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의 재발견]모로코의 연인들

마이클 커티스 감독의 ‘카사블랑카 ( Casablanca, 1942)’
"잉그리드 버그만이 카페 아메리캥 문을 열고 등장하는 순간을 볼 때마다 내 가슴은 울렁거렸다." ‘시카고 선타임즈’의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가 한 말이다. 로저 에버트가 말하는 결정적 장면 외에도 마이클 커티스 감독의 고전 ‘카사블랑카’에는 되풀이해서 보고 싶은 장면들이 많다. 험프리 보가트와 잉그리드 버그만이라는 대배우의 아우라가 아로새겨진 ‘카사블랑카’는 프랑스령 모로코의 수도인 카사블랑카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사내 릭과 레지스탕스의 아내 엘사의 애틋한 로맨스를 다룬다. 영화의 주인공 험프리 보가트는 릭의 냉소적 이미지를 기막히게 표현해낸다. ‘마지막 세기의 남자’로 불린 이 명배우는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지만 깊은 우울을 간직한 카페 주인 역을 멋지게 소화함으로써 일약 그 시대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카사블랑카’와는 반대로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바벨’에서 모로코는 가난으로 얼룩진 황무지다. 총기를 장난감처럼 다루는 아이들과 폭력이 일상화된 그곳에서 우리 시대의 비극은 잉태된다. 이는 이별, 회한의 노스탤지어가 가득한 ‘카사블랑카’의 모로코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카사블랑카’에서 이국적인 로맨스의 공간으로 기억되는 모로코는 ‘바벨’에서 순식간에 테러리즘이 창궐하는 공포의 공간으로 둔갑한다. 모로코의 황량한 사막에서 촬영한 ‘바벨’에 비해 ‘카사블랑카’는 열악한 제작환경 때문에 할리우드의 스튜디오에서 전 장면을 찍을 수 밖에 없었다. 두 영화의 차이는 ‘현실’과 ‘영화’ 사이에 놓인 거리만큼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카사블랑카’가 보여주는 낭만적 사랑의 수사학은 ‘현실’과 거리가 먼 지극히 영화적인 시공간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멜랑콜리한 무드와 야자수 그림자, 복잡다단한 심리를 표현하는 표현주의적인 조명은 실재하는 장소 모로코를 감상적 러브 스토리를 위한 탈현실적 공간으로 재구성한다. 다시 말해 ‘카사블랑카’에서 모로코는 영화를 위해 창조된 완벽한 허구인 셈이다. 실제 그 당시 모로코는 서구의 이방인들이 뿌리내릴 수 있는 정박의 땅의 아니었다. ‘카사블랑카’의 원작자조차 그 곳에 가보지 못하고 원작을 썼을 정도니까 말이다. 막연한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허깨비의 도시에서 맺어지지 못할 연인들이 만나는 것이다. 그러나 시대와 인간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육화된 체험을 통해서만 얻어지라는 법은 없다. ‘카사블랑카’처럼 때로는 상상력에 의해서 구성된 이야기가 더 큰 반향을 낳기도 한다. 비현실적 사랑이야기이긴 하지만 ‘카사블랑카’가 동시대와 완전히 유리된 영화는 아니었다. 2차 대전이라는 전쟁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미국인들의 신경증이 영화의 공간적 배경을 이국의 땅 모로코로 옮겨 놓았기 때문이다. 세기의 우울이 이뤄지지 못할 사랑의 멜랑콜리로 변환된 것이다.
최은영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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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뉴스]김석훈 조폭변신 ‘마강호텔’ 外

김석훈 조폭변신 ‘마강호텔’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 ‘그녀를 믿지 마세요’에서 코미디와 드라마 적절히 소화했던 최성철 감독의 차기작 ‘마강호텔’이 제작보고회를 가졌다. 조직에서 정리해고를 당한 넘버 2, 대행과 그 일당들의 조직복귀 고군분투전을 다룬 이 영화는 김석훈의 이미지 변신으로도 관심을 모으고 있다. 김석훈은 ‘편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 이 작품을 택했다’고 말하며 외모적인 변신과 코미디 장르로의 도전을 반겼다. 대행의 복귀를 어렵게 하는 마강호텔의 여사장 역은 김성은이 맡았고, 코미디언 박희진과 개성 넘치는 조연 우현, 조상기, 김뢰하가 영화의 맛을 더할 예정. ‘마강호텔’은 오는 22일 개봉한다.

송강호, 이병헌, 정우성, 그리고 김지운

한국 영화계의 ‘큰’ 배우들이 ‘장화, 홍련’ ‘달콤한 인생(사진)’의 김지운 감독 차기작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가제)’에 대거 캐스팅 됐다. 그 주인공은 바로 이병헌, 정우성, 송강호. 이번작품은 20세기 초 세력싸움이 거셌던 만주벌판을 배경으로, 저마다 개성 넘치는 악당들의 승부를 한국식의 웨스턴 무비로 표현하겠다는 각오를 담았다. 또한 세 배우가 자신의 개런티를 제작비에 합산하는 현물 투자 방식으로 영화에 출연키로 결정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번 작품은 오는 4월 크랭크인 하여 6개월 간의 로케이션 후 내년 상반기 개봉 예정이다.

젊은 영국 영화를 만나다
문화학교 서울의 영화주간 행사 이번 주제는 ‘영국프리시네마 특별전’이다. 이번행사는 1950년대 영국의 젊은 감독들이 새로운 영화제작을 선언하며 상영회를 열었던 것으로 시작해 상업적인 억압에서 벗어나 사회 참여적인 영화를 제작했던 영국의 영화운동, ‘프리 시네마’ 5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로 기획됐다. 특별전은 오는 22일부터 3월 7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며,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사진)’를 비롯한 10편의 작품이 상영될 예정이다.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 www.cinematheque.seoul.kr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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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해석이 되나요]With Love, Choc

‘84번가의 연인(84 Charing Cross Road)’의 헬레인과 프랭크

“안녕? 난 촉이에요. 시도 때도 없이 하늘로 뻗쳐있는 내 잔머리를 보고 친구들이 외계와 교신하는 더듬이 같다며 붙여준 별명이에요. 난 내 별명이 썩 마음에 들어요. 입술을 동그랗게 모아 발음하는 것도 좋고, 지금 이렇게 당신과 교신하는 것도 멋진 일이니까요. 어때요, 잘 들리나요?”
지구에는 내가 찾는 사랑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내가 드라마틱한 시츄에이션을 꿈꾸는 로맨티스트인 건 아니다. 또한 나는 염세주의자도, 4차원은 이미 섭렵하고 40차원의 어디쯤을 헤매는 부유(浮遊)적 인간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사랑도 그렇고 세상만사 무엇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무지하게 건조한 인간이랄까.
그러던 어느 날, 영화 속에서 헬레인과 프랭크를 본 나는 둘을 사랑의 범주에 넣을 것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미국에 사는 아마추어 작가 헬레인은 미국에서는 구하기 힘든 책들을 싸게 사기 위해 런던의 한 책방에 편지를 보낸다. 책방 주인 프랭크는 자기처럼 책을 좋아하고 열정적인 성격을 가진 헬레인을 위해 그녀에게 보낼 책을 구하는 일에 전념한다. 그와 그녀가 서로의 편지를 받는 그 순간의 표정은 행복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둘은 우리 생각처럼 쉽게 얼굴 한 번 볼 수가 없다. 경제적 이유로 그녀의 런던행이 취소되었다는 편지를 받고 아쉬움 채 못 감춘 표정으로 “She's not coming” 을 읊조리는 그. 온 방에 가득인 책을 바라보며 그로 인해 이 미국 한복판이 영국이었노라 깨닫는 그녀. 그 때 두 사람의 얼굴 위로 언뜻 스쳐간 그것이 사랑인지 규정할 수 없다. 그는 행복한 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그녀는 영국에 갈 수 없었다.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트 투 하트의 궁색한 직송 회선으로 이루어낸 소중한 교감들을 사랑의 일종이라 칭할 수 있다면? 아, 나도 죽기 전에 전송속도 아주 느려터진 회선 하나 개통하고 싶다. 만약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수사는 원점으로. 지구에는 내가 찾는 사랑이 없는 것 같으니 다시 외계와의 교신을 시도하는 수밖에.
“하루가 멀다 하고 그를 보는 것, 한 시간이 멀다 하고 그녀에게 전화를 하는 것. 원하면 지금이라도 볼 수 있고 바라면 언제라도 내일의 만남을 약속할 수 있는 관계에게 주어지는 건 뭘까요. 난 그런 거 하나도 부럽지 않아요. 그런 적 없어요? 나는 가끔 사람보다 나무와 더 이야기가 잘 통하는 걸 느껴요. 그냥 그 곳에서 내가 보내는 교신을 받아줄래요? 나무들처럼, 프랭크처럼 막무가내로 엉켜버린 내 이야기를 이해해 줄 수 있나요? 우주로 갈 돈이 없는 내가 헬레인처럼 당신을 그리워할 수 있도록. 사랑을 담아, 촉으로부터.”

손호영 학생리포터 in_azurblu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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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음악처럼]언제나 언제까지나,‘해피엔딩’을!

아나스타샤 Anastasia

‘인어공주’ ‘라이온킹’ ‘포카혼타스’ ‘뮬란’의 OST를 기억하시는 분이 많을 겁니다. 디즈니 사는 각 작품에 빼놓지 않고 듣기 좋은 멜로디 곡을 한곡씩 삽입해 상당한 효과를 봤습니다. 대서사를 펼쳤던 드림웍스 사의 ‘이집트의 왕자’ 타이틀은 두 디바, 머라이어 캐리와 휘트니 휴스턴의 벅찬 조우를 영화의 감동과 성공적으로 연결시키기도 했습니다. 어린시절 이 OST들을 테이프로 사서 모았던 기억이 있는 저같은 경우는 ‘애니메이션 음악은 나름의 진정성을 가지고 언제나 울림을 줬다’는 기억과 깨달음을 얻게 됐죠.
이쯤 폭스 사의 야심찬 첫 애니메이션이었던 ‘아나스타샤’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타사의 작품들과는 달리 극장 흥행에서 실패한 이 작품은 명절 텔레비전용으로 더 많이 애용됐지만, OST만큼은 조금 더 특별하게 다뤄줘야 할 것 같거든요. 그렇다고 이 작품의 사운드 트랙이 아주 특별한 구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웅장한 오케스트라 세션과 합창 코러스로 서사를 끌고 가는 연결트랙들은 오페라 혹은 대형 뮤지컬의 스케일을 만들며 일종의 황홀감을 선사합니다. ‘아나스타샤’만의 개성을 찾자면, 혁명에 온 가족이 사형을 당하고 혼자 살아남아 길거리에 버려진 러시아의 마지막 황녀라는 설정 때문일까요, 일종의 비애감이 묻어난다는 겁니다. 다른 애니메이션들의 사운드트랙들은 쉽게 ‘밝은 노래와 어두운 노래’로 나눌 수 있는데, 유독 ‘아나스타샤’의 경우는 복합적인 감정을 품고 있는 트랙이 많습니다. 특히 ‘원스 어폰 어 디셈벌(Once Upon A December)’ 은 성우들의 버전과 미국 컨트리 여가수 디나 카터가 부른 버전으로 변주됐는데, 디나 카터의 곡에서는 12월과 러시아, 기억만 남고 다 떠나버린 것들에 대한 싸한 느낌이 기타솔로 부분에서 극대화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제 ‘아나스타샤’의 타이틀 두 곡만 말씀드리면 될 것 같아요. 바로 ‘저니 투 더 페스트(Journey To The Past)’와 ‘앳 더 비기닝(At the Beginning)’입니다. 가족을 찾아 파리로의 모험을 감행하는 아나스타샤에게 날개가 되어주는 앞의 곡은 보컬 알리야가 힙합과 소울의 그루브를 그녀답게 잘 살려줬습니다. 그러고보니 비행기 사고로 요절한 재능 넘쳤던 젊은 예술가 알리야가 우리에게 남긴 용기의 노래일 수도 있겠군요. 두 주인공의 키스신과 이어지는 엔딩 크레디트를 완성하는 진정한 해피엔딩의 곡은 ‘At The Beginning’입니다. 발라드의 황제가 돼버린 탁월한 목소리의 록커 리차드 막스와 마력적으로 청량감을 내뿜는 도나 루이스가 듀엣으로 부른 이 곡을 듣고 있노라면 이 세상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아요. ‘당신과 새로운 시작 앞에 서있고 싶어요.’ 최고의 해피엔딩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야’라고 말하는 것임을 새삼 다시 깨닫게 해줍니다.

육진아 기자 yoo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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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스패셜]안녕하세요 나를 기억해주세요

    ni hao qing ji wo

중국어권 영화감독을 만나다

서기, 장첸 주연의 ‘쓰리 타임즈’ 개봉 소식이 들려오니, ‘오!’하는 반가운 감탄사가 저절로 튀어나왔습니다. 오랜만에 중국어 대사를 들어서이기도 하거니와 ‘쓰리 타임즈’가 그리고 있는 옛 대만의 모습이 중국영화에 대한 일종의 향수를 불러일으켰거든요. 물론 대부분이 홍콩영화에 대한 것이긴 하지만요. 향수의 아련함을 달래기 위해, 지금도 주목할 만한 중국어권 감독들의 영화를 새삼스레 꺼내 여기 펼쳐놨습니다.

지독한 고독, 간절한 소통

대만 - 차이밍량

1980년대, 할리우드 영화나 홍콩 오락영화 일색이던 대만 영화계에서는 새로운 물결이 출렁였다. 에드워드 양, 허오 샤오시엔 감독으로 대표되는 대만 뉴웨이브 영화는 ‘영화는 현실’이라는 매우 간단하면서도 원론적인 인식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들의 뒤를 이어 1990년대에 새롭게 등장한 차이밍량 감독은 사실적인 묘사와 롱 테이크, 정적인 화면 등으로 대표되는 종전의 뉴 웨이브 스타일에 ‘도시의 소외된 현대인’이라는 고질적인 문제를 끌어들여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을 탄생시켰다.
‘애정만세’ ‘하류’ ‘흔들리는 구름’ 등으로 베니스와 베를린을 휩쓴 거장감독 차이밍량의 영화는 대체적으로 삭막하고 건조하다. 비관습적인, 때로는 키치적이고 충격적이기까지 한 영화언어의 사용 때문인지 꽤 낯설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감정적으로 멀리 가지는 않는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주로 혼자 식사를 하고, 홍수나 가뭄 따위로 고립되며, 사랑은 불안하고, 결핍된 감정은 억눌린 채 봉인되어 있으며, 늘 지독할 정도로 슬픈 울음을 뱉어낸다. 한 마디로 ‘단절’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소통 가능성을 희미하게나마 열어둔다. ‘애정만세’의 절규에 가까운 울음이나 ‘하류’의 충격적인 비극은 처음으로 뮤지컬 기법을 시도했던 ‘구멍’에서 위층남자가 아래층 여자에게 적극적으로 손을 뻗는 행위를 통해, ‘흔들리는 구름’에서 아스팔트에 눌러 붙어있던 열쇠를 떼어냈을 때 그 바닥에서 물이 솟아오르는 장면을 통해, 그 회복과 구원의 가능성을 구체화한다. 배경음악의 부재, 최소한으로 절제된 대사와 정적인 시퀀스, 간결한 움직임. 이렇듯 거의 독백에 가까운 그의 영화언어는 가장 최근작 ‘홀로 잠들고 싶지 않아’에서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세상에 대한 예의를 다하기 위해

대만 - 허우 샤오시엔

모든 필모그래피에 걸쳐 동시대 사람들과 사회의 고민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허우 샤오시엔 감독은 영화를 ‘세상에 대한 예의’라고 표현한다. 대만 뉴웨이브 1세대로서의 초기작들은 당대 뉴웨이브 세대의 공통관심사였던 성장을 소재로 한다. 성장기 4부작으로 묶이는 ‘펑꾸이에서 온 소년’ ‘동동의 여름방학’ ‘동년왕사’ ‘연연풍진’은 사춘기를 거치는 주인공을 내세워 성장영화의 범주에 속하는 동시에,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전돼 가는 시대와 연결돼 ‘성장’의 사회화를 이뤄냈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은 왜곡된 역사를 바로 알리는데 사명을 가지고 ‘대만 현대사 3부작’을 제작하기도 했다. 장인 정신을 다룬 ‘희몽인생’, 현재와 과거를 재배열하는 독특한 화법의 ‘호남호녀’. 유일하게 국내 개봉되었던 89년작 ‘비정성시’는 가족사라는 틀을 빌렸는데, 귀머거리임에도 역사의 칼날을 피하지 못하는 주인공 ‘문청’을 통해 광복 후 대만의 모습을 처절하게 회고한다.
이처럼 대만 사회와 대만인의 삶의 비애를 꾸준하게 그려온 허우 샤오시엔 감독은 2000년대에 접어들며 ‘현대를 위한 3부작’을 시작했다. 그 첫 작품인 ‘밀레니엄 맘보’는 부유(浮遊)하고, 점멸(點滅)하는 듯한 청춘의 불온한 정서와 혼탁한 빛깔의 미장센을 선보이며 허우 샤오시엔 감독이 스스로 자신의 두 번째 데뷔작이라 일컬었던 ‘남국재견’ 때와는 또 다른 단절을 만들어냈다. ‘현대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으로, 오즈 야스지로 감독 탄생 백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최근작 ‘카페 뤼미에르’는 대만인과 일본인, 과거와 현재의 공존을 통해 따뜻하며 무색무취의 중독성을 가진 ‘새로운 헌사’라 할 수 있다.

여기가 고달프고, 고달파서

중국 대륙 - 지아 장 커

경제활동이 정부의 계획에 의해 조직, 조정되었던 중국에 거세게 밀어닥친 거대한 자본주의 물결은 큰 사회적 충격과 가치관의 혼란을 야기했다. ‘약육강식’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의 원칙은 부의 소득과 분배를 불공평하게 만들었으며,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간극을 더욱 더 넓혀놓았다. 지아 장 커 감독이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꾸준히 짚어내고 있는 문제 역시 바로 이러한 부분이다.
지아 장 커 감독은 중국의 대표적인 5세대 감독인 첸 카이거의 ‘황토지’를 보고 감독이 되기를 결심했다고 한다. 장편 데뷔작 ‘소무’로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상을 수상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그는 이 단 한 편의 영화로 순식간에 중국의 주목할 만한 신인감독으로 떠올랐다. 이러한 ‘소무’를 시작으로 지난 10년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온 끝에 작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스틸 라이프’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소무’에서부터 ‘스틸 라이프’에 이르기까지 그는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세계 속에 섞여들지 못하고 주변부를 방황하는 다양한 인물군상의 고달픈 삶을 담담하게 비춘다. 원칙적으로 그가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은 매 작품 동일하지만 감정의 깊이나 연출의 노련함은 확실히 진화하고 있는 듯 보인다. ‘소무’의 소매치기 청년이나 ‘임소요’의 두 백수청년 샤오 지와 빈빈의 불안한 현실은 ‘세계’나 ‘스틸라이프’ 속 등장인물의 그것보다 훨씬 미니멀리즘하다. 등장인물의 삶에 새겨진 고단함은 지아 장 커 감독의 탁월한 연출력으로 잘 조리되어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풍선처럼 관객의 가슴을 꽉 조여 온다. 그 아무리 비루하고 남루한 일상이라도 절대로 외면하거나 숨기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지아 장 커 감독의 힘이다.

관계로 폭력을 논하다

중국 대륙 - 왕 샤오슈아이

“이미 세력을 가진 주류의 사람들보다 상대적인 약자에 애정을 가지게 되는 것이 사실”이라는 그의 주제의식은 언제나 ‘힘겨운 상황에 처한 인물들의 관계’를 통해 드러난다. 왕 샤오슈아이 감독의 대표작 ‘북경자전거’는 폭력이라는 주제의식을 관계라는 소재를 통해 잘 표현한 수작이다.
주인공 두 소년은 자신이 위치한 서열과 관계없이 동일한 욕망을 가지고 행동한다. 그러나 그들은 폭력으로 이루어진 계급에서 더 상위에 존재하는 다른 누군가로부터 욕망을 제지당하고, 핍박받는다. 세계적으로 북경과 자전거가 가지는 상징성은 대단히 크다. 중국의 얼굴인 이 두 가지 상징을 이용해 폭력과 차별을 이야기한 것은 나아가, 그가 천안문 사태를 직접 목격하고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6세대 감독임을 상기시킨다. 지하영화로 분류되어 오랜 기간 중국 정부와 마찰을 빚어온 까닭에, 데뷔작 ‘나날들’을 포함한 ‘극도한랭’ ‘머나먼 낙원’ 등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북경자전거’ 역시 중국 관객을 만나는 데는 실패했다.
폭력을 대변하는 ‘욕망과 서열’ 코드는 그의 최근작인 ‘청홍(shanghai dreams)’에서도 변주되었다. 꺾인 여성성, 어긋난 부정(父情), 삼선건설(정부정책)에 의한 강제이주라는 소재를 혼합한 이 영화는 정부가 부모세대에 자행한 폭력과 잘못된 양육방식으로 딸에게 상처를 입히는 아버지의 폭력을 스스럼없이 내보인다. 도시의 주류계층과 뒷골목, 아버지와 딸, 정부와 노동자 사이의 갈등을 통해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는 왕 샤오슈아이 감독에게 매번 칸이 찬사를 보내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90년대 홍콩을 위한 노래

홍콩 - 왕가위

80년대에 홍콩 영화계에는 테크닉과 스타일 면에서 향상되었다. 허안화, 방육평, 서극 등으로 구성된 홍콩 뉴웨이브의 선구자 그룹은 대담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더 깊은 영역으로 들어서지 못한다. 이들의 다음 세대로 등장한 90년대의 감독 중 하나가 왕가위다. 왕가위 감독은 상업적인 성격을 갖추면서도 자기만의 스타일을 완성하는 이른바 상업적 예술영화의 길을 걷는다. 그는 허무와 고독 속에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특유의 스타일리시한 화면으로 담아낸다. 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언제나 무언가에 융화된다기보다 겉도는 느낌이다. 그의 영화에는 당시 홍콩 반환이라는 거대한 전환기를 앞둔 홍콩인들의 혼란이 녹아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열혈남아’ 에서 친한 동생의 곁을 떠나지 않는 소화와 텅 빈 마음에 허풍을 담은 창파의 모습은 이후 그의 모든 영화 속에서 많이도 변주된다. 발이 없어 세상을 계속 날아야 하는 새처럼, 아무런 자기 존재의 착륙 기준점을 찾을 수 없는 ‘아비정전’의 아비로도 나타나며, 취생몽사 농담 속에 살아가는 ‘동사서독’의 무사로도 환생한다. 초록과 빨강, 주황과 노랑이 서로 섞이지 않은 채 강렬하게 화면을 뒤덮는 화면은 음악 속에서 더욱 몽롱하여 꿈처럼 느껴진다. 한 번 보면 잊히지 않는 화면으로, 한 번 들으면 자꾸만 되뇌게 되는 음악으로, 허공에 던져지는 대사들로 상처를 건드린다. 언젠가 그는 자신이 슬픔과 허무를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단다. 정말일까. 분명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자기는 언제나 그들의 쓸쓸한 뒷모습에 희망을 얹어주었노라고. 그의 영화 ‘화양연화’에서처럼, 왕가위 감독은 우리에게 있어 누구나 한번은 겪어야 할 허무와 고독의 시기를 담아둘 앙코르와트의 작은 구멍이 되어주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정적이 깨지는 순간에는 그가 있어야만 한다

홍콩-오우삼

80년대 오우삼 감독은 ‘영웅본색’ 을 시작으로 이른바 홍콩 느와르의 화려한 시작을 알린다. 대표작 ‘영웅본색’과 ‘첩혈쌍웅’에서 볼 수 있듯 그의 영화에는 의리를 목숨만큼 중시하는 ‘그’ 가 나온다. 범죄 조직에 몸담거나 킬러 등의 직업을 주로 갖는 그는 선·악 양분법으로 보자면 물론 악인으로 치부될 수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교체되며 비열하게 변화해가는 집단 혹은 전체에 대립하고, 의리와 신의 등 이른바 전통적인 것이 되어버린 덕목들을 또렷한 자기의 기준으로 고수하고 있다는 점은 우리가 그를 단순한 악인으로 규정할 수 없게 만든다. ‘첩혈쌍웅’의 변질된 조직에 맞서는 킬러 아송과, 투철한 경찰정신을 지녔으나 점점 변화해가는 경찰조직에는 염증을 느끼는 리 또한 서로의 숙명적 대립 구조를 따르면서도 그것이 운명이 아니기를 바란다. 이는 홍콩반환을 앞두고 변화의 바람이 불던 80년대의 상황과 맞물려 그가 지난날을 옹호하고 있다는 인상을 풍기기도 한다.
정적을 깨고 시작되는 총격전을 가히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키는 그의 스타일리시한 액션은 할리우드로 진출한 후에도 빛을 잃지 않는다.
그가 할리우드로 진출하여 만든 세 번째 영화 ‘페이스 오프’에는, 비록 영웅적 면모의 ‘그’는 부재하지만 ‘첩혈쌍웅’을 오버랩 시킬 정도의 총격전이 있어 할리우드에서의 오우삼의 입지가 굳어진 것은 물론이요, 그가 특유의 스타일을 지키는 것에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홍콩 영화의 새로운 분위기를 창출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고, 이제는 할리우드에 단단히 자리매김한 거장 오우삼. 직접 연출하는 ‘적벽’으로 돌아올 그의 화려하고 선 굵은 스타일을 기대해 본다.

대학내일 문화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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