않는 사람한테만 일어나더라. 아무튼 옐로카드를 받고도 레드카드를 받은 것처럼 좌절하거나 재기 불능의 상태가 된 현대인들이 나는 가장 안타깝다.
끝으로 호텔의 백 오피스 지배인인 강혜원을 살펴보자. 호텔에는 전반적인 사무와 응대를 담당하는 프런트 오피스 팀이 있고, 그 일들이 원활하게 처리되도록 받쳐주는 백 오피스 팀이 있다. 육아 휴직을 마치고 복귀하여 다시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는 그녀는, 육아보다도 차라리 일하다 죽는 쪽을 더 선호하는 편이었다. 원래도 바빴지만 태형 그룹의 행사로 더욱 바빠진 그녀를 더 이상 참지 못한 남편은 이혼을 요구한다. 가정에 소홀하기도 했거니와 자신이 ‘아내‘와 ‘엄마‘에 맞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나의 가족과 집을 포기할 만큼 직장 일이 나에게 중요한가? 나 자신만 챙기며 잘 살라던 엄마의 모호한 유언을 따라 지금의 자리까지 올랐지만 행복도 보람도 잘 모르겠다는 그녀. 프런트 오피스를 위해 존재하는 백 오피스처럼 자신은 업무에 최선을 다했을 뿐 가정을 외면할 의도가 없다면서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그러다 아수라장이 된 행사장을 보면서 자신이 망쳐버린 가정을 떠올린다. 엄청 극단적이긴 해도 일과 자신의 분리 과정을 제대로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광경을 볼 때마다 나는 맞아야 정신 차린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매우 꼰대스러운 발상이지만.
어디서 읽은 건데, 사람이 무기력해지는 이유는 얄궂게도 너무 잘해보려고 해서란다. 누구나 처음에는 적당히 보다 제대로 하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열과 성을 다한다. 한참을 그러다가 이내 깨닫는다. 적당히 하는 것조차 쉬운 게 아니라는 것을. 영혼까지 갈아 넣어 최대 효율을 내는 것도 한두 번이지, 그게 당연시되면 잘하고도 질타를 받거나 더 높은 목표를 요구받아 완전히 사기가 저하된다. 그때부터는 내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일이 나를 지배하는 구조로 바뀐다. 현대산업의 악조건과 문제점들에 대해서 쭉 살펴봤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으로선 괜찮은 해결책이 없다. 언론에서는 청장년들의 ‘쉬었음‘을 계속 보도하지만, 현실에서는 구직 공고마다 수십수백 명이 지원하고 있다. 어떤 취준생들은 면접을 위해 수년을 준비하는 반면, 고생해서 들어간 직장을 제 발로 뛰쳐나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누구 말마따나 중간만 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현실이다. 죽을 것 같다면서도 잘 참고 사는 분들을 보노라면 내가 꼭 고장 난 부품처럼 느껴진다. 이러나저러나 우리는 공룡을 이길 수 없겠지만 최소한 무기력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어쩌면 그 과제가 취업보다도 더 우선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