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의 재발견]모로코의 연인들

마이클 커티스 감독의 ‘카사블랑카 ( Casablanca, 1942)’
"잉그리드 버그만이 카페 아메리캥 문을 열고 등장하는 순간을 볼 때마다 내 가슴은 울렁거렸다." ‘시카고 선타임즈’의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가 한 말이다. 로저 에버트가 말하는 결정적 장면 외에도 마이클 커티스 감독의 고전 ‘카사블랑카’에는 되풀이해서 보고 싶은 장면들이 많다. 험프리 보가트와 잉그리드 버그만이라는 대배우의 아우라가 아로새겨진 ‘카사블랑카’는 프랑스령 모로코의 수도인 카사블랑카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사내 릭과 레지스탕스의 아내 엘사의 애틋한 로맨스를 다룬다. 영화의 주인공 험프리 보가트는 릭의 냉소적 이미지를 기막히게 표현해낸다. ‘마지막 세기의 남자’로 불린 이 명배우는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지만 깊은 우울을 간직한 카페 주인 역을 멋지게 소화함으로써 일약 그 시대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카사블랑카’와는 반대로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바벨’에서 모로코는 가난으로 얼룩진 황무지다. 총기를 장난감처럼 다루는 아이들과 폭력이 일상화된 그곳에서 우리 시대의 비극은 잉태된다. 이는 이별, 회한의 노스탤지어가 가득한 ‘카사블랑카’의 모로코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카사블랑카’에서 이국적인 로맨스의 공간으로 기억되는 모로코는 ‘바벨’에서 순식간에 테러리즘이 창궐하는 공포의 공간으로 둔갑한다. 모로코의 황량한 사막에서 촬영한 ‘바벨’에 비해 ‘카사블랑카’는 열악한 제작환경 때문에 할리우드의 스튜디오에서 전 장면을 찍을 수 밖에 없었다. 두 영화의 차이는 ‘현실’과 ‘영화’ 사이에 놓인 거리만큼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카사블랑카’가 보여주는 낭만적 사랑의 수사학은 ‘현실’과 거리가 먼 지극히 영화적인 시공간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멜랑콜리한 무드와 야자수 그림자, 복잡다단한 심리를 표현하는 표현주의적인 조명은 실재하는 장소 모로코를 감상적 러브 스토리를 위한 탈현실적 공간으로 재구성한다. 다시 말해 ‘카사블랑카’에서 모로코는 영화를 위해 창조된 완벽한 허구인 셈이다. 실제 그 당시 모로코는 서구의 이방인들이 뿌리내릴 수 있는 정박의 땅의 아니었다. ‘카사블랑카’의 원작자조차 그 곳에 가보지 못하고 원작을 썼을 정도니까 말이다. 막연한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허깨비의 도시에서 맺어지지 못할 연인들이 만나는 것이다. 그러나 시대와 인간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육화된 체험을 통해서만 얻어지라는 법은 없다. ‘카사블랑카’처럼 때로는 상상력에 의해서 구성된 이야기가 더 큰 반향을 낳기도 한다. 비현실적 사랑이야기이긴 하지만 ‘카사블랑카’가 동시대와 완전히 유리된 영화는 아니었다. 2차 대전이라는 전쟁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미국인들의 신경증이 영화의 공간적 배경을 이국의 땅 모로코로 옮겨 놓았기 때문이다. 세기의 우울이 이뤄지지 못할 사랑의 멜랑콜리로 변환된 것이다.
최은영 영화평론가

http://www.naeilshot.co.kr/news/view.asp?num=2321&Sfield=&Sstr=&page=2&cate_news=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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