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스패셜] 칸영화제여, 다시 한번

황금종려상 경쟁작 퍼레이드

해마다 5월 중순이 되면 영화 마니아의 가슴은 은근히 설렌다. 지나치게 권위적이니, 프랑스 영화에 지나친 우대를 해준다느니, 상업적으로 변해가고 있다느니 하는 각종 나쁜 소문에도 불구하고, 칸영화제의 위력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다. 베를린, 베니스와 더불어 세계 3대 영화제로 불리며 전세계의 수많은 시네아스트들을 발굴해 온 이 유서 깊은 영화제가 어느덧 59회를 맞았다. 아마도 내년 60주년 행사는 이보다 더 성대하게 치러지겠지만, 59회 영화제를 빛내고 있는 공식경쟁작들의 면면 또한 화려하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난니 모레티, 켄 로치, 아키 카우리스마키와 같은 거장에서부터 소피아 코폴라, 리차드 링클레이터,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기예르모 델 토로와 같은 중견과 신예의 작품들이 골고루 배치된 덕분에 어느 누구의 입맛도 쉬이 벗어나는 일이 없다. 사실 누가 상을 받느냐 못 받느냐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지중해의 눈부신 5월 햇살에 한 번 취하고, 기다려온 감독들의 따끈따끈한 신작에 두 번 취하는 일이야 말로 모든 영화광의 비밀스런 꿈일 터. 이 황홀경을 직접 맛보진 못하더라도, 부산영화제를 비롯한 각종 국제영화제들에서 그 실체를 뒤늦게나마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뒤늦은 경험을 기다리는 일종의 예고편인 셈이다.
최은영 영화평론가
거장들의 귀환
경쟁작이 온통 거장들의 작품 일색이었던 작년 제58회 영화제가 비교적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무난하게 치러진 반면, 올해 경쟁작들은 반가운 거장들의 작품뿐만 아니라 이미 자국 내외에서 인정받고 있는 중견 감독들의 작품들로 이루어져있다. 가장 친숙하고도 반가운 얼굴 중 하나는 ‘내 어머니의 모든 것’으로 감독상을 수상한지 7년 만에, 그리고 ‘나쁜 교육’이 경쟁 부문에 오른지 2년 만에 다시 돌아온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귀환’이다. 실업자 남편에 10대 딸을 먹여 살리느라 뼈빠지게 일하는 매력적인 여성 레이문다(페넬로페 크루즈), 그리고 그녀의 언니이며 집에서 불법미용실을 경영하는 솔은 손님과 바람난 남편이 집을 떠난 후 죽 혼자 지내고 있다. 어느 날 그녀들의 삶에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몇 년 전 아버지와 함께 화재로 사망했던 어머니의 유령이 나타난 것이다. 유령이라기엔 너무도 인간적인(?) 어머니의 귀환 앞에서 두 딸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귀환’은 ‘내 어머니의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모성과 여성 커뮤니티에 대한 알모도바르의 애정에 기댄 영화다. 알모도바르는 이 영화의 개인적인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귀환’은 내가 길러진 방식에 대해 말하는 영화이다. 내가 그렸던 캐릭터들은 모두 내 누이들이나 어머니에게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누리 빌게 세일란의 ‘기후’는 ‘우작’을 비롯한 그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가족과 친척을 배우로 총동원해 찍은 영화다. 이번에는 감독 그 자신이 주인공 이사 역을 맡고, 실제 아내인 에브루 세일란이 아내 바하르 역을 맡아 열연한다. ‘우작’에서 사촌형제의 불편한 동거를 소재로 유대감의 상실에 대해 이야기했던 감독은 ‘기후’에서 함께 있으되 외롭기 그지없는 남녀 관계의 이야기를 다룬다. 프랑스의 명 프로듀서 파비엔 보니에가 공동제작한 이 영화는 HD 카메라로 제작돼 디지털 상영이 이루어졌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루저(loser) 3부작의 완결편인 ‘황혼의 빛’도 칸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였다. ‘떠도는 구름’ ‘과거가 없는 남자’에 이은 ‘황혼의 빛’의 주제는 냉정한 사회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고독이다.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와 같은 요절복통 블랙코미디와 ‘성냥공장 소녀’와 같은 진중한 작품을 오가며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카우리스마키는 점점 자신의 세계를 넓혀가고 있다. 2002년 ‘과거가 없는 남자’의 심사위원 대상은 그 신호탄이며, ‘황혼의 빛’은 그의 따뜻한 동시에 신랄한 영화 세계를 보여주는 또 한 편의 걸작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영국의 대표적인 좌파 감독 켄 로치의 ‘보리를 흔드는 바람’은 스페인 내전을 다뤘던 ‘랜드 앤 프리덤’과 마찬가지로 영국에 대항하는 아일랜드의 기나긴 독립 투쟁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의무감과 조국애에 불타는 아일랜드인 데미안(킬리안 머피)은 전도유망한 의사로서의 커리어를 포기하고 형 테디의 위험하고 폭력적인 자유를 위한 투쟁에 합류한다. 자유 투사들의 대담한 전략은 영국군을 위협하고, 두 진영은 마침내 전쟁을 끝내기로 합의한다. 그러나 다시 내전이 발발하여 형제와 가족들이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는 비극적 상황이 도래한다. 아일랜드 출신으로 할리우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킬리안 머피(‘배트맨 비긴즈’ ‘28일 후’ ‘나이트 플라이트’)가 주연한 이 영화에 관해 켄 로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독립 투쟁의 역사는 현재진행형이다. 언제나 세계 어딘가에서는 점령군과 저항군이 존재한다. 이 영화는 동지애와 영웅심리 그리고 비극적 충돌에 관한 영화다. 이는 결코 우리가 피해갈 수 없는 주제이기도 하다.”
‘아들의 방’으로 황금종려상을 받은 지 5년 만에 난니 모레티가 신작 ‘악어’를 들고 돌아왔다. 그의 열 번째 영화이자 칸영화제 공식경쟁작으로는 다섯 번째 영화다. ‘악어’는 이탈리아 부패정치인의 대표 격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이탈리아 총리에 관한 영화를 만들기를 열망하는 젊은 여성영화감독이 파산직전의 성인영화제작자의 눈에 들어 제작을 위해 좌충우돌하는 상황을 그린 영화다. 난니 모레티가 처음으로 주연을 맡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그의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개인적인 뉘앙스를 띠고 있다. “나는 영화를 만들면서 대중들보다는 나 자신의 느낌, 나를 둘러싼 세계에 더 치중하는 편이다. ‘악어’에서 영화 속 영화감독과 내가 겹쳐지는 순간이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난니 모레티는 이 영화에서 늘 그렇듯 주연을 맡는 대신 특이하게도 베를루스코니 총리를 연기했다. 부패정치인에 익숙해진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일종의 충격 요법을 쓰고 싶다는 난니 모레티의 신랄함이 다시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새로운 물결
거장들의 든든한 포진 이외에도 올해 칸영화제는 젊은 스타급 감독들의 신작들이 대거 등장하여 눈길을 끈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로 우리나라에 알려진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딸 소피아 코폴라는 18세기 궁정역사극 ‘마리 앙투아네트’로 처음 칸의 문을 두드렸다. 커스틴 던스트를 앙투아네트로 캐스팅한 소피아 코폴라는 질풍노도의 십대 소녀 앙투아네트를 그리면서 과거와는 전혀 다른 각도로 혁명의 희생양인 비운의 왕비의 삶을 바라본다. ‘아모레스 페로스’ ‘21그램’의 재능 있는 멕시코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는 예의 퍼즐처럼 얽힌 내러티브를 고수한 새 영화 ‘바벨’에서 브래드 피트, 케이트 블란챗,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야쿠쇼 코지와 같은 국제적 스타들을 총출동시켰다. ‘비포 선 라이즈’ ‘비포선셋’의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이 연출한 미국의 패스트푸드 산업을 격렬히 비판하는 영화 ‘패스트푸드 네이션’에는 에단 호크, 그렉 키니어, 패트리샤 아퀘트, 브루스 윌리스 등 우리에게 친숙한 배우들이 모습을 보인다. 그 외에도 ‘블레이드 2’의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광의 나날’ ‘도니 다코’의 리처드켈리 감독의 신작 ‘남부 이야기’, 데뷔작 ‘예수의 삶’으로 황금카메라상을, ‘휴머니티’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칸이 낳은 감독 브루노 뒤몽의 신작 ‘플랑드르’, 유일한 아시아권 경쟁작인 ‘수주’의 로우예 감독이 연출한 ‘여름 궁전’ 등이 눈에 띤다.
올 칸영화제에는 한국 영화가 경쟁작에 이름을 올려놓진 못했지만 윤종빈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가 ‘주목할 만한 시선’에 올라 신인감독상인 황금카메라상을 두고 경합을 벌이며,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 감독주간에서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한국 관객들에게는 좀 아쉬울 수도 있는 일이겠으나, 영화제는 수상을 향해 달려가는 올림픽이 아니라, 의미 있는 새로운 영화들의 성과를 논의하고 영화인들이 서로의 영감을 교환하는 특별한 자리이다. 신선한 패기와 거장의 완숙함을 한꺼번에 기대할 수 있는 올 칸영화제의 황금종려상 경쟁작 퍼레이드는 그래서 더욱 반갑다.
경쟁작만큼 치열했던 ‘칸 원정단’
홍보대사 최민식, 양기환 대변인, 김홍준 감독 등 ‘문화침략 저지 및 스크린쿼터 사수’를 위한 세계인의 연대를 이끌어 내기위해 칸으로 떠났던 영화인대책위 칸 원정단이 돌아왔다. 이들은 개막식을 앞둔 17일 오후, 영화제의 중심부 팔레광장 앞에서 침묵시위와 선전전으로 칸 스크린쿼터 캠페인을 시작했다. 한국영화인 50명과 70개국 배우 노조연합체인 국제배우노조연맹 까뜨린 알레라스 부회장, 노동총연맹 공연예술노조의 끌로드 미셀 위원장, 칸영화제 감독주간을 진행하는 영화감독협회의 뤽 르클레르 뒤 사브롱 부회장 등 세계 각국의 영화인 20여명이 동참했고, 입장 바로 전까지 턱시도를 입은 채 자리를 지켰다.
18일부터 21일까지 4일간은 1인 시위가 진행되기도 했다. 18일, 최민식 홍보대사가 ‘Globalise Hope, not Hollywood. Every Culture has the right to Exist (할리우드가 아닌 희망을 세계화하라. 모든 문화는 존재할 권리가 있다)’고 적힌 피켓을 들고 그 시작을 알렸으며 유럽1, 까날 플 뤼스, 아르테, 라디오 프랑스 등 세계 각국에서 온 50여명의 기자들이 2004년 감독상 ‘올드보이’의 주연배우 최민식을 주목했다. 또한, 칸을 찾은 영화인들과 관객들이 직접 ‘스크린쿼터 사수 한미FTA 저지(Yes to Screen quota No to FTA)’가 적힌 종이를 들고 시위에 동참했다. 19일에는 ‘주목할만한 시선’에 초청된 윤종빈 감독이 ‘용서받지 못한 자’ 상영관인 바쟁극장 앞에서 ‘Screen Quota, craddle of Future. Korean Filmmakers’ dream (스크린쿼터는 미래의 요람-한국의 영화감독들의 꿈)’이 적힌 피켓을 들고 그 뒤를 이었으며, 20일에는 팔레광장 입구에서 ‘괴물’로 ‘감독주간’에 초청된 봉준호 감독이 ‘독점이 아닌 문화다양성을 세계화하기위해 스크린쿼터를 사수하자 (Save the Screen Quota to globalise Diversity, not monopoly)’며 1인 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는 촛불집회로 이어져 150여명이 소망의 불을 밝히기도 했다.
스크린 쿼터 사수를 위한 기자간담회와 한국 프랑스 공동 심포지움이 계속되는 가운데, 칸 영화제 이사회측은 21일 일요일 오전 9시부터 진행된 정기이사회를 통해 만장일치로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에 대한 지지입장을 표명했다. 아래는 칸영화제 운영위원회 이사회의 공식 결정 전문이다.
문화다양성 존중을 중시하는 칸영화제 이사회는 2006년 5월 21일 일요일 소집되어‘스크린쿼터’축소 를 저지하기 위해 투쟁하는 세계문화기구연대회의(스크린쿼터문화연대)에 지지를 표명한다. 1993년부터 실시된 한국의 스크린쿼터는 칸영화제가 인정하고 경의를 표하는 다원적 영화의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문화적 예외성’의 효과적인 본보기인 스크린쿼터 축소는 정부의 영화정책의 근간을 흔들 것이다. 세계는 획일화의 위험에 맞서 모든 영화가 꽃피우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진정한 문화다양성을 필요로 한다.
2006년 5월 21일 칸영화제 이사회 일동 만장일치로 채택함.
육진아 기자 yoo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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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뉴스] ‘빨간머리 앤’,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 내한 外

‘빨간머리 앤’,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 내한 ●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 함께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이라 불리는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이 한국을 찾았다. 이번 방문은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전’ 개최 기념과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 관련행사 참석을 위한 것으로 3박 4일 일정으로 이루어졌다. 25일 ‘이웃집 야마다군’의 시사 후에 이루어진 기자회견에서 다카하타 감독은 “많이 참석해주셔서 감사하다”며 말문을 열었다. ‘빨강머리 앤’이나 ‘엄마 찾아 삼만리’같은 TV시리즈와 ‘반딧불의 묘’ ‘추억은 방울방울’등의 극장용 애니메이션으로 친숙한 그는 “보통사람이 보통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것들을 그려왔다”고 작품의 인기비결을 밝혔다. 기자회견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으며 그에게 한국 애니메이션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은 현재 집필과 연구 활동에 전념하고 있으며, 6월 8일부터 28일까지 개최될 감독전에서는 ‘이웃집 야마다군’ ‘반딧불의 묘’ ‘추억은 방울방울’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네 작품이 상영될 예정이다.

강적, “그냥 보면 된다” ●

4개월의 촬영기간, 4개월의 후반작업을 거쳐 개봉을 앞두고 있는 박중훈, 천정명 주연의 ‘강적’이 제작보고회를 가졌다. 굵직한 두 주연배우의 등장과 업타운의 ‘원 모어 타임 (One More Time)’ 라이브 공연으로 열기가 오른 무대에서 전창걸의 사회로 질의응답시간이 이어졌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출연 이후 7년 만에 다섯 번째 형사 역할을 맡은 박중훈은 “얼핏 보기에 쎈 영화같아 뼈 두 개가 부딪치는 듯한데 중간중간 연골이 있는 영화”라며 “가이드라인을 주면 틀에 박혀버리니 그냥 보면 된다”고 말했다. 영화와 드라마를 오가며 활약하고 있는 천정명은 “내 안에 캐릭터와 닮은 면이 잠재돼 있는 것 같다”며 영화에 대한 애착을 표현했다.

가리베가스로 떠나볼까 ●

한국독립영화협회는 ‘독립영화, 관객을 만나다’ 열두 번째 시간을 갖고 김선민 감독의 ‘가리베가스’를 상영한다. 산업화의 공간이었던 가리봉동 쪽방에 살던 주인공이 이사를 하면서 겪게 되는 에피소드를 통해 노동자들의 삶을 성찰하는 이 영화는 지난해 미쟝센 단편영화제와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에서 수상했다. 오는 5월 30일부터 6워 4일까지 ‘독립영화, 관객을 만나다’ 온라인 상영관 세 곳, 민중언론 참세상 www.news cham.net, 프로메테우스 www. prometheus.co.kr, 노동네트워크 www.nodong.net에서 상영되며, 문의사항은 한국독립영화협회 전화 02-334-3166, 메일 kifv@kifv. org를 이용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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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해석이 되나요] 사랑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의 앙트완과 마틸드

사랑함에 있어서 가장 두려운 순간은 언제일까요. 아마도 상대방이 언젠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게 되리라는 걸 깨닫게 되는 시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순간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옵니다. 사랑에 빠지면 자신보다 연인의 감정에 집중하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이지만, 그 사람의 사소한 행동 하나가 미치는 여파는 상상 이상으로 엄청나기 때문이죠. 상대방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작은 균열도 독이 됩니다. 공포 영화를 볼 때 무서운 장면이 등장하지 않길 바라면서도 나타나기 전까지의 긴장감을 참을 수 없는 것처럼, 이별을 예감한 직후부터 언제 올지 모르는 이별의 시간을 향한 팽팽한 긴장감을 견디기란 고통스럽습니다. 때문에 이를 견디지 못한 어떤 연인들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지요.
빠트리스 르꽁트의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연인들의 영화입니다. 앙트완은 미장원 여주인인 마틸드에게 반하고, 둘은 곧 열렬한 사랑에 빠집니다. 그들은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기 전에는 절대로 헤어지지 않겠다’고 맹세하지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마틸드가 두려워합니다. 시간의 흐름에 민감한 그녀는 미장원에 들리는 손님들의 변화를 보고 사랑도 변할까봐 겁이 났던 겁니다. 결국 마틸드는 폭풍우가 치던 날 밤 “당신의 사랑이 식기 전에 떠납니다”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급류에 몸을 던집니다. 절정에서 끝난 사랑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거지요.

물론 삶에 있어서 어떤 종류의 결핍으로부터 비롯되는 아쉬움과 그리움이 자극제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사랑에 있어서 그것들은 판타지에 불과합니다. 영원이란 강박관념에 사로잡히는 순간 우리는 사랑이라는 덫에 빠져들게 되니까요. 바닥을 치지 않은 사랑의 결과가 어땠는지는 최근에 종영한 ‘연애시대’에서도 여실히 나타났지요. 부디 이들과 같은 오류를 범하지 않기를. 사랑과 이별의 시련 앞에서도 초연할 수 있기를. 그러고 보니 평소엔 더없이 로맨틱하게 들리던 영화제목이 오늘은 더없이 아이러니하게 들리는군요.

장영엽 학생리포터 schkolade@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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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α] 수영하는 사람만 알아요

물 속에서 생긴 일
만화책 탐독을 즐기다 자신과 외부를 격리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소년을 보았다. 투명하고 견고한 의식의 상자는 그를 가뒀고 차원을 분리시켰다. 내게는 그런 능력이 없지만 수영장을 갈 때면 그게 어떤 기분인지 알 것 같다. 물은 존재감 없는 공기와는 다르다. 발끝이 닿으면서부터 이질감으로 에워싸다가 이내 외부의 것들로부터 격리시키는 ‘차원의 경계’같은 역할을 한다. 그 속에서 느껴지는 것은 왠지 모를 공포감이다. 발끝에 바닥이 있건만 심연의 바다에 빠진 것과 다르지 않은 두려움이 드는 것은 물은 깊이와는 상관없는 모호한 불안을 전제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위험한 유혹(사진)’의 벤이 수영선수라는 것을 안 순간부터 왠지 모를 불길함이 감돌고, 널찍한 수영장을 떠다니는 ‘스위밍 풀’의 줄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발목에 엉겨 붙는 해초같이 찜찜한 예감이 들러붙는다. 피터 그리너웨이 감독의 ‘차례로 익사시키기’에서도 물의 불안감은 주위를 맴돈다. 한 남자가 욕조의 물에 처박힌 채 죽고 다른 남자는 바다에 빠지고 세 번째 남자는 수영장에서 죽는다. 그들에게 물은 죽음의 의미다. 하지만 세 명의 커플에게 물은 좀 더 긍정적인 의미일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한심하던 세 인간을 삶에서 축출시키는 ‘정화의 수단’이라든지, 세 여자의 삶에 새로운 국면을 맞게 하는 ‘자유에게로의 방출’같은. 결국 물은 분류나 분할이 불가능한 성질처럼 의미조차 단정되지 못하는 모호한 존재다.

발끝에 닿던 수영장의 물이 이제 좀 덜 차갑게 느껴진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서 밥이 호텔수영장에서 헤엄치던 장면이 떠오른다. 물은 외부의 모든 것으로부터 그를 진공상태로 만들었고 또한 빠져나오는 순간 모든 것을 흡수하게 만들었다. 모든 것과 격리하고 또 와해시키는 그 느낌이 느껴진다. 그래서 수영장이 갖는 고유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서, 올 여름도 결국 수영등록을 하고 말았다.
이수빈 학생리포터 fantastic9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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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3rd League] Second chance

처용의 다도
감독 정용화 시간 30분 년도 2005
사랑은 독점적이다. 하지만 독점금지법이 없는 탓에, 연애시장에는 끊임없이 갈등이 솟아난다. 어디부터 사랑이고 어디까지 사랑이 아닌지 말할 수 없을 만큼 어렵고 혼란스러운 사람들 속에서 자기를 지키는 것조차 어렵다.
학창시절 ‘처용’에 대한 존경심이 너무도 의아했다. 아내가 외간 남자와 누워있는 것을 보았는데도 ‘두 짝은 내 것인데 다른 두 짝은 누구 것인고’하며 태평한 소리나 하는 것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는 것일까. 하지만 머리가 커지고, 욕망이 구체화되면서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에 대한 지독한 분노와 열정은 자기초월적인 성질을 갖기 마련이고 그 순간의 인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에 대해. 그는 어쩌면 인간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처용의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따온 ‘처용의 다도’는 바람난 아내의 외도를 지켜본 영민(박원상)이 겪는 이야기다. 젊은 애인과 사랑에 빠진 아내를 기어코 확인한 영민은 조용히 분노한다. 아내를 향한 짜증과 무심한 일상 속에 가시처럼 담긴 배신의 분노. 마치 천천히 목을 죄듯 영민과 아내를 갈라놓는다. 차를 구하러 들른 절에서 처용의 가면을 얻은 영민은 처용의 가면 속에서 과거의 자신과 만나게 된다. 영민은 아내의 외도에 불같이 화를 내기 보다는 조금씩 삐걱이는 문처럼 차츰 분노를 드러낸다. 치밀하게 관찰하고 심지어는 물증까지 잡아내는 그는 이미 자신을 잃어버린 것 같다.
처용이 형상화하는 것은 어쩌면 ‘세컨 챈스’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는 가능성. 우린 종종 그 가능성만으로 위로를 받곤 한다. 스포츠 영화들이 그리고자 하는 것도 이러한 ‘세컨 챈스’다. 절망에 빠지고 끝을 모르는 나락으로 떨어진 인간들이 스스로 증명해 보이는 두 번째 기회에 모두 열광한다. 처용은 스스로에게도, 아내에게도, 그리고 제 3자에게도 두 번째 기회를 주는 것이다. 다시 사랑할 혹은 무너질 수도 있는 삶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말이다.
유희정 프리랜서 elegys@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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