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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종려상 경쟁작 퍼레이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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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마다 5월 중순이 되면 영화 마니아의 가슴은 은근히 설렌다. 지나치게 권위적이니, 프랑스 영화에 지나친 우대를 해준다느니, 상업적으로 변해가고 있다느니 하는 각종 나쁜 소문에도 불구하고, 칸영화제의 위력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다. 베를린, 베니스와 더불어 세계 3대 영화제로 불리며 전세계의 수많은 시네아스트들을 발굴해 온 이 유서 깊은 영화제가 어느덧 59회를 맞았다. 아마도 내년 60주년 행사는 이보다 더 성대하게 치러지겠지만, 59회 영화제를 빛내고 있는 공식경쟁작들의 면면 또한 화려하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난니 모레티, 켄 로치, 아키 카우리스마키와 같은 거장에서부터 소피아 코폴라, 리차드 링클레이터,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기예르모 델 토로와 같은 중견과 신예의 작품들이 골고루 배치된 덕분에 어느 누구의 입맛도 쉬이 벗어나는 일이 없다. 사실 누가 상을 받느냐 못 받느냐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지중해의 눈부신 5월 햇살에 한 번 취하고, 기다려온 감독들의 따끈따끈한 신작에 두 번 취하는 일이야 말로 모든 영화광의 비밀스런 꿈일 터. 이 황홀경을 직접 맛보진 못하더라도, 부산영화제를 비롯한 각종 국제영화제들에서 그 실체를 뒤늦게나마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뒤늦은 경험을 기다리는 일종의 예고편인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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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영화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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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장들의 귀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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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작이 온통 거장들의 작품 일색이었던 작년 제58회 영화제가 비교적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무난하게 치러진 반면, 올해 경쟁작들은 반가운 거장들의 작품뿐만 아니라 이미 자국 내외에서 인정받고 있는 중견 감독들의 작품들로 이루어져있다. 가장 친숙하고도 반가운 얼굴 중 하나는 ‘내 어머니의 모든 것’으로 감독상을 수상한지 7년 만에, 그리고 ‘나쁜 교육’이 경쟁 부문에 오른지 2년 만에 다시 돌아온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귀환’이다. 실업자 남편에 10대 딸을 먹여 살리느라 뼈빠지게 일하는 매력적인 여성 레이문다(페넬로페 크루즈), 그리고 그녀의 언니이며 집에서 불법미용실을 경영하는 솔은 손님과 바람난 남편이 집을 떠난 후 죽 혼자 지내고 있다. 어느 날 그녀들의 삶에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몇 년 전 아버지와 함께 화재로 사망했던 어머니의 유령이 나타난 것이다. 유령이라기엔 너무도 인간적인(?) 어머니의 귀환 앞에서 두 딸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귀환’은 ‘내 어머니의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모성과 여성 커뮤니티에 대한 알모도바르의 애정에 기댄 영화다. 알모도바르는 이 영화의 개인적인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귀환’은 내가 길러진 방식에 대해 말하는 영화이다. 내가 그렸던 캐릭터들은 모두 내 누이들이나 어머니에게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누리 빌게 세일란의 ‘기후’는 ‘우작’을 비롯한 그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가족과 친척을 배우로 총동원해 찍은 영화다. 이번에는 감독 그 자신이 주인공 이사 역을 맡고, 실제 아내인 에브루 세일란이 아내 바하르 역을 맡아 열연한다. ‘우작’에서 사촌형제의 불편한 동거를 소재로 유대감의 상실에 대해 이야기했던 감독은 ‘기후’에서 함께 있으되 외롭기 그지없는 남녀 관계의 이야기를 다룬다. 프랑스의 명 프로듀서 파비엔 보니에가 공동제작한 이 영화는 HD 카메라로 제작돼 디지털 상영이 이루어졌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루저(loser) 3부작의 완결편인 ‘황혼의 빛’도 칸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였다. ‘떠도는 구름’ ‘과거가 없는 남자’에 이은 ‘황혼의 빛’의 주제는 냉정한 사회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고독이다.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와 같은 요절복통 블랙코미디와 ‘성냥공장 소녀’와 같은 진중한 작품을 오가며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카우리스마키는 점점 자신의 세계를 넓혀가고 있다. 2002년 ‘과거가 없는 남자’의 심사위원 대상은 그 신호탄이며, ‘황혼의 빛’은 그의 따뜻한 동시에 신랄한 영화 세계를 보여주는 또 한 편의 걸작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영국의 대표적인 좌파 감독 켄 로치의 ‘보리를 흔드는 바람’은 스페인 내전을 다뤘던 ‘랜드 앤 프리덤’과 마찬가지로 영국에 대항하는 아일랜드의 기나긴 독립 투쟁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의무감과 조국애에 불타는 아일랜드인 데미안(킬리안 머피)은 전도유망한 의사로서의 커리어를 포기하고 형 테디의 위험하고 폭력적인 자유를 위한 투쟁에 합류한다. 자유 투사들의 대담한 전략은 영국군을 위협하고, 두 진영은 마침내 전쟁을 끝내기로 합의한다. 그러나 다시 내전이 발발하여 형제와 가족들이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는 비극적 상황이 도래한다. 아일랜드 출신으로 할리우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킬리안 머피(‘배트맨 비긴즈’ ‘28일 후’ ‘나이트 플라이트’)가 주연한 이 영화에 관해 켄 로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독립 투쟁의 역사는 현재진행형이다. 언제나 세계 어딘가에서는 점령군과 저항군이 존재한다. 이 영화는 동지애와 영웅심리 그리고 비극적 충돌에 관한 영화다. 이는 결코 우리가 피해갈 수 없는 주제이기도 하다.” ‘아들의 방’으로 황금종려상을 받은 지 5년 만에 난니 모레티가 신작 ‘악어’를 들고 돌아왔다. 그의 열 번째 영화이자 칸영화제 공식경쟁작으로는 다섯 번째 영화다. ‘악어’는 이탈리아 부패정치인의 대표 격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이탈리아 총리에 관한 영화를 만들기를 열망하는 젊은 여성영화감독이 파산직전의 성인영화제작자의 눈에 들어 제작을 위해 좌충우돌하는 상황을 그린 영화다. 난니 모레티가 처음으로 주연을 맡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그의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개인적인 뉘앙스를 띠고 있다. “나는 영화를 만들면서 대중들보다는 나 자신의 느낌, 나를 둘러싼 세계에 더 치중하는 편이다. ‘악어’에서 영화 속 영화감독과 내가 겹쳐지는 순간이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난니 모레티는 이 영화에서 늘 그렇듯 주연을 맡는 대신 특이하게도 베를루스코니 총리를 연기했다. 부패정치인에 익숙해진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일종의 충격 요법을 쓰고 싶다는 난니 모레티의 신랄함이 다시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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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물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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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들의 든든한 포진 이외에도 올해 칸영화제는 젊은 스타급 감독들의 신작들이 대거 등장하여 눈길을 끈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로 우리나라에 알려진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딸 소피아 코폴라는 18세기 궁정역사극 ‘마리 앙투아네트’로 처음 칸의 문을 두드렸다. 커스틴 던스트를 앙투아네트로 캐스팅한 소피아 코폴라는 질풍노도의 십대 소녀 앙투아네트를 그리면서 과거와는 전혀 다른 각도로 혁명의 희생양인 비운의 왕비의 삶을 바라본다. ‘아모레스 페로스’ ‘21그램’의 재능 있는 멕시코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는 예의 퍼즐처럼 얽힌 내러티브를 고수한 새 영화 ‘바벨’에서 브래드 피트, 케이트 블란챗,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야쿠쇼 코지와 같은 국제적 스타들을 총출동시켰다. ‘비포 선 라이즈’ ‘비포선셋’의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이 연출한 미국의 패스트푸드 산업을 격렬히 비판하는 영화 ‘패스트푸드 네이션’에는 에단 호크, 그렉 키니어, 패트리샤 아퀘트, 브루스 윌리스 등 우리에게 친숙한 배우들이 모습을 보인다. 그 외에도 ‘블레이드 2’의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광의 나날’ ‘도니 다코’의 리처드켈리 감독의 신작 ‘남부 이야기’, 데뷔작 ‘예수의 삶’으로 황금카메라상을, ‘휴머니티’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칸이 낳은 감독 브루노 뒤몽의 신작 ‘플랑드르’, 유일한 아시아권 경쟁작인 ‘수주’의 로우예 감독이 연출한 ‘여름 궁전’ 등이 눈에 띤다. 올 칸영화제에는 한국 영화가 경쟁작에 이름을 올려놓진 못했지만 윤종빈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가 ‘주목할 만한 시선’에 올라 신인감독상인 황금카메라상을 두고 경합을 벌이며,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 감독주간에서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한국 관객들에게는 좀 아쉬울 수도 있는 일이겠으나, 영화제는 수상을 향해 달려가는 올림픽이 아니라, 의미 있는 새로운 영화들의 성과를 논의하고 영화인들이 서로의 영감을 교환하는 특별한 자리이다. 신선한 패기와 거장의 완숙함을 한꺼번에 기대할 수 있는 올 칸영화제의 황금종려상 경쟁작 퍼레이드는 그래서 더욱 반갑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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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쟁작만큼 치열했던 ‘칸 원정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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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대사 최민식, 양기환 대변인, 김홍준 감독 등 ‘문화침략 저지 및 스크린쿼터 사수’를 위한 세계인의 연대를 이끌어 내기위해 칸으로 떠났던 영화인대책위 칸 원정단이 돌아왔다. 이들은 개막식을 앞둔 17일 오후, 영화제의 중심부 팔레광장 앞에서 침묵시위와 선전전으로 칸 스크린쿼터 캠페인을 시작했다. 한국영화인 50명과 70개국 배우 노조연합체인 국제배우노조연맹 까뜨린 알레라스 부회장, 노동총연맹 공연예술노조의 끌로드 미셀 위원장, 칸영화제 감독주간을 진행하는 영화감독협회의 뤽 르클레르 뒤 사브롱 부회장 등 세계 각국의 영화인 20여명이 동참했고, 입장 바로 전까지 턱시도를 입은 채 자리를 지켰다. 18일부터 21일까지 4일간은 1인 시위가 진행되기도 했다. 18일, 최민식 홍보대사가 ‘Globalise Hope, not Hollywood. Every Culture has the right to Exist (할리우드가 아닌 희망을 세계화하라. 모든 문화는 존재할 권리가 있다)’고 적힌 피켓을 들고 그 시작을 알렸으며 유럽1, 까날 플 뤼스, 아르테, 라디오 프랑스 등 세계 각국에서 온 50여명의 기자들이 2004년 감독상 ‘올드보이’의 주연배우 최민식을 주목했다. 또한, 칸을 찾은 영화인들과 관객들이 직접 ‘스크린쿼터 사수 한미FTA 저지(Yes to Screen quota No to FTA)’가 적힌 종이를 들고 시위에 동참했다. 19일에는 ‘주목할만한 시선’에 초청된 윤종빈 감독이 ‘용서받지 못한 자’ 상영관인 바쟁극장 앞에서 ‘Screen Quota, craddle of Future. Korean Filmmakers’ dream (스크린쿼터는 미래의 요람-한국의 영화감독들의 꿈)’이 적힌 피켓을 들고 그 뒤를 이었으며, 20일에는 팔레광장 입구에서 ‘괴물’로 ‘감독주간’에 초청된 봉준호 감독이 ‘독점이 아닌 문화다양성을 세계화하기위해 스크린쿼터를 사수하자 (Save the Screen Quota to globalise Diversity, not monopoly)’며 1인 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는 촛불집회로 이어져 150여명이 소망의 불을 밝히기도 했다. 스크린 쿼터 사수를 위한 기자간담회와 한국 프랑스 공동 심포지움이 계속되는 가운데, 칸 영화제 이사회측은 21일 일요일 오전 9시부터 진행된 정기이사회를 통해 만장일치로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에 대한 지지입장을 표명했다. 아래는 칸영화제 운영위원회 이사회의 공식 결정 전문이다. 문화다양성 존중을 중시하는 칸영화제 이사회는 2006년 5월 21일 일요일 소집되어‘스크린쿼터’축소 를 저지하기 위해 투쟁하는 세계문화기구연대회의(스크린쿼터문화연대)에 지지를 표명한다. 1993년부터 실시된 한국의 스크린쿼터는 칸영화제가 인정하고 경의를 표하는 다원적 영화의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문화적 예외성’의 효과적인 본보기인 스크린쿼터 축소는 정부의 영화정책의 근간을 흔들 것이다. 세계는 획일화의 위험에 맞서 모든 영화가 꽃피우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진정한 문화다양성을 필요로 한다. 2006년 5월 21일 칸영화제 이사회 일동 만장일치로 채택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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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진아 기자 yook@nae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