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책 탐독을 즐기다 자신과 외부를 격리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소년을 보았다. 투명하고 견고한 의식의 상자는 그를 가뒀고 차원을 분리시켰다. 내게는 그런 능력이 없지만 수영장을 갈 때면 그게 어떤 기분인지 알 것 같다. 물은 존재감 없는 공기와는 다르다. 발끝이 닿으면서부터 이질감으로 에워싸다가 이내 외부의 것들로부터 격리시키는 ‘차원의 경계’같은 역할을 한다. 그 속에서 느껴지는 것은 왠지 모를 공포감이다. 발끝에 바닥이 있건만 심연의 바다에 빠진 것과 다르지 않은 두려움이 드는 것은 물은 깊이와는 상관없는 모호한 불안을 전제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위험한 유혹(사진)’의 벤이 수영선수라는 것을 안 순간부터 왠지 모를 불길함이 감돌고, 널찍한 수영장을 떠다니는 ‘스위밍 풀’의 줄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발목에 엉겨 붙는 해초같이 찜찜한 예감이 들러붙는다. 피터 그리너웨이 감독의 ‘차례로 익사시키기’에서도 물의 불안감은 주위를 맴돈다. 한 남자가 욕조의 물에 처박힌 채 죽고 다른 남자는 바다에 빠지고 세 번째 남자는 수영장에서 죽는다. 그들에게 물은 죽음의 의미다. 하지만 세 명의 커플에게 물은 좀 더 긍정적인 의미일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한심하던 세 인간을 삶에서 축출시키는 ‘정화의 수단’이라든지, 세 여자의 삶에 새로운 국면을 맞게 하는 ‘자유에게로의 방출’같은. 결국 물은 분류나 분할이 불가능한 성질처럼 의미조차 단정되지 못하는 모호한 존재다.
발끝에 닿던 수영장의 물이 이제 좀 덜 차갑게 느껴진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서 밥이 호텔수영장에서 헤엄치던 장면이 떠오른다. 물은 외부의 모든 것으로부터 그를 진공상태로 만들었고 또한 빠져나오는 순간 모든 것을 흡수하게 만들었다. 모든 것과 격리하고 또 와해시키는 그 느낌이 느껴진다. 그래서 수영장이 갖는 고유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서, 올 여름도 결국 수영등록을 하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