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해석이 되나요] 이국에서 들려오는 모국어처럼
| ‘청연’의 경원과 지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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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해전 여름, 유럽에 배낭여행을 갔었다. 여행의 기억이란 여러 번 추억되고, 세심히 기억하려는 노력 때문에 또렷하지만, 이방인이라는 느낌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귓가를 가득 메우던 낯선 언어, 발음, 예측 불가능한 의미들. 혼잣말이라도 하고 싶을 만큼 우리나라말이 그리웠었다. 하지만 소음처럼 멍멍하기만 하던 그 외국어들이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면, 믿을 수 있을까. 꿈을 좇는 박경원(장진영)은 오직 비행사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일본에 유학을 온다. 낯선 곳에서 받는 차가운 대우와 넉넉지 않은 사정이 그녀를 힘들게 하지만 박경원은 씩씩하다. 남자들만 가득한 술집에서 담배를 물고, 우리 가락을 뽑는 멋진 그녀는 우연히 지혁(김주혁)을 만난다. 눈이 소슬거리며 내리던 날에 한껏 센치해진 지혁의 입에서 조선말이 흘러나오자 경원은 놀란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는 “조선분이세요?”다. 그리곤 터뜨린 경원의 웃음 속에는 반가움, 애틋함 그리고 외로움이 담겨 있는 듯하다. 타지에서 만난 동향 사람처럼 반가운 경원과 지혁은 곧 가까워진다. 나라를 잃은 설움이나 조선인이 받는 차별보다 그들을 더욱 가깝게 만든 것은 그저 ‘이방인’이라는 단순한 공감대다. 그리고 그 공감대는 외로움에 기대고 있다. 이방인이라는 사실은 외로움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낯선 곳에서는 외로움에 대해 솔직히 인정할 수 있는 강력한 무언가가 작용한다.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은 저마다의 언어로, 몸짓으로 말하는 이 세상에서 같은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만난다는 것은 ‘알아봄’에 대한 은유적 설정이다. 그 사람의 말만 들리고, 그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만 잘 알 것 같은 그 느낌. 이국에서 들려오는 모국어처럼 가슴 떨리고, 기민하게 마음을 움직이며 묘하게 감동적이다. 이후 한국으로의 비행을 앞두고 지혁의 프로포즈에 경원은 흔들린다. 자신의 꿈 바로 앞에서 사랑이 부르는 소리에 떨리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경원은 ‘자신도 힘들다’며 지혁에게 등을 돌린다. 외로움을 이겨낼 듯 하늘로 비상하던 경원과 그녀를 잡지 못할까봐 불안해 하던 지혁. 모두 자신의 원형인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사랑했던 그 기억 속의 이국 땅에 남아있다. ‘청연’이란 영화를 시대극이나 영웅신화로 읽지 않는 것은 커다란 오류일지 모르지만 영화에서 느껴지는 소소하고 이질적인 외로움은 강렬하다. 고요한 밤에 홀로 누워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고독하고 외로운 것처럼 경원의 사랑은 쓸쓸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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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희정 프리랜서 elegys@empa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